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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Oct 30. 2023

화학의 발자취

샐츠버그

Hugh W. Salzberg (고문주 역), 화학의 발자취-원시인에서 화학자로, 범양사출판부, 1973.


서문


... 궁극적으로 화학으로 화한 기술의 정보는 역사의 새벽부터 모아져 왔다. 심지어 인류Homo Sapiens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네안데르탈인들은 맹수들이 동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불을 사용했다. 그후에 사람들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고, 도기를 만들었고, 포도주와 맥주를 생산하였다. 결국 그들은 유리, 금속류 그리고 복잡한 문명에 필요한 물질들을 만들기 위하여 화학반응을 이용하였다...


사전에 따르면 화학은 물질의 조성과 그것의 전환에 관한 연구다...


... 기원후 1550-1600년경까지 그들은 물질의 내부 조성에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으며 심지어 내부조성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후로 화학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화학이라는 과학이 그 자체로 나타나기까지는 또다시 200년이 더 걸렸다. 과학으로서의 화학의 역사는 실제로 미국보다도 역사가 짧다. 1770년경에도 나폴레옹과 제퍼슨은 물질이 흙, 공기, 불 및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과 35년 후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고 제퍼슨에게 루이지애나를 팔 때의 화학자들은 최초로 원자량과 분자량을 해결해 냈다.



I. 고대 기술: 화학의 뿌리


... 기원전 6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이 경험적 관찰을 최초로 과학으로 조직화할 때에는 상당한 화학지식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많은 과학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특히 의학과 해부학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기초 대수학을 포함한 수학과 천문학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리스인 이전의 사람들은 신의 변덕과는 별개인 자연의 법칙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색소

색소는... 동굴벽화에... 종교와 주술적 의식에... 몸을 색칠하기 위해... 화장품으로... 얼굴, 특히 눈꺼풀에 색칠을 했다... 원래의 목적은 날벌레들이 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지만, 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데로 강조점이 옮겨갔다... 이집트에서는 입술과 볼을 붉은 황토로 칠했는데,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노란 황토를 더 좋아했다. 여성들은 손톱을 붉게 칠했으며 손바닥과 발바닥은 헤나Henna 염료로 칠했다...


염료

역사시대 초기부터 직물들을 염색했다... 아마도 염색에 대한 생각은 호두나 딸기 혹은 다른 음식물에 의하여 남겨진 얼룩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직물 이외에도 염색하기를 원했다. 페니키아인들은 명반, 히말라야 삼나무의 기름 및 Athemis tinctoria라는 관목의 수액으로부터 머리카락 염색약을 제조했다...


고약과 향료

기름, 특히 향료 기름은 근동의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향료를 품은 지방을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서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머리에 얹어서 녹아내리게 했다(시편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내려")... 초기의 향료 증류 과정의 한 가지는 여성에 의하여 혹은 여성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초기의 많은 화학적 과정과 기구가 조리로부터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발효 음료

과실, 과즙, 우유 및 다른 유기 용액은 천연적으로 발효되었으므로 매우 오래전부터 다양한 발효음료와 낙농제품을 얻을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세금 조사원들이 포도주의 질을 평가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포도주를 정부 관리들의 입회하에 원산지에서 항아리에 담고 오늘날의 농장 상표와 같은 공식 인장으로 봉인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양조는 가내 공업이었으며 양조업자와 맥주 상인은 여성이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들이 증류업자, 화학자 및 연금사로 일하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것은 최소한 기원전 320~80년경 사이의 헬레니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비누

비록 고체 비누는 중세 초기까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3000년경에 수메르인들은 비누용액을 사용하였다... 수메르의 성직자와 사원의 참배자들은 종교적인 의식 전에 비누가 없이 아마 재와 물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정화하였다. 어떤 시점에서 사람들은 재가 물 속에 더 많으면(즉, 알칼리의 농도가 더 진해지면) 물이 더 미끄러워지고 세탁이 더 잘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종류의 비누 용액을 만드는 특이한 방법들이 설형문자 서판에서 발견되었다. 고체 비누를 만드는 사소한 마지막 단계는 서기 800년경 사보나의 가울에서 용액의 염석 또는 염의 첨가(염용)에 의하여 물로부터 비누가 분리되었을 때에 완성되었다(그러나 과학사학자인 마틴 레비martin Levey는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염석 방법을 사용했다고 보고했다).


