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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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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20.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1)

윤조네 학교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외딴 언덕배기에 있었다. 학교 교문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은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을 제외하곤 늘 썰렁하게 비어 있다. 오히려 주말이면 근처 산에 등산을 오는 등산객들로 붐비지만 주중엔 하루 중 대부분이 텅 텅 비어 있었다. 평소에도 부러 아이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하교를 하는 편인 윤조는 텅 빈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버스 라이트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윤조는 자주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옆도 보지 못하고 학창 시절이라는 자유도 자율도 없는 터널을 무작정 끝도 없이 달리고 있는 경주마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어쨌건 텅 빈 버스 정류장에 오도카니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을 윤조는 사랑했다. 아침부터 지금껏 내내 ‘누군가의 요구’를 줄곧 듣기만 해야 하는 고문을 겨우 잠시 쉬고 드디어 움츠린 자아에게 말을 걸어 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빠와는 대화를 해 보고자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사실 엄마와는 꽤나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윤조는 엄마에게도 입을 닫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에 잘 다녀왔니?”


“응! 엄마! 오늘도 받아쓰기 100점 받았어!”


“아이고... 잘했네!”


100점을 받으면 90점을 받을 때 보다 더 큰 성취감을 얻고 이런 것에 집착했던 나이가 아니었다. 100점을 받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기쁘던 때였다.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무심하게 책을 보고 있는 아빠를 쳐다보면 으레 그는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그까짓 받아쓰기.. 그거 100점 못 받는 애들도 있어? 받아쓰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글을 쓰는 연습도 해야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엄마! 나 이번에 창작글짓기 대회 우리 학교 대표로 뽑혔어!”


“어머 잘 됐구나!”


이번에도 아빠는 여전히 책을 보는 중에 한 마디를 했다.


“아직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요란 떨기는...”


이 날 이후 윤조는 어떤 것에도 딱히 기뻐하거나 딱히 슬퍼하거나 또는 실망하지 않게 되었다. 윤조의 엄마는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매일 하며 딸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딸이 어느 날부터 입을 닫은 것은 그저 사춘기의 흔한 증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잘 다녀왔니? 학교에선 어땠어? 오늘 저번 월례고사 성적 나왔다며? “


사실 그녀는 365일 같은 질문을 막 귀가한 딸에게 쏟아붓곤 했다. 


그렇다.


부모들은 본인들이 대답하기 싫은 질문들만 골라 던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하고 자식이 그저 어느 날부터 입을 닫는 못된 10대 병에 걸린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윤조는 윤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더 이상 누군가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윤조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곤 했다.


‘오늘도 피곤했지... 일단은 견뎌야 해. 기다리면 어른이 될 거니까. 어른이 되면 드디어 내 인생을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2등이면 어때. 꽤 잘했잖아. 난 네가 꽤 잘한다고 생각해.’


‘피아노 보고 싶지? 네가 얼마나 슬픈지 나는 잘 알고 있어. 이건 정말이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너 사실 이 한주가 그렇게 싫었던 건 아니었잖아. 그런데 네가 울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아. 이 거지 같은 현실에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 게 확실한지는 너도 모르니까...’


윤조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기분으로 서 있다. ‘자신에게 말을 걸 시간’은 잊은 지 오래고 그저 과연 버스가 38분에 오는지에만 집중해 있었다. 


“이렇게 늦게 가면 무섭지 않냐? 일찍 일찍 다녀라... 거 애들 다 가고 몇 분 더 공부하는 게 얼마나 크다고 기집애가 겁도 없이...”


누군가 인기척도 없이 어깨를 치자 윤조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희미한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는 건 석수였다.  분명 오늘 야간 자율 학습 시작하기 전에 몇몇과 함께 매점 뒤쪽 쪽문으로 사라지는 걸 봤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뭘 하다 나타난 건지 교복 자켓  곳곳에 흙먼지가 묻어 있고 얼굴은 사흘 밤은 새운 사람 마냥 피곤에 절어 있었다. 사실 마음에 두고 있는 석수와 단 둘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것도 신기한 일이었고 학교에서는 본체만체 지나가던 석수가 말을 걸어온 것도 두근거릴 일이었지만 여전히 윤조는 시계와 버스가 나타날 길을 번갈아 두리번거리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괜찮아. 곧 버스가 올 거야....”


