brunch

연재 중 신곡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le May 06. 2024

01. 혼잣말

(1)

사람이 다 타고나는 복이 있다고 하잖아?

그중 가장 중요한 복이 뭐라고 생각하니?


난 말야...

무엇보다 중요한 복은 부모 복이라고 생각해. 

세상에 부모는 모두 제 자식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하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부모가 많은 건 아니란 거야. 특별히 재주가 없는 애들이 죽어라 공부하는 거라고? 아니, 재주가 어느 정도 인지조차 제대로 가늠해 보지도 못하고 무조건 공부나 하라 내몰리는 애들이 99퍼센트야. 왠지 알아? 그나마 제일 돈이 안 드는 길이거든. 


또는... 이럴 수도 있어.

고슴도치도 제 자식 털은 보드랍다 한다지? 반대로 앙고라 새끼를 낳아 놓고도 털이 수세미같이 거칠다며 오히려 부모라는 작자들이 애를 내모는 경우도 있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콩나물같이 빽빽한 인간들 사이 억지로 꽂을 양이었다면 좀 더 신중했어야지. 좀 더 깊은 결심과 다짐을 했어야지. 여러 번 등산이라도 다니면서 깊게 깊게 생각해 보고 자신 있으면 세상 밖으로 내놓았어야지...


난 어릴 때 집에서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어. 하굣길은 정말 짧았지만 난 일부러 이웃 동네까지 싸돌아다니다 집으로 가곤 했어. 어차피 집에 가면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 부모는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어. 그리고 꽤 무리를 해서 피아노도 집에 들여놔 주었지. 처음 레슨 선생님의 집에서 제대로 피아노 구경을 했던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그 가지런한 하얀 치열과 정확하게 사이사이 꽂혀 있던 검은건반들을 잊을 수 없어. 난 우습게도 그때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며 ‘피아노는 이를 참 열심히 잘 닦았구나...’라고 생각했었거든. 레슨은 일주일에 네 번 선생님의 집에서 받게 되어 있었어. 피아노를 미친 듯 좋아하는 나를 선생님은 꽤 좋아했었어. 그래서 난 특별히 레슨이 없는 날도 아무 때나 선생님 집으로 가서 남는 피아노를 치며 놀았어. 이미 그때쯤은 잘 알고 있는 세상 이치가 하나 있었는데, 세상은 아무리 행복할 때도 ‘밝은 핑크’는 될 수 없다는 거야. 기껏해야 때가 좀 탄 ‘인디언 핑크’가 최선이란 걸 난 알고 있었어. 왜 나의 행복한 피아노 레슨이 ‘인디언 핑크’가 되었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피아노 선생님의 수제자는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건 우리 반 ‘한주’ 녀석이었어. 걔도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탓에 4살 지나자마자 피아노 학원 문턱을 넘었다는군. 어린 날 오뉴월 하루 해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지? 하긴, 한주의 실력은 6학년들도 입을 다물 정도였으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재능은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거나 못 가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해야겠지.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그 자식은 어쩌다 한반도라는 입시지옥에 잘못 떨어진 모짜르트의 후예 정도라고 말해두지.


그래서 나는 녀석을 하루 종일 학교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방과 후 피아노 교실에서도 보아야만 했어. 그 정도면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아주 절친이 되던지, 아님 철천지 원수가 되던지 둘 중 하나란다. 그리고 그 유치한 나이의 남녀란 철천지 원수가 되는 편이 더 쉽고 흔하잖아. 난 그 자식한테 별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걔는 나를 늘 괴롭혔어. 물론 나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녀석을 힘으로 응징했지만 얻어 맞고도 혀를 쏙 내밀며 또 도망가는 그 자식 때문에 언제나 화가 나 어쩔 줄 몰라하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우리 동네에 신기한 미제 물건이며 일제 물건을 한 번씩 왕창 구경시켜 주는 이동식 백화점 아줌마가 있었어. 엄마가 코끼리 보온병을 하나 사겠다고 아줌마가 여는 비밀 집회에 나를 데리고 갔었어. 엄마는 6시간 동안이나 미역국이 쩔쩔 끓는다는 보온물병에, 난 한켠에 얌전하게 놓여있던 초록색 개구리 우산에 반해 버렸어. 보온병만 사서 일어서려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일단 잡고 봤지. 그리고 5살 이후 끊었던 ‘목청 높여 징징대기’를 제대로 발휘해 그 개구리 우산을 데리고 왔단다.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해가 가지? 그날 이후 난 비가 오는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드디어 비가 오던 어느 여름날, 내 개구리 우산은 드디어 빗속에서 큰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는데... 한주 녀석이 날아 차기로 내 우산에 큰 구멍을 내 버렸어. 그래... 그날 이후 그 자식은 내 철천지 원수가 되었어. 아, 물론 그 자식의 노랗고 뚱뚱한 곰탱이 우산도 내 것 못지않게 찢어 놓았지. (난 그 사이즈도 안 맞는 짤뚱한 빨간 조끼를 입은 곰탱이의 이름이 ‘푸우’란 것을 아주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어.) 한주의 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의 부장님이었거든. 해외 영업 쪽이라 출장을 아주 자주 다니신다 했어. 한주는 그다지 아빠 자랑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 아이의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왔는지 아닌지는 반 아이들 모두가 알 수 있었어. 그다음 날이면 한주 녀석은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물건들을 잔뜩 들고 와 애들에게 풀곤 했어. 난 그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 나라면 그렇게 신기하고 소중한 물건들을 집에 꽁꽁 숨겨두고 절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텐데 말야. 한주는 아이들에게 써보라고 나눠 주고선 별반 신경도 쓰지 않았어. 어쨌건 난 내 소중한 개구리 우산을 찢어 놓은 철천지 원수랑 초등학교 6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같은 반이었고, 그중 2년은 재수 없게도 짝이었지. 비가 오는 등굣길엔 난 항상 학교 가는 길 중간부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구린 우산,  바보 우산, 개구리 우산~~’  


