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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 뒤늦게 허겁지겁 체육복을 빌리러 나가고 나머지는 모두 투덜대며 운동장을 향했다. 학교가 입시 위주가 된 지 오래... 그나마 해를 볼 수 있는 체육시간도 달가와 하는 아이들은 잘 없었다. 다들 그 시간 한 시간을 더 한다고 해서 성적이 엄청 오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지만 한 시간을 이리 저리 뛰고 들어오면 다음 시간부터 졸리고 야간 자율 학습시간엔 뻗게 되니까 싫어했다. 평선생은 다 비슷하다지만 결국은 선생의 위엄도 맡은 과목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수학선생이 가지는 카리스마를 덩치 두 배인 체육 선생은 죽어도 가질 수 없는 것... 학교라는 세계의 룰이다. 흥분하면 말을 심하게 더듬는 버릇이 있는 체육 선생은 자격지심의 발로인지 아이들이 조금만 늦어도, 체육복을 깜빡해도 심하다 싶을 만큼 엄하게 다스리곤 했다. 숨쉬는 것 만큼 쉽게 기합을 주는 인간이라 4반 반장 은주는 미리 종 치기 3분 전에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역시나 종이 치지도 않았는데 덩치가 산만한 체육교사 황 선생이 저 멀리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쓸데 없이 호루라기를 불어 제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늘 시뻘겋고 솥뚜껑만한 손에는 항상 야구배트가 쥐여져 있다. 저걸로 진짜 누굴 패는걸 본 적은 드물지만 아이들이 체육선생을 뒤에서 ‘황빠따’라고 부를 만큼 그의 분신이다.
“ 한 놈 비는데?? ..... 걔 어디갔어. 날라리.”
역시나 조 미나가 빠졌다. 잘 하면 기합을 받게 생긴 것을 알자 몇 몇은 김 빠지는 한숨소리를 내고 수연은 대놓고 땅을 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윤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학교 건물 쪽을 바라보다가 동관쪽에서 미나가 그제사 상의 지퍼를 채우며 허겁지겁 뛰어 오는 것을 보았다.
“ 선생님. 아직 수업 종 안 쳤습니다만...”
부반장인 승진이 조심스럽게 기합을 받기 전 조금이라도 선생을 이성적으로 돌려 놓으려고 시도 했다.
“야 임마! 체육 시간은 항시 경건하게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시간이다. 거 3분 일찍 열 좀 맞추고 수업시간을 맞이하는 태도... 그게 그리 어렵냐!! 오늘 수업 들어오는 반 하나 같이 다 건방져!”
체육시간은 수양의 시간이요, 운동은 심신을 단련한다는데 어찌하여 그 수양의 한복판에서 늘 생활하는 이 선생은 성질이 이리 널뛰는지 모를일이라고 윤조는 생각했다.
“ 저 선생은 굉장히 마초거든. “
어느 새 한주가 윤조 바로 앞에 서서 빙글거리고 있었다.
‘헉... 넌 백주대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거였어? 뭔 귀신이 이래??’
“여전히 귀신에 대한 상식이 많이 부족해. 하기야... 이 세계도 꽤 복잡하더군. 계급도 있고 이 세계도 빡세. 어쨌건 내게 금종인 건 장소이지 시간이 아니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그나저나 기합은 죽어도 받기 싫은 하 윤조가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지 한 번 보도록 하지.”
한주는 높게 솟은 어깨를 부러 더 으쓱해 보이더니 팔짱을 끼고 윤조와 함께 달려오고 있는 미나를 바라 보았다.
“저런 영혼은 좀 이해가 안 가지. 저건 그냥 어디서 부터 꼬였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으로 엉킨 인생이거든. 잘 하는 것도 딱히 없고, 매우 예쁜 것도 아니고, 학교는 지겹고... 쟤가 술집을 나가는 것도 부모가 뭘 딱히 잘 못해서 애가 그리 된 것도 아냐. 태어날 때 부터 그런 종인거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쟤는 지금 학교가 지긋지긋하고 감옥같다 하지만 쟤한테는 앞으로 세상 전체가 감옥 같이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속은 착한 애야. 창창한 애 한테 악담 퍼붓지 말고 입다물어. ‘
“너랑 달라도 너무 다르니 재밌다고 생각하는거지 너도 쟤를 이해하는 건 아니잖아.”
‘....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니?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있겠니?’
본인은 이제 상관없는 인간사라고 아무렇게나 말을 뱉는 한주가 미워 윤조는 그를 노려보았다.
“다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네가 관심을 둘 땐 이해도 해야 하는거 아냐?”
‘...넌... 네가 내 우산을 망친 심오한 이유를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는거니 지금? 너부터 그 우산이 얼마나 나한테 소중했는지를 이해해야지 그럼...’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숨을 헐떡거리며 미나가 황선생 앞에 도착해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 꼴을 보니 체육복을 깜빡해서 어디서 급하게 빌려 오는 것 같군. 넌 아침에 학교 오기 전 오늘 수업이 뭐뭐 들었나 시간표도 체크 안 해 보냐? 이런 정신 상태가 썩은… 안 되겠어 이 반 전체...”
선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기본 운동장 8바퀴에 토끼 뜀이 디저트로 제공되겠지... 다들 체육선생의 레퍼토리에 이골이 나 있다.
“ 선생님!! 저기... 미나가 오늘 그 날이라... 몸이 안 좋아서 늦은거에요!!”
윤조는 체육선생이 말을 끝내기 전에 손을 들고 소리쳤다.
“뭐? 그.. 날??”
선생은 금방 못 알아듣고 갑자기 눈을 귀여울만큼 동그랗게 뜨고는 윤조를 쳐다 보았다.
“그 날이라구요!! 아우... 그! 날!!”
