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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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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l 18.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7)

조 미나.

말 끝마다 비꼬고 수업시간에도 껌을 씹는 이 아이는 예쁘장한 편이지만 험한 행동과 말투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윤조와 같은 반이었음에도 고등학교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윤조는 미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미나가 반갑게 윤조에게 인사를 건넸을때 윤조는 사실 속으로 놀랬었다. 윤조가 기억하던 미나는 늘 공주풍의 리본 드레스를 차려입고 하얀 타이즈를 뽐내며 학교에 놀이하듯 등장하는 살아있는 ‘공주’였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와 다시 만난 미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미나의 아버지와 석수의 아버지는 함께 제과 사업을 했었다. 꽤 잘 되는 중소기업으로 ‘혁신적인 경영인’ 상까지 받았던 이들은 미나의 아버지가 조금 더 욕심을 내 무리한 확장을 시도하다가 풍지박산이 난 경우였다. 자금을 책임지던 미나의 아버지는 경제사범으로 작년부터 구류중이고 석수의 아버지는 행방이 묘연했다. 평생 제 손으로 파 한 번 썰어본 적 없이 살던 미나의 엄마는 이후 충격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있고, 석수의 엄마는 건물 청소를 시작했다. 매주말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여행을 갈 정도로 친했던 석수네와 미나네는 더 이상 왕래를 하지 않는다. 1학년 초반에만 해도 아이들은 종종 석수와 미나가 복도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때문에 한 때 둘이 이미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희한하게 그럴 때마다 지민이 나서 ‘그냥 집안끼리 친할 뿐’이라고 부러 대신 변명을 해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 둘은 학교에서 마주쳐도 서로 유령 대하듯 지났지만 그 또한 이상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집이 잘 살때도 미나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를 근근히 졸업하고 안 해 본 일이 없이 돈 버는 일에 집중했던 미나의 아버지는 대학따위 졸업장만 있으면 된다며 공부에 관심없는 딸을 화실, 피아노렛슨, 바이올린 렛슨, 무용까지 안 시켜 본 것이 없었다. 부족한게 없어 치열할 필요 없었던 어린 미나는 방과후 학원에서도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분식집을 전전했고 풍족한 미나 곁에는 항상 예쁘장하고 멋부리기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엄마가 병원에 들어간 후 점점 미나의 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지각은 기본이고 야간 자율학습도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이상한 건 미나의 집이 그리 된 것을 아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미나는 여전히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었고 씀씀이도 헤펐으며 왁자지껄 아이들의 주의를 모아 가쉽을 떠들어대는 것도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윤조는 그녀의 눈빛이 더 이상 해맑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는 미나의 옆모습을 볼 때면 뜬금없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미나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1학년의 윤조는 이랬다. 대부분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는 1학년 초반, 윤조는 유일하게 혼자 자기만한 가방을 매고 씩씩하게 등교하는 아이였다. 


“너는 엄마가 없니?”


“세상에 엄마 없이 혼자 태어나는 아이도 있니?”


“그런데 넌 왜 아침마다 혼자 등교하는건데?”


“난 엄마랑 함께 있으면 못 보는 세상을 보는게 좋으니까…”


미나가 기억하는 꼬마 윤조는 별날 것 없이 평범한 여자아이였지만 학년을 거듭할 수록 윤조는 꽤 특별해져갔다. 초등학교라 해도 학교라는 특수한 사회에서의 룰은 적용된다. 학교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집안 수준보다 공부를 잘 하면 우두머리다. 공부를 잘 하는데다 잘하는 특기까지 있다면 그 아이는 선생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크고 보면 별 것 아닌 ‘받아쓰기’. 이제 갓 7-8살 된 초등학교 1학년짜리들도 등급이 나눠지게 되는 그 ‘받아쓰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치뤄지는 그 별것 아닌 등급나누기에서 항상 만점을 받는 두 인간 ‘하 윤조’와 ‘이 한주’는 저절로 아이들에게 각인이 되어갔다. 불공평하다 느낄지 모르지만 대부분 그렇다. ‘받아쓰기’ 잘 하는 아이가 ‘글짓기’도 꽤 하게 되고 산수시험도 쉽게 만점을 받고, 게다가 한 반에 2/3는 다니는 피아노학원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든 분야에 천재적으로 소질을 드러내는것은 아니지만 대충은 하나를 잘 하는 아이가 여러가지를 다 잘하는 것은 일반이라 어떤 아이들은 이런 아이들 때문에 어려서부터 좌절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대상이 이성이면 동경하다 풋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동성인 경우 괜한 질투로 시작해 이유 없이 무작정 미워도 하게 된다.


미나가 그랬다. 

달이 지나고 어미새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한 초등학교 1학년생들이 드디어 혼자 등교하는 것이 정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즈음, 더 이상 아침마다 혼자 등교하는 윤조는 특이한 아이가 아니었다. 조금 다른 건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침부터 만난 반가운 반 친구와 수다를 떨며 분주한 그 길을 여전히 혼자 걷는다는 것 정도였지만 어느 날 부터 혼자 걷는 아이는 윤조 뿐이 아니었다. 윤조의 몇 발짝 뒤 쯤엔 항상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발로 길을 툭툭 차며 걷는 한주가 있었고 그 한주의 몇 발짝 뒤에는 큰 리본가방을 맨 미나가 따라오고 있었다. 


