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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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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03. 2024

02. 초록잎이 떨어졌다

(6)

오전 수업이 끝나갔다.

어떤 선생은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 한주의 죽음을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했고 어떤 선생은 선생이라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뭐라도 말해야겠는지 ‘자살은 비겁한 것이며 나약한 인간들이 택하는 한심한 도피’라고 괜히 흥분했다. 아직 20대 중반인 여선생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설명하다 말고 갑자기 울어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윤조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죽은 아이가 이한주가 아니었다면... 혹시 그냥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그저 그런 눈에 띄지 않는 한 아이가 자살했어도 이랬을까 하는… 무엇보다 윤조는 이 이상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왠지 울고 싶지만 울고 싶지 않기도 하고 슬프면서도 부럽고 죽음이 꼭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과 갑자기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한주가 보고 싶다’는 엉뚱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속이 울렁대는 것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어지러웠다.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아침에 대성통곡을 하던 아이들 중 대부분이 허겁지겁 도시락 통을 꺼내 책상 위에 차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저들이 점심까지 굶어 가며 애도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윤조는 죽은 자보다 더 간사한 살아 있는 자들 사이에 오늘만큼은 끼어 있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 가니? 우리 먼저 먹을까?”


아침만 해도 3일간 단식으로 애도를 표하겠다던 정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모양 종이 친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잽싸게 책상 위에 수라상을 차리고 있었다. 대꾸 없이 교실문을 나서던 윤조는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있는 승진을 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의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곧 군인만큼 밥을 빨리 먹는 남학생들이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축구나 농구를 하느라 북적거리기 전에 어디로든 가야만 했다. 교문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마침 식사를 하러 야구배트를 휘두르며 교문을 나서는 학생주임을 발견하고 황급히 발걸음을 수돗가 쪽으로 돌렸다. 학생주임은 매의 눈을 번뜩이며 잠시 윤조 쪽을 쏘아보았지만 이내 2학년 전교 1등 하 윤조인 것을 확인하자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윤조는 결국 수돗가 뒤쪽의 별관 앞에 섰다. 천천히 다가가 낡은 쇠빗장을 여니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양 지극히 괴로운 소리가 난다. 낮인데도 낡고 두꺼운 융단 커튼들이 짙게 드리워진 별관 안은 휑하고 어두웠다. 커튼과 커튼 사이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비치는 내부는 빼곡한 먼지로 시야가 뿌예질 지경이었다. 피아노는 그새 또 먼지를 덮고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윤조는 반대편에 다 터진 매트들이 쌓인 곳에 가서 아무렇지 않게 털썩 주저앉았다. 낡은 마룻바닥은 아프다며 엄살을 잔뜩 머금은 소리를 낸다. 별관은 핸드볼부가 떠난 이후 부서진 의자들이나 낡은 비품들, 폐지된 미술부가 쓰던 이젤이나 물감 따위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별관에 쥐가 드나드는 것을 본 아이들이 늘면서 선생이 심부름을 시킨 경우를 제외하고 자발적으로 별관에 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윤조는 피아노를 관둔 날 이후 가끔 저녁을 굶고 별관에 와서 한 시간씩 피아노를 두들기다 가곤 했다. 별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석수는 그날 이후 한 번도 윤조가 있는 동안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하윤조! 팬티 보여. 좀 제대로 앉아.”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게 앉아 있던 윤조는 그제사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들었다. 한수헌이 침울한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윤조는 수헌의 얼굴을 확인한 후 다시 무표정하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어차피 둘 밖에 없으니까 내가 안 보이는 쪽으로 가지 뭐.”


수헌은 중얼거리듯 나지막이 말하고는 윤조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초등학교 때 말야. 나도 너랑 한주 녀석이랑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었는데... 알았어?”


윤조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둘이 워낙 잘해서 너희만 매일 진도가 나갔었잖아. 비교하기 좋아하는 우리 엄마한테 피아노 학원만 다녀오면 잔소리를 들어야 했었지. 한주는 4살부터 다녔으니 엄마가 부러 비교를 하진 않았지만 같은 날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너와는 항상 비교를 당해야 했어. 우리 부모는 자기들이 굉장히 다재다능하다고 생각해서 자식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 안 하거든. 하여튼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관두기 전까지 엄청 짜증 났지.”


윤조는 여전히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그런데... 난 걔가 왜 그랬을지 궁금하지 않다? 왜인지 알 것 같거든. 그리고 불쌍하거나 슬프지도 않아. 차라리 홀가분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런데 아직도 궁금하긴 해.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외로워서 그랬다’고 한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그럼 걔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런 거였다면 내가 너무 나쁘잖아. 그렇지 않아?”


초등학교 때는 같은 반 친구로 꽤 잘 어울리고 서로의 집도 드나들던 사이였다가 사춘기로 접어들고 마주치면 처음 보는 사람보다 더 어색하게 서로를 대하는 아이들도 많다. 사실 윤조와 수헌도 초등학교 때는 제법 자주 어울리던 편이었다. 두 아이는 컴컴한 별관 안에 앉아 다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마 이유가 필요했을걸. 어제 갑자기 놓아 버린 게 아닐걸... 그냥 기다렸겠지... 놓을 수 있는 작은 이유 하나를...”


수헌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윤조는 사실 아침부터 내내 멍했지만 한 가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과연 한주는 지금 편안할까?’


“그런데 넌 왜 그렇게 한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거니?”


“... 우산 때문에.”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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