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 근데 지원한 거 너네 아빠가 알게 되면 어떡해? 저번처럼 종아리에 한참 스트라이프 새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냐?”
입맛이 없어 저녁 도시락을 올려두기만 하고 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윤조에게 승진이 말을 걸어왔다.
“ 근데 그거 정말이야? 대호, 까칠해 보여도 좋아한다 고백하는 여학생 다 받아주는 거? 그거 진짜야?”
전생에 펠리칸이었는지 음식 저장이 가능한 정수가 입에 한가득 음식을 넣고도 유창하게 윤조에게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아까 보니까 책상에 편지랑 초콜렛 따위가 한가득이더라. 다 받아주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 받는 거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긴 했어.”
윤조는 승진의 아픈 질문은 애써 무시하고 쓰잘데기 없는 정수의 질문에 부러 공을 들여 대답을 하고 있었다.
“저번에 축제 때 말야, 연합 합주 때 지휘하는 모습 보고 정말... 인간이 그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 했잖냐. 나 대호 오빠한테 편지 써 봐야겠어. 분명히 깊은 사람이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진 않을 거야. 그치? “
꽃등심에 마늘과 풋고추까지 골고루 갖춘 큰 쌈을 한 입 입에 가득 문 정수가 들떠서 떠들어대자
“아직도 남자의 여자에 대한 호감도는 여자의 몸무게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모르는 머저리가 다 있네? “
라고 미나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이죽댔다. 그런데 윤조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은 참 순식간에 잊혀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만 해도 정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버스에서 본 한주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고 30분째 같은 수학 문제를 되풀이해서 풀고 또 틀리고 하고 있다는 것을 윤조는 깨달았다. 아까부터 계속 성숙에게 시선이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동안 그녀가 준 이상한 일련의 메세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의미 없어진 지 오래된 수학 문제를 그만두고 윤조는 일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성숙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를 하지도 않는 편인 성숙은 자주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운동장을 응시하고 있곤 했다. 미나는 종종 그런 성숙을 가리켜 ‘딱히 공부도 하고 싶지 않은데 잠도 오지 않는 저주받은 개체’라고 놀리곤 했다.
한참을 그렇게 성숙의 옆통수만 노려보던 윤조는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숙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야간 자율 학습 첫 교시는 그렇듯 조용했고 간혹 식곤증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윤조는 그런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성숙의 연습장에 조용히 쓰기 시작했다.
‘오늘 나한테 했던 말들... 그거 무슨 뜻이야?’
윤조가 쪽지를 다 쓸 때까지 성숙은 코 앞에 있는 윤조를 까마득히 모르는 듯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윤조는 하는 수 없이 성숙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자 성숙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건 너였어!! 네가 먼저 그랬어. 네가 나한테 마음을 걸었다고... 네가 그 아이한테 그랬듯이... 네가 나한테도 그랬다고!!! “
뭐라고? 내가 뭘... 어쨌다고???
윤조는 갑작스런 성숙의 소란에 놀래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미친년. 또 지랄하네. 쟤는 진짜 정상이 아니라니까. 필히 정신감정 요망이야. 대체 일반 인문계에 어떻게 저런 신들린 애가 같이 있을 수가 있는 거야?”
뒷자리에서 숙면 중이던 상미가 잠을 깨 잔뜩 부은 목소리로 걸지게 험한 소리를 하자 한참 공부 중이던 아이들이 킥킥대기 시작했다. 성숙은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윤조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돌려버렸고 윤조는 성숙의 옆에 우물쭈물 서 있다 그대로 교실 밖을 향했다.
성숙이 뱉은 알 수 없는 말을 되뇌며 복도를 걷던 윤조는 자꾸 그 비 오던 밤 한주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설마 우산 따위로 나한테 원한이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떠올리고도 유치한 생각에 혼자 머쓱한 웃음을 흘리던 윤조는 어느새 별관 앞에 또 다다라 있는 것을 깨달았다. 녹슬어 열 때마다 요란한 철문을 열고 안을 들어서자마자 벽 쪽에 있는 콘센트를 찾아 겨우 하나 남은 전등에 불을 밝혔다. 커튼이 두꺼워 불을 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1학년 때부터 수시로 들락거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윤조는 ‘별관엔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성숙의 말 때문에 부러 별관을 찾은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아이의 말이 그냥 미친 소리라고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윤조를 잡아끌고 있었다.
별관은 물건이 많은데도 꽤나 썰렁하고 추웠다.
피아노에는 어느새 수북하게 먼지가 앉아 있었고, 이번에는 부러 닦지 않고 조용히 뚜껑을 열었다. 몇 곡만 쳐보고 다시 자율학습에 들어갈 참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한참 타고 있던 윤조는 꽤 잘 아는 곡이었는데 곡 중반에 갑자기 까맣게 기억이 사라져 손을 멈추었다. 다시 떠올려 보려 했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혼자 당황하기 시작할 때였다. 왼손 전개가 막혀 속으로 계이름들을 세고 있을 그때였다...
“걱정 마. 네가 갑자기 바보가 되었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말야.”
윤조는 들어설 때부터 좀 더 음침해진 별관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지만 뿌리도 없는 이상한 고집으로 이곳을 들어섰던 참이었기에 더욱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한수헌. 내가 아까 말했지. 별관 피아노는 내가 좀 쓰겠다고...”
목소리가 수헌의 그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윤조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 한수헌.... 한수헌이라... 걔는 아까 보니까 열심히 조동사 공부 중이시더만... “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는 실체는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대꾸를 해 왔다.
“.... 그럼... 너... 석수니?... 넌... 일찍 학교에서 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 오! 석! 수!! 하윤조가 그런 녀석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네가 좋아하길래 내가 좀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해...”
느릿느릿 알 수 없는 목소리는 일일이 대꾸를 했다. 별관에 올 만한 인간이라곤 윤조가 아는 한 석수 아니면 수헌 둘 중 하나였다. 학교에서 유명한 양아치 몇몇을 얼른 떠올려 보았다가 이내 윤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치들이 이 시간에 별 볼일 없는 창고 같은 별관에 숨어 있을 리가 없으니...
“너 누구야? 뭔데 불도 안 켜고 별관에서 혼자 뭐 하고 있었던 건데!!!”
급작스런 공포심이 엄습해 와 윤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너도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뭐 낀 놈이 성낸다고... 아무 데나 버럭 하는 건 그대로네...”
“얼른 기어 나오라고 이 새끼야!! 뭔데 숨어서 계속 깐죽대!!”
윤조는 이상하게 귀 익은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난 너를 잘 아는데... 사실 최근에 더 잘 알게 되긴 했지만 말야... “
어둠 속에서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윤조는 점점 할 일 없는 남학생 중 하나가 필시 자기가 별관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와 놀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2반 성호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윤조는 소리가 나는 농구공 더미 뒤쪽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