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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세상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잖아. 한주는 우리 학교에서 좀 떨어진 이웃 남고를 다니게 되었대. 작은 키에 왜소한 편이었던 그 애가 고등학교를 가면서 환골탈태라도 한 모양인지 희한하게도 난 얼마 가지 않아 매일 같이 우리 학교 여자애들이 같은 학교 남자애들은 제쳐두고 성봉고 이한주 얘기에 정신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어. 여전히 난 한주를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애들 말에 의하면 밀가루 같이 하얀 피부에 끝없이 긴 손가락, 깊고 우수에 찬 눈을 가진 전국 3퍼센트 내의 수재라고 하더라. 공부 좀 하는 오징어가 된 모양인데 언제부터 오징어가 미남 취급을 받는 건지는 좀 의아했지 뭐야.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난 사실 걔가 준 자동 우산을 꽤 잘 애용하고 있어. 그날도 비가 왔어.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도 좀 더 공부를 하느라 시간을 끌었지. 애들이랑 같은 시간에 나가면 비도 오는데 눅눅한 버스 안에 자리도 없이 남의 우산으로 교복 치마를 적셔가며 기분 나쁘게 가야 하거든. 그래서 난 애들이 좀 빠져나갈 때까지 수학 문제를 풀면서 기다렸어. 종이 치자마자 미친 듯 뛰어 나가는 다른 애들을 난 이해할 수 없어. 집에 가면 뭐가 다른가? 집에 일찍 가면, 씻고 이젠 선생 대신 엄마의 감시하에 공부를 해야 할 텐데... 뭐가 그리 신난다고 종 치면 뛰는지 이해할 수 없어. 애들이 대충 다 빠져나간 것 같아 챙겨 나오는데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어. 난 한주의 우산을 꺼내 펼쳤어... 조금 걷기 시작했는데 10미터쯤 앞에 한 남학생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어. 교복이 성봉고 것이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성봉고는 비 오는 날 걷기엔 꽤 떨어진 곳에 있거든. 거기서부터 왜 우리 학교 앞까지 걸어서 버스를 타러 오는 걸까... 이렇게 비도 오는 날... 난 분명 비가 맞고 싶어 환장한 녀석일 거라 생각했어. 뭐 어차피 우산을 나눠 쓸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지만... 녀석의 멋진 기럭지가 그리 보이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순간 성봉고 교복은 꽤나 태가 난다 생각했지. 늦여름과 초가을 그 중간쯤의 화가 잔뜩 난 하늘은 비로는 성이 안 풀렸는지 번개도 내렸어. 사방이 잠깐 환해지는 그 순간 알지? 앞서 가던 녀석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을 때 가슴이 철렁했지 뭐야. 그 녀석은 바로 이한주였어... 오해는 말아줘. 내가 멈췄던 이유는 내가 들고 있는 녀석의 우산 때문이었으니까... 정말 유치하지만 난 빌린 우산을 당장 내놓으라고 할까 봐 겁이 났던 거라고. 비를 맞으면서 집에 가긴 싫었거든. 그래서 난 녀석이 날 못 알아봤기를 바라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멈췄단다. 그런데 다시 번개가 쳤을 때 말야. 이상하게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어. 걔도 오랜만에 날 보자마자 우산을 내놓으라고 하기가 겸연쩍었던 것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했어… 녀석과 마주치기 싫었으면서도 막상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난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그 자리에 서서 녀석을 찾고 있었어. 한주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고, 무척 추워 보였었거든. 사실 녀석을 찾으면 우산을 같이 쓸 생각도 있었어. 하지만 녀석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어. 또 왜 혼자 비를 맞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걸까? 녀석은 또 외로웠던 것일까?
윤조가 한주를 학교 근처에서 봤던 그날 오전.
윤조네 학교, 2학년 4반 여학생 교실. 아침 7시 45분.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 아침 풍경. 말이 남녀공학이지 남자반과 여자반을 분리해 놓은 이 학교의 아침은 늘 요란하다.
“야, 야! 대호 온다!!”