도기

... 도기는 고온 기술의 첫번째 산물이었다... 기원전 6500년경 이후에 도공들은 마침내 호리병박과 바구니의 도움없이 젖은 점토로 직접 단지, 사발, 항아리를 빚었다.


금속

불구덩이로부터 도기 이상의 것이 얻어졌다... 아마 기원전 6000년경에는 벌써 불구덩이를, 구리를 녹일 수 있는 높은 온도까지 도달하는 노爐로 전환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까지 대부분의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 농부들이 접촉한 금속은 사원의 장식 및 귀족과 고위 공직자들의 보석, 칼 및 방패뿐이었다... 처음으로 알려진 금속은 구리와 상대적으로 희귀한 금과 은이었다... 구리는 산소와 반응하지만 그 속도가 느리다. 단지 금과 은 그리고 다소의 구리만이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지면에 굴러다니는 천연 금속의 덩어리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기원전 1200년경에 철이 제련되었고... 중국의 철광석은 비교적 많은 양의 인을 함유하였기 때문에 더 낮은 온도에서 녹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보다 훨씬 빨리 철이 나타났다.


유리

유리는 도기 가마에서 나온 또 다른 산물이다... 다른 물질들도 그것들로부터 무엇이 생기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노에 넣어졌다. 마침내 기원전 4000년경에는 석회석으로부터 이산화탄소를 제거하여 생석회가 만들어졌다. 생석회는 지금도 그렇지만 피혁 제조에서 동물 가죽의 지방과 털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이후부터는 생석회의 주요 기능은 건축용 시멘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소석고도 석고를 가열하여 만들어졌다.


마술과 노

최종 산물이 무엇이든지 간에 노의 현혹하는 불꽃과 태울 듯한 열은 마술적으로 보였다. 암석은 금속과 유리로 변했다... 그래서 야금의 신들과 성직자들이 생겨났다... 그리스의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로마의 벌컨Vulcan, 색슨의 웰란드 스미스Welland Smith, 노르웨이의 외팔의 티르Tyr the One-Armed(그의 이름으로부터 화요일이란 말이 생겼다)다... 수메르인들에게 각 금속은 하나의 신과 하나의 행성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화학과 제련 과정과 별 사이에 강한 연관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 믿음은 서기 17세기까지 이어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운석의 철은 특별히 신성시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원은 중세의 수도원처럼 학문과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집트의 기술, 천문학 및 수학의 대부분은 항상 사원을 위한 것이었다. 자연적으로 이집트의 화학 과정은 마술과 종교에 스며들었다... 상황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비슷했지만 지리적 여건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필기와 수학은 사원의 회계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속세의 일에도 역시 필요하였다. 수메르에서는 석재, 목재 및 금속 같은 원자재들이 귀했다; 그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무역을 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경제는 많은 소매상인, 무역상인, 도매상인 및 독립적 기능공을 가진 비교적 큰 민간부문을 가지고 있었다. 상법도 발달하였고, 계약 위반의 소송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서판도 있다. 상인들은 읽고 쓰고 기초적 산술을 다룰 필요가 있었다... 이집트는 고립되고 안정된 사회였지만, 융통성 있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그들의 사원과 신정神政에서 해방되어 자연 법칙의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기원전 2000년대 중반 이후에 그들은 외부 침략자들에 의한 끊임없는 전쟁과 반복된 외국지배를 받고 약탈, 탈취, 대학살 및 인구의 대량이동을 당하여 파괴된 문명 국민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지식은 더 유리한 곳에 위치한 민족인 크레타인과 그리스인에게 소개되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지적 발달이 이루어졌다. 자연철학은 그리스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II. 고대 그리스의 과학으로서의 화학


알파벳의 역할

그리스의 알파벳은 그리스 사상발달의 중심이었다. 페니키아 알파벳을 개조하여 기원전 403년에 아테네의 집정관 에우클리데스Euclides가 최종적으로 표준화하기까지 지속적으로 부분적 변화를 하였다...


