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민은 중학교때 석수와 같은 화실을 다녔었다. 중학생인 석수는 적당히 허세스럽고 소란했으며 항상 주위에 남자아이들을 몰고 다니면서 호탕하게 웃는 밝은 아이였다. 그 때도 여학생들에겐 무뚝뚝했지만 그림도 잘 그리고 잘 생긴 석수 덕에 지민의 화실엔 언제나 대기자가 넘칠 정도였다. 그 때 부터 줄곧 지민은 석수 주위를 맴돌며 전교생이 다 알 정도로 그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석수는 지민 뿐 아니라 어떤 여학생과도 별로 말을 섞지 않았다. 특히 1학년 여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부터는 불량한 아이들과도 어울리고 그림은 아예 손을 들어버렸다. 석수가 없는 화실이 의미 없어진 지민 역시 이후 그림을 그만 두었지만 원래 성적도 별로였던 지민은 아예 윤조네 반 꼴찌 3인방을 착실히 메꾸고 있다.
"야! 오 석수!! 너 뭐냐? "
“... 아직 수업해야 하는 것 아니냐? 가서 수업이나 받아라."
"너 뭐냐고!!!"
"뭐긴 뭐야, 잡초나 뽑는 인생이지. 보면 모르냐?"
"너 뭔데 하 윤조를 걱정하고 지랄이냐고!!"
".... 말이 좀 그렇다? 넌 그럼 걱정 안 되냐? 사람이 옆통수가 그렇게 냄비만큼 부어서 기절했는데? 이 기집애 인간성도 꼴찌네!”
" 못 알아듣는 척 할래? 대놓고 말해! 너 하 윤조 좋아하냐?"
"응! 걔 좋아해! 됐냐? 그럼 꺼져라."
석수는 망설이지도 않고 기다린 듯 대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짜야? 진짜야??"
"응. 진짜야. 끝!"
석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민은 쥔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뭐가 안 된다는거야? 나는 지금, 시방, 굉장히 인생이 복잡한 놈이거든? 내가 남 사정 따위 신경쓸 그런 여유가 없는 놈이거든? 학교도 진짜 뭣 같고 나오기 싫은데 내 동생이 고등학교 중퇴나 하는 오빠는 쪽팔린대. 그래서 진짜 어쩔 수 없이 나오는건데, 하 윤조 보는 낙에 그나마 다니는거야. 왜? 뭐가 잘 못 되었냐고!"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좋아하고 있는지... 알면서... 왜 ... 나는 아니야? 왜 나는 그렇게 오래 노력해도 아닌데 하 윤조는 돼?"
"노 지민! 잘 들어. 좀 기분 나쁘겠지만 기왕 네가 물어보니까 얘기할께. 난 사실 너한테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오히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여러 번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듣지 않고 나를 괴롭힌 네가 나한테 미안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 네가 나를 네 맘대로 좋아했다면 내가 넌 아니고 하 윤조를 바라보는 건 내 마음이잖아. 그만하자. 더 말해봤자 너만 기분 더러울거야."
석수는 아예 수레와 가래 등을 가지고 반대쪽으로 자리를 떠 버렸다.
지민은 더 이상 석수를 쫓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다. 지민의 발밑으로 운동장 모래가 조금씩 젖어가고 있다.
“나쁜 새끼... 이제 이 뭣같은 학교에 오게 하던 내 낙은 어쩔꺼냐.
더럽게 솔직한 새끼..."
"야, 노 지민. 수업 끝났어. 뭐하냐? 여기서... 으이구 등신. 싫다는 놈은 왜 이렇게 못살게구냐? 작작 좀 해라. "
한 시간 내내 생리통 환자인 척 벤치에 누워 있던 미나가 어느 새 지민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가 젖어 있는 모래와 저 만치 보이는 석수를 발견하고는 한심하단 듯 핀잔을 준다.
"야!!!!!! 누가 누구를 좋아하면 그게 못 살게 구는거냐? 어떻게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지민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미나는 흠칫 놀래 입을 다물었다.
한편, 양호실에 누워 있던 윤조는 기왕 누운 김에 남은 수업시간 동안 쪽잠을 잤다. 종이 치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자 한주는 보이지 않았다.
"야! 이 한주! 어디갔냐? 여기 있어?"
"오... 귀신에 대해서 하나 깨우치는데?"
한주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윤조의 이마를 튕겼다.
"으.. 차가워... 손난로 하나 사주랴? 근데 귀신에 관한 한 가지가 뭐야?"
"너한테 엮여 있는 영은 네가 부르면 언제든 끌어낼 수 있어. "
"... 흠... 근데 너는 내가 안 불렀을 때도 간 떨어지게 마구 나타나고, 내가 부를 때도 나타난다고? 뭐여, 그럼 기본적으로 넌 그냥 나랑 같이 다니는거야?"
"뭐 대부분은... 근데 나도 사생활이 있어. 뭐 인간들의 거리, 시간 개념하고는 달라서 어디 있건 네가 부르면 1초 안에 나타나겠지만....."
"... 흠... 귀신들은 직업 필요 없냐? 퀵 서비스 같은거 하면 대박치겠구만."
".... 귀신이.... 돈이 왜 필요하겠냐. 일차원적인 것... 교과서만 파니까 주변머리가 안 돌아가지? 한국 교육 문제라니까. 종 쳤으니까 교실 안 가냐?”
윤조가 양호실에서 챙겨 나온 얼음백을 옆통수에 대고 들어선 교실은 평소보다 배로 소란했다.
"윤조야 너 괜찮냐?? 어차피 국어도 잘 하는데, 한 시간 더 자다 오지 그랬냐 불쌍한 내 새끼 "
짝인 정수가 과장스런 동작으로 윤조의 엉덩이를 두드려댄다.
"왜 이렇게 시끄럽대? 뭔 일 났어?"
"정미 학원비 가지고 온 거, 그거 누가 훔쳐갔대. 그리고 다들...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지..."
정수는 말 없이 속눈썹을 올리고 있는 미나를 눈으로 가르켰다.
"아냐... 쟤가 늦게 나오긴 했지만... 쟤는 .. 아냐... 그런 짓까지 하는 애는 아니잖아."
"근데 교실문 마지막으로 잠근 것도 미나래."
승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들 싱숭생숭해서 수근대고 있다. 반장인 은주는 어쩔 줄 몰라하며 정미에게 다시 한 번 꼼꼼히 찾아보라고 채근을 하고 있고 정미는 이미 다 확인을 해 본 모양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국어 시간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반은 소란했다. 하는 수 없이 은주는 일어나 국어 선생에게 사태를 보고 했다.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드문 건 아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대부분 범인은 같은 반 학생이게 마련이고 더 슬픈 건 모두가 다 용의자 선상에 오르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학교라는 보호 받아야 할 작은 사회 안에서 이미 '전과자'로 치부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슬프지만 아무도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실이다.
국어 선생은 은주를 시켜 교무실에 가서 담임에게 알리라고 이른 뒤 단 한 명도 반을 나가거나 자리를 뜨지 말라며 교실 앞과 뒤 문을 모두 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