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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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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27.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4)

‘죽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군.’


“미안한데... 내가 들으려고 안 해도 다 들려. 그리고 그 말은 맞는 말이야. 죽었다고 좋은 건 아냐....”


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엄마가 어두운 버스 정류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니? 안 와서 걱정했네...”


“응... 풀던 문제까지 하고 오느라...”


“그랬구나.. 얼른 들어가자.”


잔소리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알아서 할 일을 다 하는 딸을 믿는 엄마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을 서는 엄마의 뒤를 따라가며 윤조는 얼른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주는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대체 갈 곳은 있는 걸까...’



윤조가 교실을 들어서려 할 때 교실 문 앞에 서서 수연과 수헌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맙다, 난 어제 너네 가게에서 이거 흘린 줄도 몰랐는데 말야...”


“뭐.. 별 것도 아닌데... 누구 건지 몰라서 열어봤었는데 너 정말 꼼꼼하게 정리 잘하는 거 같더라...”


수연이 답지 않게 볼까지 빨개져서 수헌에게 상냥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던 윤조는 씁쓸하게 웃었다. 중학교 때부터 여러번 같은 반을 했지만, 수연이 항상 윤조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조는 수연과 한 번도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본 적도, 그래 보고 싶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수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수연은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늘 어둡고 독이 뻗어 있는 상처 받은 고양이 같은 모습이 아니라 4월의 햇볕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 좀 지나가자... 다른 데 가서 얘기하던가... “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윤조는 유치하게 둘 사이를 일부러 지나가며 말을 건넸다.


“아.. 미안...”


둘은 동시에 뒤로 물러서며 사과를 한다. 


“아.. 하 윤조. 너 이거 볼래? 이거 내 학원 교잰데... 꽤 괜찮거든. 난 다 봐서... 너 혹시 관심 있으면 빌려줄게.”


요전 날 수헌은 오케스트라 문제로 꽤나 윤조에게 날이 서 있었었다. 그게 미안했던 모양인지 수헌은 선뜻 공을 들여 키노트로 만든 학원 교재를 빌려주겠다며 윤조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래도 돼?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수헌의 학원은 수학 쪽이 좋기로 유명했다. 윤조는 이과 반인데도 수학 성적이 가장 아쉬웠는데, 윤조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 이외에 왜 따로 사설 교육이 필요한지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의여서 윤조는 학원 한 번 다녀본 적이 없었다.


“난… 저.. 노트가.. 너에게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어...”


윤조가 노트를 낚아채서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수연이 뒤에서 작지만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중요한데, 난 일단 다 봤기 때문에 당장은 필요 없거든. 하 윤조는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니까... 경쟁자이긴 해도 우린 친구기도 하거든.”


수헌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수연에게 말하고 있었다.


“윤조가 다 보고 나면 너도 빌려줄게. 어쨌건 찾아다 줘서 고맙다. 그럼 난 이만...”


수헌이 자기 반으로 돌아가자 수연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한동안 깨끗한 빈 책상을 그냥 쳐다보고 있던 수연은 윤조 쪽을 노려 보았다. 윤조는 방금 받은 수헌의 노트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있는 허세는 다 부리고 다니지... 막 굉장히 쿨해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놈.”


익숙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한주가 승진의 자리에 앉아 윤조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아 있었다. 승진은 아직 학교에 오지 않은 모양 오늘 승진과 함께 주번인 선영이 승진을 아까부터 찾고 있었다.


“야... 넌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는 거 아니었냐?”


놀래서 말하는 순간 뒷자리 미나가 가방을 소리 나게 놓으며 쏘아붙였다.


“야 1등! 꼴등은 낮에는 뭐 어디 처박혀 있는 게 아니거든? 꼴등도 졸업은 해야잖냐... 그래서 밤에도 돌아다니고 낮에도 학교 오느라 내가 아주 피곤해 죽겠다.”


“아.. 너한테 한 말 아냐...”


윤조는 얼른 미나에게 얼버무린 후 한주를 째려보았다.


“내가 어제부터 말하는데... 넌 참 귀신에 대한 상식이 없어. 귀신은 그냥 언제 어디든 갈 수 있고 나타날 수 있어. 귀신도 얼마나 계급과 계층이 다양한지 몰라. 그렇게 일정시간에만 나타나는 귀신들은 대부분 지박령이라구. 어디 붙어 있어야 하는 것들... 난 그건 아니고... 뭐 어쨌건. 너 쟤랑 사이 드럽게 안 좋지? 그래서 노트도 그닥 관심 없는데 그냥 받은거지? 한 수헌 가지고 저 여자애 속 뒤집으려고? 그런데 정작 한 수헌은 또 다른 인간에게 마음이 있고.. 가만보니까 어른들은 우리가 딱 공부 생각만 하고 사는줄 알지만 다들 바빠... 그치? 결국 1등이나 꼴등이나 이성 생각하고 마음 설레고 다 비슷한데... 아무도 말 안 하지만 사실 이 머리 차이거든. 멀티가 되느냐, 안 되느냐.. 뭐 이런 차이...”


한주는 여전히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쳐 보였다.


‘야... 공부해야하니까 속 시끄럽게 하지 말고 좀 꺼져라.’


“흠.. 난 할일이 없어서 말야... 


야... 너 왜... 너네 반에 저런 애 있다고 말 안했냐?”