그리스 사회와 과학

... 그리스인들은 작은 독립된 단위체인 도시국가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대개 신하나 노예가 아닌 소시민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농장을 소유하였고 그들 자신의 정치와 경제적 결정을 하였으며 공공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과학, 철학 및 수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많은 그리스 도시들은 지적인 논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합리성은 우리가 신비주의라 부르는 것과 섞여졌다. 예를 들면,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500-430)는 그가 초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과학과 철학의 선구자들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특히 오늘날 터키에 속하는 밀레투스 시의 그리스인이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페르시아와 광범위하게 접촉하며 중국과 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들과도 상품 교역을 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이미 많은 여행을 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이오니아 상인들-합리적이고 사색적이며 무엇보다도 읽고 쓸 수 있었다-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 그리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기원전 546년경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이오니아가 지배당한 후에야 아테네가 앞으로 나서게 되었지만 아테네의 지적 성장은 이오니아 망명자들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 고대 그리스 과학의 가장 큰 단점은 전체적으로 경험적인 기술적 기초로부터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농부, 대장장이, 조선공 및 유리 제조업자가 직면한 실제적 문제에 그들의 결과를 적용하는 데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적인 기술에 거의 흥미를 갖지 않았으며 공헌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개 의학과 전쟁을 제외하고는 일상 생활로부터 지식이나 영감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정 국가나 사원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이나 연구할 수 있었다. 또 페르시아인들의 패배 이후 그리스인들은 여행을 하고 사상과 문화를 비교하고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 해상력이 동지중해를 지배했기 때문에 여행은 비교적 값싸고 안전했다. 그리스 귀족들은 18세기의 대여행과 버금가는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줄 만한 흥미있고 이상한 현상들을 관찰했다...


초기의 과학과 철학적 개념

그리스 과학자들은 심지어 신들도 따라야 하는 법칙으로서의 자연법칙을 믿었다... 밀레투스의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Thales, BC 624?-546)의 업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583년 5월 25일의 일식을 예언해서 유명해졌다. 이 사건이 그리스 세계에 퍼지자 사려깊은 사람들은 일식 및 월식이 양식을 따르며 일정한 주기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탈레스가 얻은 천문학적 지식을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성직자이거나 사원을 위하여 일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결론을 공표하지 않았다... 탈레스 이후의 교육받은 그리스인들이 자연이 합리적이다라는 것을 확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 합리성은 수학적인 것이었다... 모든 수들은 정수들의 비로서 표현될 수 있으므로 합리적이다라고 믿었다... 제곱근 2와 같은 무리수... 그것은 정수의 비로서 표현될 수 없었다... 수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에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러한 무리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과 당대의 그리스인들은 산술학보다는 기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것은 무리수라도 기하학에서는 표현 가능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어색한 철학적 문제들을 우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물질의 조성에 관한 그리스인의 사상은 모순 원리보다 복잡했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하여 처음으로 형식화된 이 사상은 플라톤(Platon, BC 428-348)이 그의 대화편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그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자신의 철학 체계 속으로 편입하였다... 화학적인 사상은 원래 엠페도클레스의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엠페도클레스의 사상은 틀렸지만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합리적이고 유용했으며 상식과 관찰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원자설

물론 다른 이론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레우키포스(Leucippos, BC 440)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BC 460-370)의 원자설이며 후에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와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5-55)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극소수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원자설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한가지는 원자설이 끓음과 얼음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원자설은 솔직히 무신론적이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종교로부터 과학을 분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전우주에 대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설명을 찾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자연철학의 많은 부분은 목적론이었다... 우연하게도 히브리어로 무신론자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피코로스(apikoros)다.



