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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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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11. 2024

03. 800번 버스 뒷자리

(1)

그날 이후 한동안 아이들은 여전히 성봉고 이한주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야야, 점쟁이. 점쟁이. 원래 자살하거나 살인당했거나 이런 한 많이 진 사람들은 죽어서 귀신 되는 거 맞지? 그치? 그러면 원래 원한 있었던 사람한테 가서 붙는 거 아냐? 근데 소문에 걔네 부모가 워낙 싸이코라 애가 그리 된 거라던데 귀신이라도 부모한테는 차마 어떻게 안 하겠지?”


이 반의 모든 학생들이 적어도 꼴등은 안 하도록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꼴찌 클럽 3인방이 아침부터 귀신얘기에 열을 올리다 점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숙이를 찾았다.


최성숙이라는 본명을 가진 이 반 1번은 키가 유난히 작고 말랐으며 눈이 많이 나빠 돋보기안경을 쓰고 다녔다. 성숙이의 외할머니도, 엄마도 무당이라 이 아이의 별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점쟁이’였다. 약간 특이해서 혼자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거나 노트에 알 수 없는 것들을 낙서하느라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에는 딱히 사고를 치지도 말썽을 부리지도 않는 평범한 여학생이다. 성숙이의 엄마가 작두를 타는 이북식 정통 무당이라는 소문이 나고부터 누군가가 퍼뜨린 ‘무당 대물림설’이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성숙이를 약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야.. 쟤 무서워. 이상한 거 묻지 마.”


미나가 걸걸한 목소리로 성숙이를 찾자 지민이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아 좀, 가만있어봐 봐. 쟤가 진짜 신기가 있으면 쟤가 전교 1등이어야지. 쟤는 아무것도 아냐. 그래도 우리보다 귀신 이런 거에 대해서 주워들은 게 많을 거 아니냐. 안 궁금하냐?”


“입 닫고 수업 준비해라. 며칠 전에 내가 우리 동네에서 본 거 확 선생한테 불기 전에...”


윤조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미나는 얼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며칠 전 윤조는 정신을 놓고 있다 내릴 버스 정류장을 놓쳐 집까지 한참을 걷는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유흥가에서 망사 스타킹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미나와 마주친 것이었다. 둘은 한참 눈을 맞추고 섰다가 당황한 미나가 가게 안으로 사라지고 윤조는 그다음 날 불안한 미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슬퍼서 죽은 혼은 원한이 있는 자에게 붙는 게 아니라 위로해 줄 만한 자에게 붙는 법이야..."


샤프보다 연필을 좋아하는 윤조가 늘 하던 버릇대로 머리를 비울 겸 조용히 연필심을 갈고 있는데 잔뜩 쉰 목소리로 누군가 섬뜩하게 뇌까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성숙이 도수 높은 안경 너머 번뜩이는 눈으로 윤조를 노려보며 윤조의 책상을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 뭐?... 뭐라고 한 거니 지금...”


윤조는 소름이 끼쳐 약간 더듬으며 성숙에게 되물었다.


“으… 응?”


목 디스크가 있어 고개를 자유롭게 잘 돌리지 못하는 성숙이 부러 몸을 반쯤 윤조 쪽으로 돌렸다.


“왜? 나.. 난 지금... 쉬는.. 시간이라서... 화장실에.. 좀...”


성숙은 묻는 말에는 대답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가버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라니까... 저번 날에는 오후 체육시간 있는 걸 깜빡하고 내가 체육복을 안 갖고 와서 아침에 걱정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성숙이가 어차피 오늘 비 와서 자율학습으로 돌릴 텐데 왜 걱정하냐더라구. 그런데 그날 아침이 진짜 화창했단 말야.  그런데 정말로 오후에는 비가 쏟아졌고 걔 말처럼… 좀 섬뜩하지 않아?”


“야! 그거야 쟤 목에 디스크가 있대잖아. 그러면 비 오기 전에 좀 쑤시고 그러는 거겠지. 그래서 아는 거겠지. 난 귀신이 나한테 나타나면 시험문제 이런 거 좀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이상한 말을 남기고 나가버린 성숙의 뒤를 눈으로 좇는 윤조에게 호들갑을 떨며 일화를 얘기하는 정수를 겨우 막은 건 승진이었다. 윤조는 다시 깎던 연필에 집중했지만 연필심마저 부러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윤조는 샤프를 꺼내 놓고 수업 준비를 했다.