하고 시작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의 자작곡을 지겹도록 들었어야 했어. 


딱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난 졸업식날 녀석에게 물었어. 대체 왜 내 개구리 우산은 망가뜨린 거냐고... 이 망할 자식아... 걔는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었어. 마치 그 질문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처럼… 외로워서 그랬다나? 


우리는 비슷한 출발선상에서 시작한다는 착각을 해. 

부모들이 흔히 갖다 붙이는 레퍼토리가 그런 거잖아. 


‘똑같이 학교 다니고, 남 부럽지 않게 잘 키워주는데 왜 넌 쟤보다 못하니?’


정말 우습지 않아? 뭐가 똑같다는 거야? 사람들은 절대 똑같지 않아. 똑같이 시작하지도 않아. 박수소리로 세상을 시작한 아이도 있고 인생에 남은 거라곤 절망밖에 없는 엄마의 한숨 속에 태어나는 아이도 있어. 하루 종일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어주는 엄마를 갖는 아이도 있고,  먹고사는 게 바쁜 엄마가 늙은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맞벌이를 하느라 한참을 할머니가 엄마라 착각하며 크게 되는 나 같은 아이도 있어. 부모가 같지 않은데 똑같은 출발선상이라고 단정 짓는 건 너무하지 않아? 게다가 타고나는 뇌 용량도 다 다르잖아. 그렇게 부모가 물려준 것부터가 다른데 자꾸만 똑같은 처지에 너만 떨어진다고 몰아세우는 게 가장 쉬우니까 그런 억지를 부리는 걸까?


‘사과’, ‘귤’, ’까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그리는 단어들을 비슷한 시기에 깨우치지만 ‘외로움’,’괴로움’,’사랑’,‘그리움’... 같은 고차원적인 단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은 천차만별이야. 책을 또래보다 훨씬 많이 읽어 6학년에 이미 단테의 신곡을 읽기 시작했었던 나는 나름 잘 났다는 자부심이 있었거든? 그런데 말야...


그 아이가 ‘외로워서 그랬다’...라고 했던 그 말 말야...

처음 들었을 때 난 화가 났어.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의 정의란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심심함이 깊어졌다’ 정도였거든. 그러니 그 자식이 심심해서 내 우산을 찢었다고 알아들은 거야. 그래서 난 화가 났었어...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외로움’이란 사실 ‘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어 한없이 슬프고 추운 것’으로 해석해야 조금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난 그 녀석, 한주에게 많이 화가 났었어. 그래서 또 알게 되었어. 우리는 같은 단어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란 걸...  어떤 아이들은 그런 면에 있어 아주 많이 뛰어나기도 한데... 그건 꼭 지능과 상관있는 건 아니란다. 그건 사실 그 또래보다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더 겪어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고 하는 걸 거야.


졸업을 했다고 그 녀석과 헤어지게 되진 않았어. 우린 여전히 같은 선생 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거든. 녀석과 나의 단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피아노를 미친 듯 좋아한다는 거였어. 나도 꽤나 실력이 늘었지만 여전히 녀석은 나와는 다른 차원이었지. 난 더 이상 피곤하게 녀석과 나를 비교하는 바보 짓은 하지 않았어. 말했잖아. 사람은 다 다르다니까… 내가 여전히 개구리 우산 때문에 녀석을 미워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우리는 둘 다 사춘기를 겪는 중이었고, 꽤나 보수적이었는지 그냥 내외를 했어. 피아노 선생님이 입시준비생도 가르쳤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서 떠드는 건 금지이기도 했고 우린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하지 않았기에 단 한마디도 서로 하지 않은 적이 훨씬 많았어. 


