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신화의 순기능
아이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다. 관심 대비 아빠의 행동이 굼뜬 것이 에러이기도 하고 그런 굼뜬 아빠가 어쩌다 영어를 해보자고 다가가면 그만하자는 아이도 가관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총체적 난국이지만 혼란을 극복한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유치원에 입학한 이 시점이 적극적인 행동을 시작해야 하는 적기라고 본다. 어른들의 "영어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기만 했던 나로서는 (실은 행동하긴 했지만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사회에서 영어의 쓸모를 충분히 체감하고 있기에 훗날 아이가 영어에서 만큼은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절대적으로 확고하다.
영어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빠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짜 이름은 모르는 유튜버들의 유창한 영어 영상에 의지하여 아이에게 "영어와 친해져라"를 강요하고 있다. 영상을 틀어놓으면 그래도 보긴 하니깐 영어로 말하면 그래도 듣긴 할 테니깐-이라는 합리화에 의한 접근법. 단순한 접근은 지금까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유 의지의 박탈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지시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이기도 하고 그리하여 이것을 강요라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위인전을 좋아하는 한글 창제 세종대왕에 흠뻑 빠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영상을 틀어놓으면 처음에는 집중하다가 이내 한글 영상을 외치며 친숙한 언어로 도배된 영상 교체를 원한다. 요새의 영상 알고리즘은 취향을 공략한 영상들이 추천으로 뜨는데(이런 추천 영상은 세상의 다양성보다 편협함으로 이끄는 알고리즘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한글 영상으로 교체하니 추천으로 등장한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 이 중에서 아이가 선택한 영상은 'EBS의 올림푸스의 별'이었다.
영상으로도 정보를 얻기도 한다지만 책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이런저런 궁금증들은 책으로 해결한다. 그리스로마신화의 경우 왜들 그리 많이 추천하는지 궁금하여 예전에 도전했던 영역이었는데, 영어로 된 이들의 이름이 어렵기도 하고 달라붙지도 않아 몰입이 힘들었고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신들의 난잡한 사생활에 도전을 그만두었던 책이었다. 아빠가 책으로 이해하려 했던 영역을 AI시대를 살아가는 아이가 영상으로 소비하며 흥미를 가지게 될 줄은. 기존의 정립된 생각을 바꾸는 순간들이 불현듯 나타나는 건 인생의 또 다른 재미이다.
"헤라가 왜 질투의 여신이야?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인데 왜 존댓말을 하지?"
고이 갇혀 있던 공간에 다시 빛이 들게 된 건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다섯 살의 아이에게 아빠는 슈퍼맨이니깐. 슈퍼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스로마신화에 무지한 아빠는 도서관이란 방법을 택하였다. 영상으로 지식을 접하는 것은 나의 취향은 아니기에 주말을 이용해 도서관에서 빌린 아이 눈높이의 책. 글밥이 많지 않은, 그리고 모든 페이지가 그림으로 되어 있는 책이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12명이고 제우스는 를 필두로 각 신들은 어떠한 이들인지 쉽게 설명되어 있는 책. 어려웠던 그리스로마신화를 이해하기에는 최적의 도서였다. (영어에 대한 접근 방법론도 수준에 맞는 책으로 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우스와 헤라는 부부이고 제우스는 신과 인간과 요정들과 사랑을 나누는 바람둥이였고 그래서 헤라가 질투가 많았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삼지창이 엣지 포인트고 태양은 아폴론이고 달은 아르테미스고 둘은 쌍둥이고 헤파이스토스는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절름발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의 여신이라 불리는 아프로디테의 남편이었고 그런 아프로디테는 전쟁은 잘하지만 인성이 별로인 아레스를 좋아했고 아레스가 전쟁의 신이라면 전쟁의 여신은 아테네고 곡물의 신은 데메테르고 술의 신은 디오니소스이고 곡물과 술이라 왠지 둘의 케미가 좋을 것 같고.
만화로 된 책 1,2,3권을 탐독한 결과, 그리스로마신화는 꽤나 재밌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기존의 아이의 넘버원 관심사, 넘버 블럭스에서 그리스로마신화로 흥미가 전환된 건 덤이었고. 거실 소파에서 포세이돈 된 아이가 물어봤다.
"아빠 뭐 할래? 난 포세이돈. 나 삼지창 있어."
신이라기보다는 제우스의 셔틀 부하인 같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계속 마음에 있던 나는 자신 있게 외쳤다.
"나 에르메스!!"
"아니 에르메스가 아니라 헤르메스지. 왜 헤를 에라고 해!!"
집에는 없는, 심지어 매장조차 가보지 못한 그 이름이 튀어나온 건 왜였을까.
"아 맞아 맞아. 다시 할게. 에르메스!"
"아니 에르메스가 아니라, 헤!르!메!스!라!니!깐."
사주고 싶어도 사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남편 마음의 발현이랄까. 또다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 그래그래. 헤르메스 할게!"
에르메스가 헤르메스 신에서 영감을 얻은 브랜드라는 건 굳이 아이에게 알려주진 않았다. 가지지 못하는 동경이란 감정은 스스로 깨우치는 아이로 성장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