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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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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3. 2024

02. 초록잎이 떨어졌다

(3)

그다음 날... 

1학년은 야간 자율 학습이 강제가 아니라서 정규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1학년 교실은 몇몇 공붓벌레 빼고는 모두 하교해 텅텅 비어 있게 마련이었다. 보통 윤조는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정시에 하교해 피아노 학원을 들렀다 집에 가곤 했었다. 집에 돌아갈 애들이 다 빠지고 남아서 더 공부를 할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 먹거나 매점으로 요기를 하러 간 사이 윤조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칠판을 응시하고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야, 너 오늘 피아노 가는 날 아냐? 좀 늦게 가는 날인가? 배고프지? 나 아까 엄마가 저녁에 먹으라고 김밥 싼 거 가져다주고 갔는데... 같이 먹자.”


평소와 달리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않던 윤조가 신경 쓰이던 승진은 수업이 다 끝났는데도 꼼짝 않고 있던 윤조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아.. 맞다. 나 사실 가야 하는데... 미안. 내일 보자!”


그제사 윤조는 얼른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급히 교실을 빠져나가는 윤조를 승진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러려니 하고 두었다.


교실은 나섰지만 여전히 윤조는 학교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나왔던 윤조는 아무도 찾지 않는 별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교 대표 핸드볼 팀이 쓰던 연습장이지만 팀이 해체된 이후 다용도로 사용되는 곳이다. 주로 합창부나 합주부의 연습실로 사용되지만 행사가 없는 시기엔 연습이 매일 있는 것이 아니라서 비어 있는 적이 많았다.


청소를 해도 먼지가 쉽게 앉는 까만 그랜드 피아노에는 싸락눈 같은 먼지가 고운 밀가루를 흩뿌린 양 앉아 있었다.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먼지를 닦아내며 윤조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3월에 장대호가 피아노 제2 반주 제의했을 때 한다고 할 걸... 그랬음 이렇게 피아노를 갑자기 뺏기게 되어도 계속 칠 수는 있었을 텐데...’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고 윤조는 자세를 고쳐 피아노 앞에 앉았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손 끝으로 튀어나오는 곡조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어젯밤 이후 어떤 생각이라도 하기 시작하면 울어버릴까 봐 일부러 머리를 비우고 있던 윤조는 연주 중반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시야가 흐려지고 손가락에 힘이 빠질 때까지 열심히 치던 윤조는 클라이맥스에서 중단해 버렸다.


“아 진짜! 씨발! 뭣 같애 정말... 아니 낳고 기르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냐? 진짜 죽어 버리고 싶어....”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윤조는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씨발. 씨발 씨발!!! 다 재수 없어! 엄마도 아빠도 다 재수 없어!”


분이 풀릴 때까지 쌍욕을 허공에 대고 해대던 윤조는 피아노 건반 위로 엎드려 버렸다.


“욕도 진짜 더럽게도 못하네. 야! 너 아는 욕이 씨발 밖에 없냐? 씨발을 세 번이나 외칠 거면 좀 더 응용해서 다양성을 추구해 볼 만도 하지 않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패악을 떨던 윤조는 깜짝 놀라 엉망이 된 얼굴을 홱 들었다.


“예를 들면 한 번은 씨발, 한 번은 씨부랄, 한 번은 짧지만 임팩트 있게 썅!! 어때?... 야. 그리고 얼굴을 닦던지 아니면 다시 엎드리던지.. 못 봐주겠네.”


한 번도 얘기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대충 이 학교 학생이면 다 아는 남학생이 어느새 옆에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마침 지는 중인 해가 쏘는 마지막 강력한 빛을 등지고 선 아이는 물감으로 엉망인 손을 피아노에 대고 서서는 놀리듯 빙글거리고 있었다.


“좀 꺼져 줄래? 지금 기분이 정말 뭣 같거든?”


“야, 너... 하윤조지?... 피아노 관두래냐? 너네 꼰대가?”


“....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라고...”