아침 명상 방송이 시작되기 5분 전이 가장 소란하게 마련이다. 학교에서 좀 날린다는 얼굴 반반한 남학생들이 단체로 지각 전에 사력을 다해 뛰는 타임이기 때문이다. 여느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일반적인 학생주임답게 명민고의 학주도 밤에 조금 수상쩍게 걸었다간 불심검문에 직빵으로 걸릴만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체육선생도 아니면서 낡은 야구배트를 칼처럼 옆에 짚고 서서 교문만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는 학주의 애제자 선도부장이 노란 완장을 자랑스럽게 차고 은사의 수고로움을 덜고자 시간을 2분 단위로 고지하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계절 무관하게 언덕 밑에서부터 뛰어 올라오느라 얼굴에 육수를 아침부터 들이부은 건장한 남고생 무더기와 아직도 젖은 머리에 부은 눈을 한 늦잠족 여학생들이 마라톤 완주자의 피곤함을 쏟아내며 교문을 통과하고 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면 남자 교실,여자 교실 할 것 없이 일찍 온 참새들이 창문에 붙어 서서 대부분 지각 부대에 속하는 학교 내 인기쟁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때 2학년 4반 교실에서도 역시 공부도 중요하지만 학창 시절의 풋풋한 로맨스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어중간한 성적의 촌스러운 여학생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호들갑을 떨게 마련이다. 아예 노는데 도가 튼 뒷자리 아이들은 겨우 님이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먼발치에서 보고자 수고를 떠는 어설픈 짓은 하지 않으며 대학 들어갈 때까지 나는 학생 겸 수녀라고 맹세한 공부교 신도들은 아침마다 수선한 것이 싫어 사실 속으로는 ‘저것들은 합동으로 대학에 떨어져 봐야 한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는 대충 누구나 아는 일반적이고 정확한 집단에 따른 행동 분류가 맞는데 가끔 예외도 있었다.
여학생 반에서 가장 많이 튀어나오는 이름은...
‘장대호’
고 3이고 이 학교 오케스트라와 합창부 단장이다. 서울대 작곡과를 소원하고 있고 중학교 때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예고 대신 일반 인문계를 선택했다. 공부도 잘해 유일하게 지각을 일삼아도 학주의 야구배트를 피해 가는 선택받은 자. 외모가 아주 출중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풍기는 카리스마와 피아노 실력으로 대다수 교내 팬을 확보했다. 이미 같은 학년 피아노 반주자 안소혜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지만 둘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본 이가 거의 없어 여전히 소녀팬들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곧 2학기부터는 학업에만 집중을 하게 될 고3을 대신해 2학년 중에서 반주자며 단원들을 새로 뽑을 예정이라 피아노 좀 치고 바이올린 좀 튕긴다는 2학년 생들의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다.
‘한수헌’
윤조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인 한 수헌은 고2 이과 탑이다. 부유한 집 자식이라 족집게 과외를 달고 사는데, 타고난 머리도 좋아 최소한의 노력으로 거의 매달 전교 1등을 도맡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고, 있는 집 자식이 공부도 잘하고 할 줄 아는 재주도 많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영양도 좋아 키도 크고 생긴 것도 월등하다. 적당히 오지랖도 넓고 가진 자의 거만을 전혀 부리지 않아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대인으로 불리는 자다. 명민고 완벽남으로 불리는 수헌을 유일하게 싫어하는 여학생이 있다면 그게 바로 2학년 4반 하윤조. 올해 들어 윤조는 학교 현관 앞에 늘 붙어 있는 등수판(이 미친 학교는 매달 1등부터 30등까지의 성적표를 현관 앞에 매달았다. 30등 이상 500등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소외감을, 30등 안의 소수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수모와 부담을 겪어야 했다.)의 첫자리를 내내 녀석에게 내줘야 했고 타고난 부모복이 달라 밀리는 거라 윤조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 밉살스러운 완벽남이 좋을 리 없다.
안소혜
이 학교 공식 피아노 반주자. 엄마가 매일 차로 데려다주는 공주인데 엄마가 늦게 데리고 오는 핑계로 늘 지각 면책을 받는다. 3년 내리 학교 교복 모델로 선정될 만큼 예쁘장한 외모에 조용한 신비주의자라 교내뿐 아니라 인근 학교에서도 유명하다. 교문 들어서면서부터 가방 들어주는 머슴들 덕에 언제나 가벼운 여인이다.
전교 3등 안에는 꼬박 드는 윤조가 아침마다 수업 준비 대신 창가에 참새들과 함께 앉아 지각족을 지켜보는 것을 반 아이들은 사뭇 궁금해했다. 물론 그들은 대상이 누구인지를 캐내려 했지만 윤조가 대답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지각생이 다 들어올 때까지 항상 윤조는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점점 아이들은 꼭 누군가를 기다린다기보다 어쩌면 오늘도 공부로 힘들 하루를 대비하기 위한 그녀만의 특이한 습관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너 지금 오석수 기다리는 거지?”
갑자기 누군가 귀에 속삭이자 윤조는 화들짝 놀래며 창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우승진.
좀 예쁘장하다는 여학생들이 더 돋보이고자 교복을 리폼한다던지, 살짝 파마를 한다던지, 티 나지 않게 립글로스를 바른다던지 하는 짓을 전혀 하지 않고도 자체만으로 예쁜 여학생이다. 윤조와 고1 때부터 붙어 다니는 단짝. 윤조만큼은 아니라도 공부도 꽤 잘하는 데다 모범생이고 근면 성실해 선생이고 학생이고 다들 좋아하는 바람직한 여학생.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비해 그녀의 친구는 딱 하나, 윤조뿐이다.
