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신곡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le May 28. 2024

02. 초록잎이 떨어졌다

(5)

“가만 보니까 세상이 공평한 거였네... 이렇게 비뚤어진 년이 다 가지면 안 되는 거지... 시끄럽냐?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사람이 죽었다는데 시끄러워서 영어 단어 안 외워지는 게 더 신경질 나지? 


이한주, 내 친구거든? 뭘 어쩌고 어째? 그만큼 갖고도 못 견뎌서…? 뭐? 패배자? 너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이면 불평도 하면 안 되고 아플 이유도 없을 것 같애? 뭐가 자꾸 불공평하단 거야? 세상이 공평하려면 다들 똑같이 분식집 테이블 치우면서 영어 단어 외워야 하는 거니? 등에 짐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 짐이 얼만큼 무거운지 다 꺼내서 무게를 달아야 힘들만하다고 인정해 주는 거니? 너 그렇게 힘들면 그냥 하지 마. 공부! 넌 어차피 강요하는 사람도 없으니 공부가 네 스스로 정말 필요해서 해야 하는 것 아니었어? 왜 자꾸 다른 사람 핑계를 대는 거야? “


수연이 시뻘게진 얼굴로 수 십 번을 읽어 너덜너덜해진 영어 문법책을 들고 교실을 나가버리자 윤조는 다시 발소리도 없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한바탕의 소동 때문에 울던 아이들도 어느새 진정을 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반은 이내 숙연해졌다.


윤조는 1교시 국어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윤조와 한주가 동창이었던 것, 같은 피아노 학원을 꽤 오래 다녔단 것쯤은 모르는 아이가 없었다. 800번 버스 맨 뒷 좌석에 앉아 항상 길고 하얀 손가락들을 창에 짚고 밖만 내다보는 한주를 잠깐이라도 보려고 부러 돌아가는 그 버스만 골라타던 참새들이 윤조에게 조금이라도 한주에 대해 묻기라도 할 양이면 윤조는 늘 ‘그 재수 없는 놈’ 얘기 꺼내지 말라고 쏘아붙이곤 했었다. 하지만 정말 윤조가 한주를 끔찍이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었다. 간섭받기 싫어하는 윤조가 괜히 한주 얘기를 원하는 애들에게 일일이 대답하기 싫어 그러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생각했기에 윤조가 한주를 일컬어 ‘내 친구’라고 했을 때도 이상하게 느끼는 아이는 없었다.


“괜찮니? “


창백하게 질린 채 교과서를 꾹꾹 누르고 있는 윤조에게 승진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다가와 물었다.


“내가 안 괜찮을게 뭐야... 죽은 놈은 이제 괜찮아졌는지 궁금할 뿐이야.”


“흑..... 대체... 왜.. 그랬을까.... 나... 정말 많이 좋아했었거든... 매일 아침마다... 흑... 일부러 걔가 타는 버스를 기다렸어. 오늘은 꼭 말을 걸어봐야지... 아냐 내일 또 만나면 그땐 꼭 말을 걸어야지... 그랬는데... 그래서 정말 어제 아침엔 편지를 주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하필 어제 아침엔 그 애가 버스에 없었어. 그 왼쪽 뒷 창가 있잖아... 걔가 늘 기대앉았던... 그 자리에 없었어. 난 그 자리에 누가 앉는 게 싫어서 내가 그 자리에 앉아 버렸거든. 흑.... 흑... 얼마나 외로왔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 아... 난 정말 상상할 수도 없어...”


“…. 전염되니까 그만 울어...”


사실, 윤조는 승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승진도 1학년 반 편성이 되자마자 한주에 대해 물어보려고 윤조에게 접근한 여학생 중 한 명이었으니까. 


1학년 신학기 초반...


“네가 하윤조 맞지? 난 우승진이라고 해. 난 배정 여중 나왔어. 너 혹시 이한주랑 같은 피아노 학원 다닌다며? “


“.... 다녔었고 지금은 나만 다녀. 걘 관둔 지 좀 되었어...”