“흠... 기분이 뭣 같은 건 이해하는데, 나도 딱히 갈 데가 없어서 말야... 암말 안 할 테니 욕하고 싶으면 더 하고 피아노도 더 치려면 치고... 난 꺼질게. 저 쪽으로…”


석수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윤조는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 너네 꼰대... 엄청 못 살았는데 혼자 잘나서 그런대로 성공한 스타일이지?”


석수는 윤조가 말을 걸자 기다렸단 듯 잽싸게 발걸음을 돌렸다. 묻는 말엔 대답 없이 이상한 질문을 하는 석수를 윤조는 그제사 가만히 바라보았다. 건들거리는 녀석은 겉멋이 잔뜩 든 모양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뭐 대단히 성공한 것도 아니야. 그냥 먹고 살 정도... 그런데 집에서는 왕이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 몰라 상상도 하기 싫어. 정말 피곤하고 짜증 나는 스타일이거든...”


윤조는 쌍욕을 쏟아내던 때와는 자못 다르게 시무룩한 어조로 뇌까렸다.


“너 일화 여중 나왔지? 이한주랑 같은 피아노 학원 다녔고... 맞지?”


“... 그 자식이랑 같은 중학교 나왔냐?”


“오호.. 둘이 몇 년을 죽어라 같은 학원 다니길래 뭔 사이인가 했더니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모양이지?”


“... 그런 게 있어. 그 자식이 내 얘기했냐?”


“아니... 둘이 피아노 학원 앞에 같이 있는걸 몇 번 봤지. 뭐 서로 말은 없이 내외하면서 각자 버스를 기다리는 거였지만... 난 그 근처 화실을 다녔거든. 가끔 한주 녀석이랑 버스정류장에서 아는 척을 하기도 했는데... 넌 항상 홱 돌아서 있더라. 꽤나 꾸준히 피아노 학원을 다니길래 당연히 예고를 갈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이 학교에서 보다니 말야.”


“... 그럼 넌 미대 진학할 예정이니?”


“아니.. 그럴 거면 나도 지금쯤 화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겠지.... 야. 난 이제 가봐야겠다. 너도 대강하고 집에 가라. 진짜 자살하거나 가출하거나 뭐 이럴 배짱 아니면...”


일방적으로 떠들던 녀석은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는데 갑자기 가봐야겠다며 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 가까이 간 석수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근데 보니까...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더라. 좋아하진 않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부가 싫은 건 아니잖냐? 그럼 뭐 하늘의 별을 따느라 힘들게 사느니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대접도 받고... 결국 공부랑 피아노 중 네가 공부만 하도록 내몰린 건 네가 멍청해서야. 아예 공부를 손 놔 버렸으면 너네 아빠가 그나마 피아노로라도 대학 갈 수 있게 하려고 기를 썼을걸. 근데 너 스스로도 꽤나 욕심이 있으니 공부도 놓지를 못한 거 아냐? 문제는 뭐냐면.. 나 같은 새끼들이지. 공부도 뭐 그닥인데...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닌 어떤 일에 의해 그나마 유일하게 좀 잘하고, 하고 싶었던 걸 관두게 되는 거.. 그게 진짜 뭣 같은 거지. 알아?”