“무슨 소리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속을 들켜 심술이 난 윤조가 부은 어조로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승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댔다.
“너한테 조금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는 다 알 텐데... 쟤네는 눈치도 없나 봐. 너... 내가 볼 때 그다지 친절하고 상냥한 편 아닌데 나서서 주번 일을 너무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죽하면 반 애들이 너를 만년 주번이라고 부르겠니. 심지어 3반 연숙이는 네가 담임한테 찍혀서 주번 종신형 받은 줄 알더라야.”
“칫... 그 입 꼭 다물고 있어라.”
윤조는 단짝 승진에게 까지 숨기고 싶지 않아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오석수.
이름도 세지만 인상도 굉장히 센 2학년 1반 남학생. 꽤 큰 빵집 아들인데 작년에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집이 몰락한 후 비뚤어졌다. 분명 꽤 모범생이고 성적이 되어 이 학교에 진학했을 테지만 심란한 가정사로 빗나간 대표적인 후천적 문제아. 187센티의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별로 안 씻을 것 같은데도 광이 나는 피부, 교복을 입어도 루이비통 수트를 걸친 것 같아 보이는 확실히 남다른 미남이지만 성적은 전교 끝에서 1,2등을 다투는 데다 늘 각종 교내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전교에서 제일 늦게 등교하는 통에 하루 일과를 다른 사람 명상할 사이 운동장 쓰레기를 줍는 일로 시작하는 한심한 인사라 생긴 것에 비해 여학생들에게 인기는 없었다. 말도 험하게 하고 태도도 껄렁껄렁한 데다 여자를 심히 무시하는 인격을 갖고 있어 사실 ‘공공의 적’에 가까운 인간.
“원래 인간은 반대끼리 끌린다더만... 어떻게 저런 놈을 좋아하냐?”
승진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 기쁜 나머지 과장해서 웃어대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윤조는 대답 대신 알듯 말듯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사실 석수가 윤조의 마음으로 들어온 것은 그가 비뚤어지기 전의 일이었다.
1년 전 그날 밤.
그날 밤 사건은 또 한 번 윤조의 짧은 인생에 트라우마를 남겼다. 말했듯 윤조는 5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여러 대회에서 수상을 하며 피아노 학원에서 지극히 아끼는 특별대상이 되었다. 독보적이던 이한주가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이후부터는 윤조마저 놓칠 수 없는 원장의 배려로 레슨비도 반만 내며 다닐 수 있게 된 덕에 대충 초등학교 시절 정서함양에나 도움이 되라고 피아노 학원을 보내던 윤조의 아빠는 탐탁지 않지만 두고 보는 중이었다. 사실 윤조의 실력이란 아주 탑에는 들 수가 없지만 분명 보통 입시생들 보다는 나은 실력이었고 그녀의 꿈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피아니스트였다. 유명해지고, 해외 공연을 다니고 많은 팬을 거느리고 인정을 받고... 이런 것들을 그녀가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윤조는 그저 어린 시절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 집에 가면 묵묵히 자기를 기다려 주던 피아노가 좋았고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간이 피아노를 치는 그 혼자만의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고 사는 그 삶은 참 멋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 항상 옅은 미소를 띠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꼬마는 점점 커가면서 피아노 앞에 엎드려 우는 날이 많아졌다.
“대체 언제쯤 저 피아노는 관두게 할 거요? 쟤가 공부를 못 하는 게 아니라고. 공부에 시간을 더 쏟으면 서울대를 쉽게 갈 애가 답도 없는 피아노를 저렇게 붙들고 있으니... 엄마란 사람이 애를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지... 원.. 답답해서...”
중2 때부터 윤조는 아빠의 저런 불평을 수시로 들어야만 했다. 딸이 얼마나 피아노를 좋아하는지 아는 엄마는 중간에서 늘 쩔쩔매곤 했었다. 사실 한주가 피아노 학원에서 사라졌을 때 희한하게도 윤조는 왠지 모를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갔을 때 손님이 와 있었다.
피아노 학원의 입시 담당 조 선생이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로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윤조가 거실로 들어서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네, 그럼 아버님 그리 알고 원장 선생님께 전할게요. 아쉽습니다.”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있어 윤조는 채 거실에 다 들어서지도 않은 채 멈춰 서서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선생은 잠깐 윤조 앞에 서서 뭔가를 감추느라 일그러진 표정으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윤조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네가 꼬마일 때부터 봐 왔는데... 이제 이 귀여운 아이를 내가 직접 가르쳐보나 했는데... 가끔 놀러 오렴. 피아노는... 다른 직업을 갖고도 취미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힘든 길로 못 들어서게 하는 건 부모의 본능 같은 걸지도 몰라... “
등 뒤로 조용히 현관문이 열리고 선생의 하이힐 소리가 사라져 가는 걸 듣고 있다 윤조는 가방을 다시 주워 들고 방으로 향하려 했다.