단체기합은 죽어도 싫은 아이들이 윤조의 말에 동조하며 선생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나이스! 마초란 말을 잘 알아듣고 써먹는군. 훗.”
한주는 여전히 윤조 앞에 서서 깔깔대고 있었다.
“아.. 그..그래. 그럼.. 너는 저기 벤치에 가서 좀 쉬도록! 그럼 되겠냐? 양호실 안 가도 되겠어?”
윤조의 기지 덕에 미나는 혼도 안 나고 그늘 벤치에 누워 한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게 되었다.
“뭐 저래? …떔기합 받을 뻔 했는데 오히려 쟤만 아주 한 시간 늘어지게 생겼군.”
승진이 윤조를 팔꿈치로 툭 치며 속삭였다.
“냅둬. 쟤 밤에 피곤한 애니까... 어차피 쟤 때문에 기합 받는것 보단 낫잖아.”
“그건 그래.”
승진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입 한 쪽을 실룩 거리다 이내 배구 연습 중인 팀에 합류했다. 망설이던 윤조도 이내 배구팀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 그냥 멀리 뛰기나 뜀틀 같은 것 하지? “
단체 기합의 위기가 지나고 선생은 아이들을 세 묶음으로 대충 나눠 배구 서브 연습, 뜀틀, 멀리뛰기 연습을 시켰다.
한주가 계속 간섭하는게 마음에 안 들어 윤조는 아예 뛰어서 배구팀 쪽으로 향했다.
그 때였다. 마침 상미가 높게 띄워 강 스파이크로 내리 꽂은 서브볼이 윤조의 옆통수를 강타한 것은...
태어나 기절이란 것을 처음 해 보나 보다. 눈을 떠 보니 윤조를 들여다 보고 있는 얼굴이 종잡아 20명은 되어 보이고 얼굴이 더욱 시뻘개진 체육 선생 옆에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석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껴서 기분 나쁘게 빙글거리고 있는 한주까지...
“야! 괜찮아? 정말 미안해!! 너 맞추려고 던진게 아닌데... “
걸걸한 목소리의 상미가 연신 미안해 하고 있다.
“아냐.. 내가 하필 그 때 지나가서.. 괜찮아...”
“괜찮겠냐? 아까 만져보니까 혹이 이만하던데...”
“넌 업고 뛰느라 바빴던 것 같은데 언제 또 옆통수는 만져봤대?”
윤조가 기절하는 바람에 놀랬던 아이들은 다행히 멀쩡한 것 같으니까 또 금세 서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윤조가 쓰러지자 달려와 업은 것은 석수였다. 야간 자율 학습을 수시로 빠지고 지각을 밥 먹듯 하는 몇 몇은 아예 학교 인부로 취급해도 될 정도로 늘 학교일에 종사중이었고 그 때도 석수는 별관 뒷 쪽 체험밭 잡초를 뽑고 있는 중이었다. 윤조가 공을 맞자마자 쓰러지고 아이들이 소란스럽자 무슨 일인가 구경을 했다가 쓰러진 아이가 윤조인 것을 발견하고 바로 업고 뛴 것이었다.
“머리 괜찮냐? 피아노는 좀 쳐도 운동신경은 영 아닌가 보네... 공을 그리 제대로 들이받냐?”
석수는 필요이상으로 화를 버럭 내더니 새삼 여학생들 사이에 껴 있는게 민망했는지 양호실을 먼저 나가버렸다.
“웬일이야... 오 석수 왜 저리 오버해?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네.”
석수가 나가고 나자 여기 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지만 윤조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까부터 내내 심기가 불편하던 지민은 체육 선생이 양호실 일지에 윤조와 관련한 사유서를 작성하는 사이 석수를 쫓아 나갔다.
아직도 수업 시간이 30분이나 남았으니 선생은 윤조가 진짜 괜찮은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운동장으로 나갔다. 양호실이란 원래 아픈 아이들을 위해 양호 선생이 상주해야 하는 곳이지만 사실 학교 양호실이란게 꾀병 환자나 생리통을 빙자한 몇 몇 아이들이 쉬러 오는 곳이라 양호 선생은 대부분 여선생 교무실에서 수업이 빈 여선생들과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기 바빠 정작 양호실은 비어 있곤 했다.
아이들이 다 나가고 나자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윤조가 입을 열었다.
“ 너… 그러니까…그런 것도 보이냐? 미래 같은거...? 아.. 하긴 그러니까 무당이나 신들린 점 집 같은게 있는건가...”
“ 뭐.. 늘 그런건 아니지만 대충... 그러니까 다음 번엔 말 좀 들어라 이 정신 사나운 것.”
한주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윤조의 발끝에 서서 내려다 보다가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그럼... 혹시 뇌진탕이 진행중이라던지, 뇌혈관이 터졌다던지 그런건 아니겠지?”
“인간은... 생각보다 아주 약하기도 하고.. 아주 강하기도 하다... 그거 모르지? 그리고 내가 바라는대로는 절대 되지 않는다.... “
“뭔 소리야! 지금 내 머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단 거야? 아까 깨자마자 구구단 몇 개 외워보고 연대기도 몇 개 외워 봤는데 멀쩡한거 같은데...”
윤조가 진짜 겁에 질려하자 한주는 또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너.. 가만 보니까 꽤 재밌다. 참 독특해. 걱정마라. 멀쩡하니까. 뭐 옆통수가 좀 부어 있긴 하겠지만... 그걸로 어찌 되진 않으니 걱정 붙들어 매.”
괜히 예민 떠는 걸 수도 있지만 왠지 아까 한주가 ‘인간은 생각보다 아주 약하기도 하고 아주 강하기도 하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말을 할 때 녀석은 뭔가 한탄스러워 하는 것 처럼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