“아, 그렇구나. 어쩐지... 요즘 피아노 소리가 안 나더라… 아.. 나 걔네 집 근처에 살거든. 버스로 한 정거장... 그런데 맨날 걔네 집 근처로 산책을 가… 헤헤… 난 손이 이 모양이라 손가락 길고 피아노 잘 치는 남학생을 좋아해. 하하”


아직은 어색한 같은 반 학생일 뿐인데 승진은 넉살 좋게 짜리 몽땅하고 짧은 본인의 손을 눈앞에 펼쳐 보이며 유쾌하게 웃었었다.


“원래 미성숙한 청소녀들은 허여멀건하게 키 크고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긴 손가락을 가진 어떤 청소년이 공부까지 좀 하면 금세 사랑에 빠지잖아. 미안한데 그 오징어 청소년을 묻는 청소녀가 어찌나 많은지 네가 지금 다섯 번째거든? 그래서 난 지금 다섯 번째 같은 대답을 할 참이야. 


난 이한주랑 안 친해.

같은 피아노 학원을 각자 돈 내고 다녔을 뿐이라구. 나와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 걔 얘기나 물으려고 말 거는 건 삼가주기 바래.”


“... 미안... 좀 귀찮았겠다. 그나저나 나 여기 앉아도 되니? 걱정 마. 이제 이한주 얘기는 안 물을 테니. 난 피아노 잘 치는 여자애도 참 좋아하거든. 참, 내 동생이 우윤호야. 나랑 두 살 차이나거든. 알지? 얼마 전 내 동생이랑 협주했잖아.”


“윤호가 네 동생이니?”


지난 12월에 있었던 콩쿨에서 윤조는 2학년 아래인 우윤호와 ‘비창’을 협주했었다. 대회 준비에 혼이 빠진 윤조를 보고 화가 끝까지 난 윤조의 아빠는 다시는 어떤 대회도 참가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었다.


바이올린을 꽤 하는 윤호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예고 진학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윤조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 원장의 지인이 운영하는 바이올린 입시 학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골프 장비 수입업체를 경영하는 승진의 아버지는 호탕하고 유쾌한 사람으로 워낙 딸과 아들의 반에 자주 먹을 것을 풀곤 해서 승진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 되고 싶은 아이로 꼽히곤 했다. 그러고 보니 윤조는 승진이 윤호의 누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로 둘이 닮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도 닮았고 한 번 마음을 열면 한 없이 다정한 것도 닮았다. 오뚝한 코에 서양인처럼 깊은 눈매를 가진 승진은 생긴 것과 달리 털털하고 시원시원했다. 1학년 때 담임은 초반에 각 중학교에서 진학해 서먹한 아이들을 배려해 일단 첫 두 달은 각자 앉고 싶은 사람과 앉게 해 주었는데 그날 이후 1학년 내내 윤조와 승진은 짝이었다. 가끔 승진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쉬는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승진의 동생 윤호도 그랬다. 콩쿨 준비를 하느라 매일 만났던 윤호는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바이올린을 정말 즐기는 아이였다. 


“신기해. 너랑 네 동생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너희 부모님은 성적 가지고 스트레스 안 주니?”


“전혀... 공부를 안 하는 건 상관없는데 뭐 하나라도 하고 싶거나 잘하는 건 있어야 한다고만 말씀하셔. 난 사실 딱히 재주가 없어서 공부나 하는 거야. 뭐 그나마도 너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거 같애. 교대에 갈 예정이라 이 정도 성적 유지하면 꽤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고, 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거든. 그래도 그때까지의 애들은 많이 웃고 행복한 것 같아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다면 난 좀 마음이 자주 아플 것 같아서… “


“그래... 무엇보다 그 할 일을 ‘해야 할 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부모님을 가진 것이 네 복이야.”


승진은 약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조를 쳐다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은 윤조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 만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한주의 자살 소식은 학생이고 선생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로 울음을 터뜨렸던 아이들은 그새 부류가 나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한 번 미끄러진 걸 견디지 못해 자살하다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갔다. 사람들은 세상일이 모두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또한 그들은 결론이 나지 않은 어떤 ‘미제 사건’을 못 견뎌해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관적인 어떤 사건에 대해 마음대로 내리는 ‘잔인한 판단’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이란 리그에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각자 등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본인 뿐이란 것을 어떤 이는 죽어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들은 자기만의 저울로 다른 이의 짐의 무게를 평가하곤 하는 것이다.

이전 04화 02. 초록잎이 떨어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