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를 보여 주는 건 별게 아닌데... 제발 소리를 지르거나, 기절을 하거나, 뭐 울거나 하는 그런 호들갑은 떨지 말았음 해. 사실 내가 너한테 온 지는 며칠 되었는데, 그런 각종 우려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안 나더라구. 아.. 참. 그리고 아까 차이코프스키는... 걱정 마. 네가 까먹은 건 아니고 도저히 네가 멈출 것 같지가 않아서 내가 잠깐 네 머리를 잡았을 뿐이니까. 내일 쳐 보면 멀쩡하게 다 칠 수 있을 거야. 뭐... 그래도 여전히 굉장히 감동스러운 실력은 아니지만 말야.. 아.. 미안.. 너도 알다시피 내가 솔직하잖아.”
윤조는 점점 알 수 없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손가락에 억지로 힘을 주어가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점점 걷는 보폭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소리의 주인공을 꼭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 아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야. 너네 학교 뒷산에 맨날 나타나는 그 변태 있잖아. 다른 데는 꽁꽁 싸고 거기만 내놓는 미친놈... 그 인간 또 나타나서 소리 지를 때 다른 여자애들은 정말 시끄러운데 너는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그냥 묵묵히 네 자리로 가더라. 그래서 내가 생각했지. 역시 하 윤조.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담대하다는 거... 하하. 아... 너 정말 가까이 다가왔구나. 어떻게 할까. 내가 나타날까? 아님 네가 여기 공 더미 뒤를 볼래?”
윤조는 소리가 나고 있는 농구공 더미 앞에 서서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미 윤조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편 있을 수 없는 이 일이 정말인지가 혼란스러워 속이 메쓱거리기 시작했다.
“에에... 당분간은 내가 여기서 살아야 하거든. 제발 속이 안 좋더라도 토하지는 말아줄래? 죽었다고 냄새도 못 맡는 건 아니거든...”
그랬다. 커튼 틈새로 헤집고 들어온 시퍼런 달빛을 입고 서 있는 것은 추울 만큼 파리하게 질린 핏기 없는 한주였다.
“.....”
윤조는 어렸을 때 방학마다 시골에 있는 외갓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일 이주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이가 많은 사촌 오빠들이 ‘전설의 고향’을 틀어놓으면 윤조는 차라리 컴컴한 밖에 나가 프로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는 편이었고 열 살이 넘어서도 지나다 우연히 본 공포영화 포스터 잔상 때문에 화장실을 혼자 못 갈 정도로 간이 작은 편이었다.
윤조는 정말 눈 앞에 나타난 한주를 바라보며 십 분이 넘는 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난 시간이 남아도는 몸이지만… 넌 꽤 시간을 여유롭게 쓰는구나. 놀래는 데에 무려 십 분이 넘는 시간을 쓰다니...”
한참을 함께 마주 보고 있던 한주가 입을 열었다. 잔뜩 슬픈 표정인 그가 자못 우습다는 듯 웃기 시작하자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더욱 슬퍼 보였다.
“....... 왜.... 왜.... 여기... 있어?”
윤조는 10월의 목화처럼 잔뜩 터져 나오는 만 가지 질문 중 겨우 한 가지를 목을 쥐어짜 겨우 끄집어내었다.
“... 그건.. 좀 이유가 복잡해.. 사실 여기 있다기보다 너한테 있다고 해야겠지. 네가 나를 묶은 무언가가 있고... 그걸 풀려고 왔다고 해야 할까...”
한주는 웃음기를 거두고 비다 못해 서늘한 눈빛으로 윤조를 쳐다보다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세상엔 한꺼번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나도 아직 혼란스러운 중이라서...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 내가 여기 있다는 거... 그거까지만 알면 돼. 오늘은........
지금 너희 담임이 너 어디 갔냐고 찾았고, 승진인가 하는 네 친구가 너 화장실 갔다고 했어. 얼른 지금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 자율 끝나고 38분에 오는 800번 버스 뒷자리에 있을게. 그때 얘기해줄게.”
한주가 사라지자 갑자기 달빛도 사라지고 희미한 전등 빛에 의존하기엔 사방이 더 깜깜해졌다. 윤조는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교실로 돌아와 있었다.
“너 뭐야? 오늘 담임이 엄청 저기압인가 봐. 아까 와서 미나랑 몇 명 자율 이탈한 애들 징계 준다고 펄펄 뛰다가 너도 없다고 찾았단 말야. 화장실 갔다고 했는데 마침 돌아와선 완전 다행. 너네 아빠한테 일러주면 어쩔 뻔했냐?”
뭐라고....
윤조는 자리에 앉자마자 상황보고를 하는 승진의 말을 듣고 더욱 등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율학습은 10시에 마친다.
아이들은 대부분 10시 5분 전에 다 빠져나가게 마련이었다. 윤조는 별관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시계를 보고 있었다.
"너 진짜 오늘 이상하다? 집에는 안 가니? 공부도 내내 안 하는 것 같더만..."
“... 응?... 아.. 나 오늘..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먼저… 가.. 내일 봐!”
이상하게 허겁지겁 둘러대는 윤조가 많이 불안해 보였지만 승진은 하는 수 없이 먼저 교실을 떠났다.
윤조는 여전히 혼자 남아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떠난 반들을 점검하던 당직 선생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윤조를 발견하고 얼른 귀가하라고 독촉한 시간이 10시 30분. 윤조는 그냥 알고 싶었다. 10시 38분에 정말 800번 버스가 오는 것이 맞는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