4교시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음악수업 시간이었다. 교육부 지침에 의하면 일주일에 두 번이어야 하지만 이 학교에선 암묵적으로 한 시간으로 줄인 지 오래였다. 음악 따위... 노래 잘해서 대학 가는 애들은 극소수니까... 또 그 극소수도 학교 음악시간에 기대는 건 전혀 아니니까... 그나마 수업시간에 다 같이 소리를 내는 의미 깊은 시간인데 그 자유시간 한 시간이 말살되었어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음악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일찍 자리하고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성적 거꾸로 순이다.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도 대부분 다른 수업시간과는 부류가 다르다. 이도 저도 아닌 예외라고 한다면 하윤조 정도였다. 음악실에 꽤 빨리 도착한 윤조는 자리에 금방 앉지 않고 책을 든 채 잠깐 기다렸다. 그러다 성숙이 들어와서 끄트머리 창가 쪽에 자리를 잡자 얼른 그 옆자리에 앉았다. 막상 앉긴 했지만 같은 반이 된 후 전달 사항 외의 사적인 얘기를 나눠 본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딱히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흠. 신기하네.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데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성숙은 음악실에서 매일 끝자리에 승진, 정수 등과 나란히 앉던 윤조가 자기 옆에 앉자 곁눈으로 흘끗 훑어본 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때였다. 음악시간을 달가워하지 않는 수연이 아예 대놓고 수학 문제집을 들고 음악실을 들어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음악 선생이 대호 일행과 함께 나타난 것은...


“다들 우리 학교 지휘자 장대호 잘 알지? 수업 시작 전 한 5분만 대호가 빌려달라고 하는구나.”


예술가의 혼을 이해해 주는 건지, 아니면 성적이 되니까 특별대우를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장발인 곱슬머리를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면서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운 눈을 번뜩이며 교탁 앞에 선 대호가 말없이 아이들을 둘러보다 윤조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알다시피 우리 학교 오케스트라는 꽤 전통이 깊고 웬만한 예고보다 실력이 낫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나는 곧 이 학교를 졸업하겠지만 끝까지 잘 물려주고 나가는 것이 내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들 오케스트라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아직 부모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니 특별활동이 꺼려지는 부모에 의해 이미 확정되었던 포지션이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일이 발생했으므로 차기 피아노와 제2 바이올린을 새로 뽑을까 한다. 일단 11월엔 수능으로 전후 몇 달간 공식행사가 없으니 오는 10월 한 달 동안 지원자를 받은 후 수능이 끝난 다음 실력으로 평가해서 확정한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정규 수업 마친 다음 2시간씩 연습하고 학교 행사 및 단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음대를 지원하는 자들에겐 큰 경력이 될 만큼 괜찮은 오케스트라다. 다들 알겠지만...


음대를 지원할 생각이 없는 자에겐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험기간에는 연습이 취소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오케스트라 하느라 성적 떨어졌다는 헛소리 할 인간은 아예 지원 사양이다. 숭인고처럼 배워가면서 하는 아마추어 아니고 이미 되어 있는 인간끼리 맞춰보는 수준이니까 기본 없는 사람은 아예 지원하지 않았으면 하고... 적어도 예고 염두에 두고 몇 년 다룬 인간들… 대놓고 말하겠지만 이 반에서는 하윤조만 지원하면 된다. 우리가 지금 2학년에서 원하는 지원자들이 다들 자원한다면 최종은 오디션으로 가린다. 이상. 오래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지원자가 그다지 많진 않을 것 같으니 지원자는 개인적으로 3학년 8반 나 장대호를 찾아오면 된다. “


다들 장대호가 어지간히 허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알고도 그를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허세건 아니건 그는 타고난 카리스마가 있었다. 대호가 내내 눈을 이상하리 만치 번뜩이며 오로지 윤조만 바라보고 공지를 말하는 사이 아이들 대부분은 해당사항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실제 수업시간보다 더 정숙했다. 


‘분명히 저런 간단한 공지도 따로 써서 달달 외웠을 거야...’


윤조는 쉬지 않고 일사천리로 공지를 전달하는 대호의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지를 마치고 쓸데도 없었던 다이어리를 잘 간추려 챙기는 대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는 윤조를 옆자리의 성숙이 팔꿈치로 툭툭 쳤다. 윤조가 돌아보자 성숙은 연습장을 말없이 내밀었다.


‘장군 줄기 자손인데, 욕심이 장난 아닌 사내야. 처 자식 굶겨 죽일 일은 없겠지만 처복이 없어 두 번 장가갈 거야.’


‘뭐... 이런.....’


당황한 윤조가 연습장에 쓰여 있는 낙서를 무심코 보고 화들짝 놀라 성숙을 바라보자 성숙은 서늘한 웃음을 웃어 보이고는 얼른 고개를 다시 창 밖으로 돌려 버렸다.


사실 음악 시간 내내 윤조는 부러 성숙의 옆자리에 앉은 것을 후회했다. 귀신이니 이런 것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한 번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맞겠으나 반 아이들이 늘 ‘이상하다’고 말했던 성숙에 대한 평판이 거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윤조는 3층의 대호네 교실을 찾았다. 한 달에 두 번씩 배치고사를 보는 고3 교실들은 방금 시험을 끝내고 소란스러웠다. 대부분 우울한 얼굴을 한 고3들이 복도를 바쁘게 걷는 사이를 헤치고 윤조는 교실 뒷문에 서서 대호를 찾았다. 


“야 너 2학년 전교 1등 아냐? 네가 고3 교실에 웬일이냐? “


대호네 반 부반장이 마침 지나가다 윤조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피아노 지원.. 하려고요...”