윤조는 혼자 걷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미나는 한주가 윤조를 따라 가고 있는 것인지 혼자 걷고 있는 것인지를 알수가 없어 무턱대고 윤조를 미워했었다. 

중학교때 이미 남학생들과의 미팅이나 모임에 열을 올리던 미나는 오래전 아침마다 뒷모습을 보며 설레었던 풋사랑 따위는 잊게 되었다. 아니, 몇 년 밖에 살지 않아도 확연히 너무 다른 인생의 테두리에 있는 그 소년은 그냥 배제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에 와 다시 만난 윤조는 그다지 밉살스럽지 않았다. 그걸 컸다고 하는건지, 세상에 젖었다고 해야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미나는 그냥 자신이 속한 리그가 아닌 두 아이를 그냥 무덤덤하게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다행히 엄마 병원비는 보험처리가 되지만 생활비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미나는 학교와 집 모두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갈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학교를 다니며 야간에는 갈비집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이 참 고단했다. 하는 것에 비해 받는 돈은 턱없이 작고 몸은 지치는데다 사고 싶은 것을 사기는 커녕 끼니를 걱정하기 바쁜 그때, 어느 밤, 마지막 손님으로 들었던 건장한 사내 넷 중 한 명이 미나를 따로 불러 명함을 쥐어주고 갔다. 고등학생치고 순진한 편은 아니던 미나는 단번에 어떤 곳인지를 알았지만 사실 그녀는 그다지 고민을 하고 그 곳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갈비집 아르바이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돈을 벌기 시작하자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 따위는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그날 밤, 일하는 단란주점 앞에서 술취한 손님과 실갱이를 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걷고 있는 윤조와 마주쳤다. 단정하게 교복을 갖춰 입고 학생다운 머리스타일에 조용히 걸어오는 윤조를 봤을 때 미나는 갑자기 소름이 돋을 만큼 부끄러웠다. 어쩌면 대부분은 다 알고 혼자만 몰랐을 그 진리가 번개처럼 꽂혔기 때문에... 이 나이에 단정한 교복을 입는 것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귀한 것이란 것.  나이에 맞는 무리에 잘 속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는 본인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 곳에서 일한지가 꽤 되었건만 그 길에서 하 윤조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분명 정류장을 지나쳤거나 잘 못 길을 들어선 것이었겠지만 그 날 이후 미나는 괜히 가게 앞을 나설때면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미나는 윤조와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하 윤조가 부러 본인을 본 사실을 떠벌리거나 선생에게 고자질할 위인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말야, 너 거기서 일하는거야?”


그 날 이후 서로 그것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아 거의 잊혀져갈 무렵, 청소시간에 윤조가 문득 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왜? 선생한테 이르기라도 하게?”


윤조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사납게 대꾸하는 미나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대답했었다.


“...아니... 귀찮게스리... 그냥 물어본거야. 아는 이상 그런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긴했는데... 네 반응을 보니 그런 말 했다간 두드려 맞겠네 .”


윤조는 씩 웃으며 아무일 없다는듯 다른 창을 닦으러 자리를 옮겼지만 미나는 뒤늦게 대답을 했었다.


“그러고 싶지만... 이젠 좀... 늦었달까…”


윤조는 몰랐겠지만 그 대화 이후 미나는 윤조에게 많이 상냥해졌다. 아마 알았다 해도 하 윤조는 혹시라도 선생의 귀에 들어갈까 지레 겁을 먹고 잘 해주는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미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미나는 어쩌면 ‘부모’를 가져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항상 사업으로 바빠 용돈을 두둑히 주는 것 이외의 다른 희생을 한 적이 없었고, 온실속의 화초같은 미나의 엄마는 평생 자기 치장과 사교모임에 바빴다. 


그 부모가 무조건적으로 보상했던 ‘돈’이란 것이 비자 이 아이는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미나는 까칠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윤조가 슬쩍 걱정을 해주었을때 사실은 그녀를 안고 울고 싶었었다. 선생이 아닌, 부모가 아닌, 아무 상관도 없는 한 아이가 걱정을 비치는 순간 어느 새 미나는 그 아이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장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담임과 학생주임이 도착하자 국어 선생이 복도로 나가 그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상에 모두 손을 올리고 조용히 기다리래. 소지품 건드리거나 하지말고... 돈이 몇 십만원이라서 그냥은 안 넘어갈거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궂은 일만 도맡아 하게 마련인 반장은 심히 우울해진다. 부러 정숙을 요하지 않아도 반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간혹 옆자리의 아이와 수군거리던 아이들도 그나마 입을 닫았다. 


“진짜, 이런 일 일어나면 내가 훔친거 아닌데도 후달린다니까…”


옆자리의 정수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우스워 피식 웃던 윤조는 뒷 자리의 미나를 우연히 돌아 보았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대부분 주요 용의자는 몇 명으로 좁혀지게 마련이다. 집안형편이 안 좋거나, 학생답지 않게 사치가 심하거나, 평소 불량한걸로 찍혔거나…


세 가지 사항에 다 해당되는 미나가 윤조는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미나와 그다지 친하지 않아도 미나가 그럴 아이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누가 훔친걸까... ‘


라고 궁금해 하던 윤조는 갑자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나한테는 맨날 쓸데 없는 소리나 하면서 귀찮게 하는 귀신이 하나 있지? 이럴때 써먹어야지... 야 이 한주! 빨리 안 기어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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