중학교 때 난 공부를 잘했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피아노 학원을 안 보내줄 거라고 아빠가 협박을 했기 때문이야. 등수가 떨어져도, 점수가 떨어져도 어김없이 혼이 나야 했어. 그런데 살다 보면 딱히 잘못하지 않아도 재수 없을 때도 있잖아. 여전히 착실하게 학교 다니고 공부했는데 그 달 성적은 엉망이었어. 반에서도 1등이 아니었으니까... 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피아노 레슨을 갔어. 지정곡 연습을 하지 않고 무작정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달리는 나를 보더니 선생은 아무 말 않고 버려두었어. 말은 안 해도 학원의 모든 애들이 알고 있었지. 내가 이번엔 1등을 하지 못했단 걸... 중2가 밤에 갈 수 있는 곳은 학원 외엔 아무 데도 없어. 그런데도 난 집으로 향하기가 싫어 왔던 길을 한 네 번 왔다 갔다 했나 봐. 그때 녀석이 갑자기 나타났어. 


“너 나랑 떡볶이 먹을래?”


그게 근 2년 만에 녀석이 내게 건넨 첫마디였어. 우린 조용히 떡볶이만 먹었어. 분식집을 나섰는데 비가 내리고 있더라. 걔가 개구리 우산은 아니지만 미리 챙겨 나왔는지 3단 자동 우산을 내게 줬어. 자기는 머리가 짧아 집에 가서 그냥 털면 된다고 말야... 난 걔가 드디어 내게 사과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몰라, 나도 왜 그리 녀석의 사과에 집착했는지는...


“너 지금 나한테 사과하는 거냐?”


“아니, 난 정말 별로 미안하지 않아. 개구리 같이 생긴 애가 개구리 우산을 쓰고 다니는데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칙칙한 회색 교복 깃을 세우며 가을비를 뚫고 뛰기 시작하던 녀석은 끝까지 얄밉게 이죽거리곤 다시 달려 나갔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희한하게 사라졌던 녀석이 어느새 앞에 다시 돌아와 있었어. 


“어떤 어른들은, 자기가 못 이룬 어떤 것을 자식이 이루어주기를 바라. 정말 멍청하지 않아? 못 이룬 어떤 것에 대한 집착으로 자기 인생도 망치고 이상한 강요로 자식도 망치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녀석은 다시 뛰어가 버렸지.


‘사춘기라고 미친 개똥철학하고 있네...’


그게 내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든 생각이었지만...

하지만 혼자 녀석이 쥐어 준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오며 사실 되씹어 보기도 했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꽤 똑똑했지만 결국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 부모 같은 어른들은... 자식이 한 두 계급을 뛰어 오른 삶을 살기를 바라고, 그리고 가장 쉽고 튼튼한 사다리는 ‘공부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사실은... 그 ‘쉽고 튼튼한 사다리’는 사실 아주 어려운 것 중 하나일지도 몰라. 그렇게나 공부를 꽤나 했다던 그들마저도 그 사다리는 결국 제대로 오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말야, 그날 이후 학원을 관둔 건 내가 아니라 한주였어. 전국 콩쿨에서 대상을 탄 직후라 모두 어이없어했어.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녀석은 앞으로 콩쿨 한 20개쯤은 더 휩쓸고 이태리나 파리 어드메로 유학을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 피아노 선생님은 결국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하는 학생은 다 피아노를 관두게 마련이라며 슬퍼했어. 그 후로 난 녀석을 본 적이 없어. 난 여전히 학교와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지냈지. 비가 오는 날엔 가끔 그 분식집에 혼자 가 그날 그 자리에서 떡볶이를 먹었어. 녀석이 준 3단 자동 우산도 돌려줘야 하는데... 그 이후 난 한주를 볼 수 없었어. 


여고가 훨씬 많은 지역인데 추첨으로 난 남녀공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어. 반 애들은 부러워서 난리였지만 난 아무렇지 않았어. 어차피 여고를 가건 공학을 가건 내 앞으로의 3년이 지옥의 바닥을 긁을 그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 긁는 와중에 남자애도 있다는 것쯤이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거든. 게다가 난 그 또래의 남자애들이 정말 징그럽게 싫었어. 하나 같이 이상한 목소리에, 코 밑에 거뭇거뭇 난 그 초보 털도 싫었고, 아직 아이도 남자도 아닌 주제에 겉멋은 잔뜩 들어서 힘자랑 해대는 것도 역겨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그 남자 청소년 냄새를 견딜 수 없었어. 그런데 갑자기 공학이면 어쩜.. 한주 녀석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한건 아냐. 아주 잠깐이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