그게 같은 학교를 다니는 윤조와 석수가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석수가 먼저 나가고 난 후 윤조는 여전히 피아노 의자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향했다. 알고 있었듯 윤조의 방에 있던 피아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창백한 얼굴로 귀가한 딸에게 엄마도 아빠도 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두려웠다. 그들이 그저 딸이 십 수년을 아끼던 피아노를 없앤 죄책감에 침묵했는지 아니면 자식이라는 이유로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짓는데 관여한 큰 죄를 지은 것에 괴로워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별관에서 석수를 본 다음 날, 윤조는 괜히 석수네 반 앞을 얼쩡거렸지만 아이들이 떠드는 걸 듣고 석수가 결석했음을 알았다. 그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석수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후 드디어 석수가 학교에 왔을 때 아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석수의 분위기에 수군댔었다. 확실히 석수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고 점점 학교에서 소문이 안 좋은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전교에서 제일 늦게 등교를 하고 수시로 수업 중 사라져 사흘이 멀다 하고 근신과 유기정학 단골이 되어 갔다.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외모를 갖고 있어 1학년 때는 꽤나 많은 여학생들에게 대시를 받았지만 모욕에 가까운 거절을 당한 선행자들의 경험담이 퍼지면서 석수는 인기남에서 기피남 1호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윤조는 그날 이후 이상하게 석수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마주치면 석수가 먼저 말을 걸어올 거라 기대했었지만 이상하게 석수는 윤조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곤 했었다. 남녀공학이라도 남자반과 여자반이 갈린 학교 내에서 따로 친분이 있거나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자연스럽게 시시덕거리는 장면은 드물었다. 성적에 혈안이 된 선생들은 남녀가 붙어 지내면 성적은 당연히 하락하는 것으로 알고 쓸데없이 얘기가 길어지는 남녀 학생에겐 주의를 주는 선생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학교에서 흔한 질병은 ‘짝사랑’과 ‘상사병’이다. 아이들은 감옥 같은 학교생활에 그나마 낙을 ‘님’으로 삼게 되는 것이었다. 


“야, 하윤조. 너도 볼 님이 있어서 아침마다 창문에 붙는 거냐?”


옆자리의 정수가 아침부터 도시락을 먹었는지 역한 소세지 냄새를 입에서 풍기며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 난 뭐 외계인이냐? 나도 님이 있지.”


“오옷. 진짜? 누구? 완벽이? 한수헌?? 그럴 줄 알았지.”


“누가 걔래? 마음대로 떠들었다간 입을 소세지로 만들어줄 줄 알아.”


1교시가 끝나고 방금 수업했던 내용을 대충 복습하는 중에 까칠하게 대답하는 윤조의 기색에 놀랜 정수가 눈치를 보다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오늘 저번 달 월례고사 성적 나오잖아. 공통이라 다른 학교 애들 성적이랑 같이 나올 텐데... 그놈의 몇 퍼센트 이런 것 좀 안 쓰면 안 되나...  내일 도시락에 아주 김치 풍년 나겠어. 아.. 괴로워!!”


괴롭기는 성적이 바닥을 기는 정수나 좀 한다는 윤조나 마찬가지다. 부모의 기대치가 다를 뿐... 가끔 윤조는 시내에서 크게 고깃집을 하는 정수네에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상상했다. 고졸이 한인 정수네 부모님은 정수가 어느 대학이든 원서만 낼 수 있는 성적이라면 정수가 하루에 꽃등심 10인분을 먹어대도 기뻐하실 테니까…


“ 다른 반은 성적표 나눠줬대? “


“응... 우리 담임은 그래도 밥은 속 편하게 먹게 해 주니 다행이지. 대체 저녁 시간 전에 성적표 나눠주는 선생들은 뭐래니? 밥을 먹으란 거야, 말란 거야?... 그나저나 하 윤조. 너 잘하면 네가 이번에 우리 학교 1등 일 수도 있어. 아까 보니까 수헌이 완전 열받은 얼굴로 교무실로 상담하러 가는 거 봤어. “




“... 야! 하윤조 좋겠다! 너 이번에 1등이래. 난 오늘 선생한테도 쪼이고 집에 가면 또 한바탕 난리 나겠어. 뭐 한 번쯤 양보도 해야 하지만 말야.”


수돗가에서 양치를 하고 있는 둘 옆을 수헌이 지나가다 발견하고는 윤조에게 이죽거리는 소리였다. 


“그래.. 삼가 명복을 빌어줄게. 난 오늘 좀 편하게 자려고. “


윤조 역시 지지 않고 빈정거리자 수헌은 분하단 듯 윤조를 쳐다보다 자리를 떠났다.