“음대 갈 거냐? 그거 아니면 뭐 하러 그런… 어쨌건 대호는 저기 있어. “


대호의 반 부반장 성준은 윤조를 이상하다는 듯 아래위로 훑어보다 대호가 있는 쪽을 마지못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배치고사 직후 답을 맞혀보느라 분주한 고3 남학생들 틈을 헤치고 겨우 안 쪽에 있는 대호 쪽으로 가니 낯익은 얼굴이 이미 상기된 빛을 띠고 대호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 좀 희한하네... 왜 2학년에서 전교 1,2 등하는 애들이 다 오케스트라에 지원하는 거지? 것도 둘 다 음대는 생각도 없는 것들이... ”


먼저 지원서를 내러 온 수헌과 얘기 중이던 대호가 부러 돌아보지 않고도 윤조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아까 반을 돌 때까지는 하윤조를 마음에 두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2학년에 안정민을 까먹고 있었더라구. 걔는 진짜 음대 가려고 기를 쓰는 앤데 말야. 미리 말해둘게. 지원자가 여러 명이면 아무래도 진심으로 음대를 지원하는 학생에게 조금은 마음이 치우친다는 거... 뭐 그래도 대외적인 행사가 꽤 있으니 실력이 확실한 지원자가 있다면 또 다른 얘기... 어쨌건 원래 내가 마음속에 내정한 피아노는 하윤조였는데 말이지.. 흠.. 흠..”


대호는 꽤나 침착한 듯 그리고 냉정한 듯 말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본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횡설수설을 하고 있었다. 찝찝한 지원서를 내고 3층을 같이 내려오며 윤조는 수헌에게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너 어차피... 의대를 지원할 예정이잖아. 꼭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를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아?”


“마찬가지 아닐까? 네가 꼭 저 피아노를 쳐야 하는 이유.... 내가 지원한 이유... 같은 거 아니니?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 아니니?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오렌지 쥬스를 먹을 건지, 사과 쥬스를 먹을 건지... 오늘 팬티는 뭘 입을 건지.... 그 정도 아니었니? 하고 싶은 걸 꼭 가장 잘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니? 뭐 어차피 너도 관심 있다는 걸 알았으니 난 희박한 희망을 붙잡는 셈이지만 말야.”


수헌은 요전 날 별관에서 만났던 초등학생 수헌은 아니었다. 화가 나 있었고 반갑지 않은 경쟁자로 나타난 윤조를 힐난하고 있었다.


“... 그냥 좀 자주 피아노를 치고 싶어. 그뿐이야. 아빠가 피아노를 없앴거든. 1등은 한 가지 생각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뛰어나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잖아.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거... 너도 같은 생각이라면 우리는 착하게 경쟁하는 거지. 굳이 서로 탓할 필요는 없잖아...”


윤조는 수헌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수헌은 분명히 윤조도 지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피아노를 열정적으로 대한다 하여 모두가 모짜르트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늘 경쟁자는 내가 아는 누군가 이다. 가까스로 그를 넘어섰을 때 우리 모두는 그런 사소한 경쟁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음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절실하게 그 경쟁을 대한다. 왜냐면... 언제나 우리만의 리그는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우리에게 확실한 희로애락을 주기 때문이다. 


“ … 언젠가... 네 방 창문 밑에서 3시간을 서 있은 적이 있어. 너는 밤 11시까지 피아노를 쳤고, 그 이후 30분간 나는 창문 근처에 네가 공부하고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너의 창문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어.


난... 고1 때부터 새벽 2시 전에 침대로 가 본 적이 없어. 아.. 딱 한 번 굉장히 독감으로 고생을 했을 때를 제외하곤 말야... “


그날 이후 윤조는 알고 있었다. 윤조가 끝없이 한주를 동경함과 동시에 증오했듯, 수헌도 사실 그녀에게 그랬다는 것을... 


‘그러니... 나도 어리석게 한주를 미워할 필요가 없었단 거야...’ 


윤조는 여전히 한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디션 보는 걸로 해. 어쩌면 안정민이 뽑힐지도 모를 일이잖아. 걔는 우리보다 더 목숨 걸고 있을 테니... 게다가 안소혜 사촌이잖아. 난... 알다시피 우리 아빠가 내 친구를 없애버리셔서... 아마 별관에서 자주 연습할 것 같아. 겹치지 않으면 좋겠어.”


윤조는 잔뜩 화가 나서 노려보는 수헌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 돌아선 채로 중얼거린 후 교실을 향했다.




‘별관은 가지 마. 특히 피아노 근처에는...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수헌도 오케스트라 피아노 자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꽤나 신경이 쓰여 잔뜩 찌푸린 윤조가 막 야간 자율학습 전 저녁식사 시간이 시작된 교실을 들어서는 찰나 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던 성숙이 대뜸 연습장을 들이밀었다.


놀라서 불쾌해진 윤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성숙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불편한 목을 손으로 받쳐 들고 자리를 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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