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쟤는 내 목소리를 못 들어. 넌 정말 귀신에 대한 상식이 없구나? 누구나한테 보이거나 들리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말했잖아. ‘난 너에게 있는 거라고...’ “
옆자리의 한주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처음 봤을 때처럼 소름이 끼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자 녀석은 다시 느릿느릿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훨씬 나아졌네. 뭐 귀신에 대한 상식은 없지만 대처하는 식은 마음에 들어. 어쨌거나... 오랜만이다. 하윤조.”
‘근데... 내가 말하는 건 석수가 들을 수 있지 않아?’
“바보냐? 넌 아직 안 죽었으니까 네가 떠들면 앞에 앉은 저 까칠한 놈이 대번에 너 공부 너무 많이 해서 돌았다고 생각할걸?... 이미 알고 있잖아. 나와 얘기하는 법을... 그렇게 해. 넌 속으로 생각하면 돼. 난 속으로 생각하면 네가 들을 수 없으니까 인간 말로 떠들고 있는 거고…”
‘근데.... 왜 여기 있는 거니?’
“말했잖아. 너에게 있는 거라고... 여기가 아니라...”
‘그니까.. 왜.. 나한테...’
“네가 날 잡고 있어...”
‘난....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지금 꽤 혼란스러워.. 나 귀신 된 지 얼마 안 되었거든... 나도 알아나가야 해. 그냥 아직은 네가 날 잡고 있다는 거...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뭔가가 아직 있다는 거... 내가 아직 여길 뜰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거... 그 정도야...”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니?’
갑자기 비릿한 바다 소금 냄새가 확 풍겨 오는가 싶더니 막걸리 같은 목소리의 한 남자가 반대편 구석에서 고개를 들고 소리를 쳤다.
온 얼굴에 잡초 같은 털이 무성히 난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거무튀튀한 얼굴을 들어 윤조와 한주 쪽을 노려보다 다시 엎드렸다. 윤조는 놀랜 눈으로 앞자리의 석수를 쳐다보았지만 석수는 피식대며 손에 든 만화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 남자도 나 같은 신세인데... 좀 오래되었지. 그가 가끔 따라와 이것저것 말해주곤 하는데... 술에 취해 동사한 영이라서 늘 졸려해. 기분도 안 좋고...”
한주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윤조는 갑자기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나도 아니고 귀신이 둘씩이나 보이기 시작하다니... 무당 줄기는 성숙이가 아니고 본인인가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든다.
“하윤조. 네 시계 지금 몇 시야?”
석수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아.. 지금... 10시 50분이야.”
“야. 너 시계 보고 있다가 초침 12 가면 스탑 해. 그리고 1분 더 빨리 돌리고... 잠깐... 난 지금 내 시계 멈췄고, 1분 늦게 했다... 준비되면 말해 동시에 다시 눌러서 시계 가게 하는 거다...”
“…. 왜?”
갑자기 이상한 짓을 시키는 석수에게 윤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더럽게 외로운 거 같아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도 없는 거 같아서... 이렇게 초침 시계를 차고 다니면, 똑같은 분 까지는 맞더라도 초까지 맞는 경우는 없을 것 같은 거야. 이상하지 않냐? 같이 있는데 나는 10시 52분 23초를 지나고 있고, 너는 10시 50분 36초를 살고 있다면 말야... 우리끼리라도 맞추게...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렇게 하라면 좀 해!”
윤조는 이 와중에 석수의 말이 조금 기발해서 미소를 띠며 시키는 대로 시계의 시간 단추를 잡아당겼다.
“님이 시키니까 천하의 윤조가 말을 듣네... 좋구나... 사랑이란...”
‘뭐가 사랑이란 거야... 입 닥쳐’
“너 귀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고 까부는구나?”
‘너 잊었나 본데... 나 천주교 신자야. 세례도 받았다고... 성령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지랄하네... 어디서 드라큘라 책은 몇 개 봤나 보네... 용한 무당 불러다가 작두 굿 하기 전에는 안 떨어져 나가니까 그런 줄 알아라.”
‘죽어서도 입은 더럽네... 그건 그렇고... 그래서 너 이제 앞으로 계속 나랑 다니는 거야? 좀 귀찮은데...’
“뭐 널 쫓아다니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어진 신세라서... 봐야 할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되어야 할 뭐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주는 서늘하게 웃더니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 윤조가 시계에 집중하는 것을 구경했다.
“됐냐? 초침이 부러졌냐? 뭐 이리 오래 걸려?”
한주에게 대답하느라 한 바퀴를 놓쳤다고 말할 순 없어 윤조는 얼굴만 살짝 찡그려 보였다.
“됐다... 이제... 하윤조! 잘 들어! 넌 내 시간에 갇혔어... 그리고 나도 네 시간에 갇혔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있어!! 내일 보자!”
석수가 언제 보자란 식의 인사를 한 적은 없어 윤조는 의아하게 석수를 쳐다보았지만 내릴 정거장인지 가방을 챙기며 그는 일어서고 있었다.
“너.. 내가 내리고 두 정거장 후에 내리지? 데려다 주랴? 괜찮겠냐?”
“괜찮아. 우리 집.. 정류장 바로 앞이고 엄마가 아마 늦어서 나와계실 거야. 잘 가.”
“… 그래. 그럼.. 우리 내일 보자.”
석수는 그냥 한 말이 아닌 듯 내일 보자는 말을 한 번 더 남기고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다.
“너는 말야.. 그렇더라... 너... 피아노 관둬야 하는 거 알면서도 엄청나게 집착하더니... 또 결국엔 아플 인연을 멋대로 시작하고 있구나… 저 자식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시계 따위... 같은 시간에 가두는 짓... 답답하다 너네들...”
윤조는 죽어서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들로 깝죽대고 있는 한주를 노려보았지만 딱히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내려야 하는 정거장이다.
윤조는 일부러 옆 자리의 한주의 발을 밟고 섰다가 출구 쪽을 향했다.
“죽어서 좋은 점은 아프거나 졸리거나 배고프거나 하지 않다는 거야. 좀 편리한 거 같애.”
한주는 윤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키득거렸다.
“손도 더러운 거 아냐? 씻지도 않을 거 아냐. 어딜 건드려?”
“학생!! 무슨 일 있어?”
석수가 내리고 마음이 놓인 윤조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크게 말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버스 안을 살피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아저씨 저 이번에 내려요!”
윤조는 머쓱해져 부러 명랑하게 소리를 질렀다.
버스 안을 돌아보니 아까 화를 잔뜩 내었던 아저씨 귀신은 여전히 앞 등받이에 엎드려 잠에 빠져 있었다.
‘저 아저씨는 어딜 가는 거니?’
“귀신이 목적지가 어딨냐. 갈 데가 없으니까 맨날 죽은 자리 한 번 더 가보고, 신참 귀신이나 괴롭히고, 기 약한 고딩들이나 놀래키고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지.”
‘지옥이나 천당이나 이런 데 가야 하는 거 아냐? 왜 여기서 이래?’
“해결 안 된 것들이 있는 귀신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더라구... 빚은 죽어서도... 그래도 있어. 차차 알게 돼.. 그리고 나도.. 아직은 다 몰라.”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한주는 절망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