“우와 진짠가 봐. 오.. 하윤조! 드디어 해내나요? 오늘은 집에 가서 너네 아빠한테 큰소리 좀 쳐.”




“.... 승진아... 있지.. 나 가끔 생각하는데 내가 만약에 공부에 손을 놔 버리면 우리 집 꼰대가 피아노라도 해서 대학가라고 하지 않을까?”


“멍청한 년... 말이 되냐? 이미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어느 부모가 그걸 냅두냐? 그럴 작정이면 넌 이미 초등학교 때 글을 멀리 했어야 된다. 까막눈이 되었어야지.”


윤조는 승진의 너스레가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학교란 곳에서 그나마 사생활이 보장되는 계층은 공부를 어중간하게 하는 집단이다. 아주 바닥을 기거나 아주 잘하는 층은 항상 선생에 의해 성적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기 때문이다.


“하윤조! 난 네가 참 자랑스럽다. 이렇게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를 해 주니 선생님이 어찌 아니 든든하겠냐”


한문 선생인 담임은 전교 1등이 반에서 나와 한껏 들뜬 모양 이미 소주를 여러 잔 걸친 얼굴로 야간 자율학습 시작 전에 성적표 한 묶음을 들고 나타났다. 기계적인 아이들의 박수 속에 윤조가 먼저 성적표를 받았다. 


“이번에도 반 2등은 수연이지만 수연인 이번 전교 등수랑 집단등수가 좀 떨어졌더라. 힘드니?”


같은 여중 출신인 수연이는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인데 내내 윤조 다음이었다. 말이 거의 없고 어두운 분위기의 수연이에 대해 아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수연이는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셋이 살았는데 수연이네 엄마는 학교 근처 시장에서 분식집을 했다. 방과 후 아이들은 가끔 수연이가 엄마의 분식집에서 일을 도우는 걸 보곤 했다. 


3등인 승진이 성적표를 받고 난 후 담임은 한껏 상냥하던 톤을 180도 바꾼다.


“다음은 내 수명을 단축시킴과 동시에 반 평균을 사정없이 깎아 먹는 것들을 공개 발표하겠어. 조미나! 염상미! 노지민! 이 셋!!! 너네도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 등수는 말 안 하겠지만 어쨌건 이 중 공동 꼴등이 둘이고 이 공동 꼴등이 전교 공동 꼴등 네 명 중 둘이란 거. 그리고 공동 꼴등 바로 앞에 한 놈도 뭐 그닥 많이 차이 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하윤조가 전교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 성적은 뒤에서 두 번째란 거!!!  내내 꼴등 자리를 확고히 지키고 있던 박정수! 너는 이번에 반 등수가 10등이나 올랐네. 뭐 컨닝한 게 아니면 너는 정말 잘했구나!!”


뒷자리에서 열심히 챕스틱을 발라대던 셋이 죽을 상을 하고 성적표를 쓰레기 받듯 받아와 털썩 앉자 자동으로 1번부터 순서대로 별로 달갑지 않은 성적표를 받기 시작했다. 어차피 성적표가 나눠진 후 20분 정도 남은 시간에 아이들이 공부가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담임이 그래도 형식적으로 ‘떠들지 말고 공부하라’며 나가자 기다렸단 듯 정수가 소리를 질러댔다.


“오 예!!! 내가 하윤조 옆에 앉으면 성적이 저절로 오를지 알았지롱!!! 다음 달도 내가  윤조 옆이다! 아무도 건들지 마!!!”


윤조네 반은 한 달에 한 번씩 앉는 자리를 바꾸곤 했는데 매달 첫 등교일 일찍 온 순서대로 앉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앉는 게 규칙이었다. 윤조의 옆자리 혹은 승진의 옆자리는 문제아는 아니지만 조금 둔재라 성적이 제자리걸음인 중간이나 마지막 성적 계층의 아이들이 꿈에 그리는 자리였다. 윤조와 승진은 단짝이긴 했지만 절대 짝으로 앉지는 않았다.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물으면 둘 다 약속이나 한 듯 ‘몰라’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윤조와 승진은 죽고 못 사는 친구라도 성적 앞에서 늘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승진은 저녁 먹은 것이 체했는지 불편하다며 담임에게 허락을 받아 두 번째 야간 자율은 빠진 채 먼저 귀가했다. 승진이 먼저 가버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 윤조는 아이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아까 풀다 막힌 수열 문제를 다시 펼쳤다. 