“내가 지금 이 정류장에서 20분째 기다리고 있는데 끊긴 건 아닐 텐데 버스 그림자도 구경 못했거든? 그러잖아도 슬슬 산 밑으로 걸어내려 갈까 하던 중이었는데 같이 걸어가자.”


“아냐… 38분에... 800번 버스가 온댔어...”


윤조는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하고 여전히 시선은 길에 두었다.


“38분? 야... 지금 40분이야. 네 시계가 느린 거 아냐?”


“…. 아... 그러니?”


윤조는 한주와 자기와의 시간으로 ‘38분’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너... 누구 기다리니? 이 시간에?”


석수는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는 윤조가 어이없다는 듯이 투덜댔다.


윤조는 아예 37분부터는 시계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초침이 드디어 12를 지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800번 버스가 가쁜 입김을 뱉어내며 문을 열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것봐! 38분에 온댔잖아.”


알 수 없는 흥분에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른 윤조는 얼른 버스에 올랐다. 


“네 시계 느리다니까 그러네. 말귀 못 알아듣냐?”


석수는 정말로 윤조 말처럼 버스가 38분에 나타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볼멘소리를 하며 뒤를 따랐다.


“네 시계가 빠른 건지도 모르잖아. 주인이 학교에 있는 거 너무 지겨워하는 줄 잘 아는 충성스러운 시계가 조금이나마 빨리 가 보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지.”


“... 뭐냐 지금? 웃기려고 한 말이냐?”


둘은 별 것도 아닌 걸로 옥신각신 하며 버스 맨 끝자리까지 들어갔다.  사실 800번 버스는 윤조가 자주 타는 버스가 아니었다. 윤조는 800번 버스정류장이 바로 집 앞에 있는 것이 싫어 부러 58번 일반 버스를 타고 집에서 좀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800번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대 방향에서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윤조를 발견한 엄마가 여러 번 왜 일반 버스를 타고 오느냐고 물었지만 그럴 때마다 윤조는 ‘그냥 시간 아까워서 먼저 오는 버스 타고 오는거야’라고 답했다. 사실은 일부러 58번 버스를 타느라 800번 버스를 여러 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버스 맨 끝 자리에 다다르자 갑자기 승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침마다 800번 좌석버스 맨 끝자리에서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는 긴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한주...


잠깐 머뭇거리던 윤조는 안 쪽 창가 옆 한주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석수가 으레 옆자리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앗... 잠깐... 다른데 앉으면 안 될까? 누가 앉을 거라서...”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고 이내 윤조는 끝에 말은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너 오늘 굉장히 이상한 거 알고 있지?  오늘은 성적표를 받은 날은 아니었던 것 같고... 뭐 나야 상관없지만서도... 집에 무슨 일 있냐?”


석수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자리를 막는 윤조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윤조의 앞자리에 가서 털썩 몸을 앉히며 물었다.


“… 아냐.. 그런 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조는 일부러 고개를 창 밖으로 향하고 이상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뇌를 덮는 느낌이었다.


‘여기 있는 걸까?’


‘석수가 있어서 안 나타나는 건가... 아님 정말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헛것을 본 거라면... 어떻게 버스는 38분에 나타났을까...’


“ 나는 약속시간에 늦어본 적은 없는데... 몰랐니?”


바로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의식 중에 앞자리의 석수를 먼저 보았다. 석수는 창을 등지고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만화책을 꺼내다가 윤조의 시선이 느껴지자 흘끗 쳐다보았을 뿐 말소리를 들어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웬일이냐... 너 같은 좀비들은 버스 이런 거 탔을 때도 끊임없이 단어 외우고 수학 풀고 하는 거 아니었냐? “


석수는 여전히 멍해 보이는 윤조가 신경 쓰여 부러 돋친 소리를 했지만 윤조는 별 대꾸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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