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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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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6. 2024

02. 초록잎이 떨어졌다

(4)

“야, 전교 1등! 피아노는 완전 잊었나 보지? 공부 진짜 잘하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던 건지 지각대장 석수가 어슬렁 거리며 학교를 향해 올라가다 말고 윤조에게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 응?”


“야 근데 난 공부엔 관심 없지만 어제 어떤 미친놈이 버스 안에서 지가 이번 지역 시험 1등이라고 떠들던데 그게 성봉고 이한주가 아니라 동국고 이재진이더라구. 이한주가 1등이 아닌 적도 있더라? 뭐... 너도 더 노력해 봐. 그 자리가 누가 맡아 놓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난 그럼 오늘도 풀 뽑으러 간다... “


누가 들으면 덩치도 머슴만 한 것이 그야말로 학교 직원이지 학생으로는 안 보이게 쐐기를 박는다.


그제야 한참 늦었단 것을 깨달은 윤조는 교문을 향했다.


“넌 어디가 아팠나 보구나? 웬일로 지각이니...”


사회에선 재산이 명성이고 학교에선 성적이 계급이다. 전교 1등이 지각을 하면 아무리 무서운 학주도 상냥하게 아이의 건강부터 걱정하게 마련인 것이다.


“선생님. 저도 지각했으니까 풀 뽑을게요.”


“야. 됐어. 넌 얼른 들어가. 저런 놈들은 지금 교실로 올려 보내면 공부하는 애들 방해만 하니까 여기 있는 게 모두를 위해 나아.”


스스로 벌칙을 받겠다는데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의 학생들이란 집에서는 부모라는 간수가 학교에선 선생이라는 지배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로봇일 뿐이다.


이미 명상 시간이 지난 후 교실을 들어섰다. 웬일로 늦었냐고 호기심을 드러내는 참새들을 기대했지만 오늘은 더 큰 먹잇감이 있는 모양 아이들은 한 곳에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좀처럼 공공의 수다에 참여하지 않는 수연이 마저 끼어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인지…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윤조가 등교를 한 줄도 모르고 있는 승진에게 다가가 어깨에 살짝 손을 대자 승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몇은 우느라 정신이 없다. 


“무슨 일 났어?”


“야... 진짜.. 웬일이니... 정말 인생 허무해. 너 잘 아는 애 있잖아. 성봉고 이한주... 걔 어젯밤에.... 자… 살… 했… 대...”


뭐???

한주가… 자살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모르고 있었는데 꼭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 설명하기 힘든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이 더 오싹하게 느껴져 윤조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유리알처럼 비어버린 눈에 가득 들어오는 갑자기 낯설어 보이는 아이들의 우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며...


몇몇이 대성통곡을 하자 다른 아이들도 흐느끼고 있다. 삽시간에 명일고 2학년 4반은 이웃학교 한 남학생의 자살 소식에 울음바다가 되고 있었다. 윤조는 여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비단 윤조네 반뿐 아니었다. 다른 반도 소란하고 어수선하기란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잘한다 하여 지도자인 것은 아니지만 전국 몇 등을 오르내리던 공부 천재가 다른 이유도 아닌 ‘성적비관’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은 또래 아이들을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저렇게 서럽게 우는 것일까?


윤조는 아예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분명 한주를 한 번 보지도 못한 아이들, 혹은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저 아이들은 무엇을 그리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일까? 펴 보지도 못한 봉오리가 떨어진 것이 안타까울까? 그 아이와 별 다를 바 없는 자기 신세가 갑자기 서글퍼져 우는 것일까?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던 남학생이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 슬픈 것일까? 것도 아님 초상집에 모인 사람들이 울음에 전염되듯 그저 그런 현상인 것일까… 그리고.... 녀석을 꽤 오랫동안 매일 보았던 나는... 왜.... 울지 않고 있을까...


윤조는 여전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두 ‘자살’, ‘죽음’... 같은 무시무시하고 천 미터 낭떠러지에 빽빽이 붙은 눅눅한 이끼처럼 소름 끼치는 단어에 더럭 겁에 질려 끝도 없이 울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아까부터 내내 울부짖는 ‘대체 왜!’ 란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아... 그랬구나...

내가 어젯밤 번개 속에서 본 얼굴은 한주가 맞았구나... 뇌의 주름이 일시적으로 다 펴지기라도 한 모양 윤조는 끝도 없이 어젯밤 보았던 한주의 파리한 얼굴만 떠올릴 뿐이었다. 


“이제 좀 그만하고 공부 좀 하자!! 그렇게 세상 끝난 것처럼 굴 거면 다들 조퇴하던지, 그 집 앞에 찾아가 추도식을 하던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끝도 없네!”


누군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성질을 냈다. 조수연이라는 것을 굳이 목소리가 난 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못돼 처먹은 년! 사람이 죽었다잖냐! 것도 우리랑 같은 나이의 꽃 같은 남자애가... 것도 자살로!!!  울어 줄 수 있잖아. 그 애가 불쌍해서... 또 우리가 불쌍해서... 어차피 잊혀질 것이 또 불쌍해서... 


너 꿈이 의사랬냐? 너 같은 정신적인 애자가 누구를 고친다고 깝치냐 지금. 징그러운 년...”


여간해선 나서지 않는 승진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그만큼 갖고도 못 견뎌서 스스로 목이나 매는 패배자가 뭐가 불쌍하다는 건데? 어차피 우리 학교 애도 아니고 너네가 찌질하게 울어봤자 걔는 너네 알지도 못해!”


“이런 망할 년...”


울컥한 미나가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정작 수연의 앞에는 윤조가 어느새 귀신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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