여전히 까불던 한주는 갑자기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한 곳을 응시하며 무섭게 속삭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한주가 보는 쪽을 보니 성숙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대고 서서 야릇한 미소를 띄고 한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성숙을 발견한 윤조도 섬뜩한 기분이 들어 순간 얼어 붙었지만 이내 ‘어찌된게 옆에 붙어 앉은 귀신보다 살아 있는 쟤가 더 무섭지...’ 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윤조가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한주는 성숙이 영 불편한지 사라지고 없었다. 


점심 시간에 대호가 잠깐 찾아와 3학년 수능 마친 다음 주 토요일에 어차피 축제기간 시작이니까 그 때 오픈 오디션으로 진행할거라고 짤막하게 전달사항을 남기고 갔다. 윤조는 수헌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호에게 일정 얘기를 듣자 괜히 초조해졌다. 미치지 않고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잘 졸업하기 위해 윤조에겐 그 피아노 자리가 꼭 필요했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느라 이를 10분째 닦고 있던 윤조는 문득 수헌까지 꼭 그 자리를 갖겠다고 하는 것이 분하고 짜증이 났다. 이제 두 달도 안 남았다…


“하던대로 공부나 미친 듯 할 것이지 왜 피아노는 한다고 난리야 난리가...퉷!”


혼자 낮게 중얼거리다 양치물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나도 그랬겠지만... 참 인간들은 못됐어. 그치? 나는 되고 남은 안 되고... 그 녀석도 너처럼 숨 좀 쉬고 싶은거잖아. 그게 이해가 안 간다 하면 안되지. 걔네 부모가 너네 부모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 않을걸. 대대로 판사집안에 형 둘이 다 서울 법대 수석으로 들어갔는데 걔가 안 미치고 그렇게 멀쩡한척 학교를 다니는게 더 용하다. 난. 차라리 네가 그냥 깔끔하게 양보하라고 말...”


한주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화가 잔뜩 난 윤조가 컵에 물을 담아 냅다 뿌려대고 있었기 때문에...


“하 윤조! 뭐하는거야!! 허공에다가 물을 뿌려대고...”


마침 화장실을 들어서던 수연이 물을 맞고 소리를 질렀다.


“재수도 지지리도 없네. 어떻게 딱 그때 맞춰서 들어오냐? 네 잘못이지.”


윤조는 밉살스럽게 이죽거리고 세면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귀신이 물로 쫓아지냐? 왕소금으로 뒤집어 씌워도 한 몇 분 안 간다구. 그거라도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고...”


돌아보지 않아도 성숙임을 알 수 있었다. 성숙은 귀찮은지 윤조쪽으로 몸도 돌리지 않고 잠시 멈춰 선 채 말을 건넸다. 


“학교에서 김치 담냐? 왕소금을 왜 가지고 다니냐? 이상한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네.”


윤조는 여전히 성숙이 서늘하고 기분 나빴지만 애써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를 했다.


5교시는 체육 시간이었다. 윤조네 학교의 체육복은 유래 없이 촌스럽기로 유명한 정체불명의 환한 하늘색이었다. 꾸밀 수 있는 것이 한정된 여고생들은 교복과 체육복에 민감하게 마련이다. 교실 문을 걸어 잠그고 커텐을 치고 마지못해 체육복을 갈아 입는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투덜대기 시작했다.


“ 아니 이런 색을 실수로 뺀게 아니라 작정하고 뽑았다는게 더 신기하지 않냐? “


“ 그러니까... 이거 입고 잘생기고 예쁘기란 군복보다 더 어렵다고 봐!”


“ 대호가 이 체육복 입고 멀리 서 있으면 푸른 곰팡이 낀 멸치같이 보인다니까 하하.”


“ 야! 엇다대고 우리 대호오빠를 씹고 지랄이야. 넌 그거 입으면 중국 냉채에 떠 있는 오리알 같애!”


“ 야야!! 너네 그만 떠들고 수업 시작 전에 운동장 나가 있는게 좋을걸. 오늘 체육 기분 안 좋대! 오전시간 걸린 반 다 단체 기합 받았다더라. 체육 다음이 국어인데 뻗어 있음 국어선생까지 난리날거야. 우리 잘 좀 하자.”


반장치고 카리스마가 떨어지는 은주가 아이들을 보채고 있었다. 잘 나가는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의 반장이란 절대 감투가 아닌 법이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다들 꺼리는 ‘반장’이란 직책은 결국 반 등수 5-10등 사이를 맴도는 성적에 착실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이 맡게 마련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면 선생의 살아 있는 파발마, 아이들의 우유부단한 해결사, 만년주번, 선생을 위한 자율학습시간의 내부고발자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존중받기는 힘들다. 윤조네 2학년 4반 반장인 은주는 어떤 타입이냐면 늘 아이들과 선생 사이에서 노심초사 혼자만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단체심을 강조하는 체육 선생은 단 한 명이 늦어도 반 전체를 기합주기로 유명했다. 


아직도 거울만 들여다보고 한숨을 내뿜고 있는 미나앞에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은주를 보고 하는 수 없이 윤조는 일어섰다.


“야. 너 체육복 안 갖고 왔냐? 옆반에 가서 얼른 안 빌리고 뭐해!”


윤조에게 약점을 잡힌 것이 있는 미나는 은주의 말에는 꿈쩍도 않다가 윤조가 닥달하자 슬그머니 리폼을 잔뜩 한 본인의 체육복 바지를 꺼냈다.


“미친거야? 이거 입고 나갔다가는 줄줄이 빠따야. 빨리 옆반 튀어가서 빌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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