“너 지금 안 가? 1등도 전교 1등인데 얼른 집에 가서 대접받아야지!!”


정수가 다급히 가방을 싸서 나가려다 미동도 않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윤조에게 이상하단 듯 물었다.


“어차피 지금 나가도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비슷할걸? 그리고 나 피곤해서 서서 가기 싫어. 좀 기다렸다 갈래. 너 먼저 들어가. 너 내 덕에 이번 달 성적 많이 올랐으니까 내일 도시락 반찬 꽃등심 싸와 알았지?”


“여부가 있겠나이까 싸부! 내일 보자~ 진짜 고마워 윤조야”


억지로 큰 볼을 부비며 뽀뽀를 해대려는 정수를 겨우 떼내고 윤조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어 댔다.


“어허.. 나는 너 같이 띨띨한 것을 제자로 받은 적이 없건만...!!”


“아이... 왜 이래 갑자기... 내가 내일 한 상 차려줄게~ 내일 봐!!”


얼른 집에 가서 무용담을 펼쳐야 하는 바쁜 정수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잠시 보고 있는데 평소 전혀 말을 걸지 않는 수연이 윤조 옆을 지나가다 멈췄다.


“역시 1등은 다르네? 종 치고도 여전히 앉아 있다니... 하긴. 넌 공부만 하면 되지? 나도 더 앉아 있고 싶지만 난 너 같은 팔자가 아니라서.. 세상 참 불공평하지?”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사이 수연은 하고 싶은 말만 뱉어 놓고 사라진 후였다.


순간 울컥했지만 윤조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풀던 문제로 집중했다가 볼펜을 소리 내 던져 버렸다.


“미친년... 일해야 되는 팔자인 게 내 잘못이야? 아 빈정 상해.”


“야야... 저런 건 미친년이 아니라 그냥 꼬인 년인 거지. 엇다가 팔자타령은 해야겠고 네가 미워 죽겠지 않겠니? 쟤는 분식집에서 일할 때도 손바닥에 단어장 포스트잇 붙여서 외워가며 하더라구. 독한 년.”


뒷자리의 미나가 화장을 하다 거들었다.


“야. 넌 이 야밤에 화장하고 어디 가냐? 집에 안 가냐?”


“응. 난 꼴등이라서 할 일이 엄청 많아. 너 내가 시간도 남아돌고 할 일도 공부밖에 없는데 꼴등 할 정도로 머리가 밥통인 줄 알았냐? 이 언니는 세상을 먼저 배우러 이만 가신다.”


어느새 교복 치마도 사복으로 갈아입은 미나가 이상한 패션모델 걸음으로 사라지자 드디어 교실에는 윤조 하나만 남았다. 


분명 창문이 다 닫혀 있는데 갑자기 찬 바람이 휙 불어오는 느낌이 나 윤조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교실 조명이 깜빡거리다가 다시 정상적으로 켜졌다. 비가 와서 전기 배선에 문제가 생겼나? 그럼 찬바람은? 갑자기 교실에 혼자 남은 것이 오싹하게 느껴져 윤조도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인적이 이미 끊긴 학교 진입로에는 차가운 비가 사납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한주를 본 듯했다... 아니 본 것이 확실했다.


그냥 불러볼 것을 그랬나...

버스 정류장에서 한주를 본 것이 아침이 되어서도 생생해 윤조는 찝찝한 기분으로 등교를 했다. 어젯밤 한주를 본 지점에 이르자 윤조는 왠지 움직일 수가 없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젯밤 일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려 하고 있었다.

<그림 : Nanette di Crollala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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