“ 잠깐 와서 앉아봐라.”
성적표가 나올 때 빼곤 별로 말을 걸지 않는 아빠가 불렀다.
“학원에서 진로를 어찌할 거냐고 묻더구나. 취미로 피아노 학원을 계속 다니는 고등학생은 없으니까... 그래서 아빠가 물어봤어. 네 실력이면 적어도 이 나라 최고 대학 피아노과 진학이 가능한 거냐고. 그랬더니 조 선생이 솔직히 말하더구나. 일류대는 가능하지만 최고 대학은 힘들 거라고. 네가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이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 100퍼센트 소화가 안 된다고... “
“... 모짜르트는 단연 최고라고 했잖아요. 모짜르트를 주로 입시곡으로 하는 일류대는 당연히 된다고... 게다가 이대 같은 경우는 성적을 더 비중 있게 보니까 쉬울 거라고...”
엄마가 소심하게 거들어보지만 역효과다.
“시끄러! 그딴 국내 여대 피아노과 나와 뭐 하게? 저 선생처럼 입시학원 하게? 공부가 되는 애잖아! 이 사람아. 몇 번을 말해. 공부만 열심히 해도 모자란 세상이야. 이제 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 당연히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알아들어? 예술 쪽은 타고나게 천재가 아닌 이상 가지 말아야 해. 얘 보다 훨씬 잘하던 이한주. 걔도 예전에 관두고 공부만 한다며? 고등학교 연합고사에서 그 녀석이 1등으로 들어갔더군. 내일 사람을 불러 피아노를 내가라고 할 생각이야.
하윤조. 아빠가 말했지? 1등은 한 가지 생각, 2등은 두 가지 생각, 꼴등은 백 가지 생각을 하는 거라고... 그리 알고 이제 씻고 공부해라.”
윤조는 담담하게 무표정하게 아빠의 사설을 다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윤조의 방은 문을 열자마자 한켠에 피아노가, 다른 편엔 잘 정리 정돈된 책상이 놓여있다. 언제나 방에 들어서면 문을 닫고 피아노를 먼저 열었지만 윤조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피아노에 등을 진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걱정이 된 엄마가 간식거리를 들고 방문을 조용히 노크하자 윤조는 대답 대신 영어 참고서와 필통을 찬찬히 책상에 펼쳐놓으며 공부 준비를 했다.
“어쩌면 잘 되었을지도 몰라. 너도 힘들었잖니. 피아노에 공부에... 피아노는 다음에 다시 하자. 지금은 공부만 하는 걸로... 어차피 아빠 때문에 관두게 될 거란 걸 우리도 알았잖아....”
엄마는 애써 울음을 참는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괜찮은 집안의 둘째 딸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전문직을 가진 엄마가 그저 여자란 이유로 늘 아빠의 말에 따르고 눈치를 보는 것을 윤조는 이해할 수 없었다.
“… 피아노는... 나중에 다시 하고 그런 거 없어... 하루 연습 안 하면 이틀 쳐지는 게 악기야... 그리고 난 공부할 땐 즐겁지 않지만 피아노는 밥 안 먹고 이박 삼일도 두드릴 수 있어. 내가 꼭 세상이 다 인정해 주는 피아니스트가 될 실력 이어야지만 피아노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내가 좋다는데 그냥 시켜주면 안 돼?? 난 조 선생님이나 원장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피아노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단 말이야. 사실 나 학원에서 선생님이 바쁠 땐 애들한테 가르쳐주기도 하는데 어떤 애들은 내가 선생님보다 더 잘 가르친다 했단 말이야... 엄마가 아빠한테 한 번만 강하게 말해 주면 안 돼?”
“… 휴... 네 아빠 알면서 그러니... 아빠가 아주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잖니. 공부 열심히 하면 의대 갈 수 있는데, 피아노 잘 치는 여자 의사도 괜찮지 않니?”
윤조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엄마에게도 입을 닫아 버렸다. 차가운 얼굴로 시선을 책상 쪽으로 떨구는 딸 옆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엄마는 간식 쟁반을 조심스럽게 한 켠에 놓고 돌아섰다.
“… 엄마... 그냥... 이혼하면 안 돼?”
엄마는 놀랜 듯 잠깐 멈추어 침묵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날 밤 윤조는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