III.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 연금술의 등장


기원전 600년경부터... 사람들은 연금술로 알려진 일을 해왔다... 연금술이란 말은 처음으로 서기 14세기경의 문헌에 khemia라고 쓰여져 나타난다. 아마 이것은 '검은 땅'(이집트)을 의미하는 이집트어 kmt 또는 kemi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금속을 녹이고 주조하는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chyma에서 왔을 것이다... 금을 만드는 것에 대한 고대 중국어는 kemi처럼 발음되었는데... 어떤 경우이든 아랍인들이 'the'에 해당하는 접두어 al을 첨가하여 al-chemy 혹은 alchemy를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헬레니즘과 로마시대의 기능공들은 최소한 그들의 전임자들만큼 능력이 있어서 그들은 새롭고 중요한 과정과 물질을 창안했다. 그들은 금속과 합금, 보석, 유리, 시멘트, 염료, 색소, 인공 진주 및 의약품을 생산했다… 초기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벽돌을 결합시키는데 때때로 인공적 시멘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아스팔트와 역청을 이용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각 특이한 상황들에 이용되는 약 28가지 종류의 시멘트가 있었다.


비전의 연금술

… 근동에서 통속적 연금술은 천한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이었다. 아주 옛날부터 중국에서 그리고 조금 더 뒤에 근동과 유럽에서 통속적 연금사들은 사용자를 영원히 살게 해준다는 불로장생약에도 관심을 가졌다. 불로장생약을 구하는 것은 의학 연금술에 공헌했으며 그것은 의학과 화학 양쪽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능공, 비전의 연금사 그리고 통속적 연금사들 사이의 고정된 구분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세 부류가 아니었다… 결국 연금사들은 기능공으로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기능공들과 연금사들은 거의 틀림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을 만들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더욱이 기능공들과 통속적 연금사들은 모두 비전의 연금술을 상당히 믿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금속과 광물이 영혼을 가지고 땅속에서 자란다고 믿었다... 점성술사들과 연금사들은 불멸의 영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의 일부였고 구원은 급격하게 연금술 연구의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고 명확하게 말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410)에 의하여 요약된 것처럼 인간은 소우주와 동일시되었다. 결국 점성술, 야금학 및 연금술의 혼합은 하나 또는 몇몇의 종파로 되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 용어로 비전의 연금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종파들은 아프리카와 근동의 순결의 회교형제단(Muslim Brethren of Purity/혹은 충직한 형제단(Faithful Brethren) 및 중국의 도교를 포함했으며 둘 다 연금술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유럽에서의 연금술 종파는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였다… 그노시스주의는 서기 1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그후에는 기독교의 권위에 억압을 받았다. 공식적으로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노시스주의 사상은 기독교 시대의 연금술 문헌에 보존되었다. 그것들은 중세의 신비론자며 치료가인 빙엔의 성 힐데가르트(Saint Hildegard, 1098-1179)와 16세기의 의료 연금사인 파라셀수스(Paracelsus)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중세 유럽에서는 비전의 연금술 종파는 교회에 의하여 심하게 억압받았지만 기독교 신학을 지지하는 연금술 이론은 어엿하게 유지되었다. 예를 들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와 함께 연금술을 연구하고 연금술 사상들을 그의 저서에 이용했다…


그리스 과학의 영향

비전과 통속적 연금술은 모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통하여 퍼져 있던 그리스 과학과의 접촉에 의하여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가장 커다란 학술기관은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이었다… 이집트만이 전쟁과 약탈로부터 벗어났으며 수백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은 지중해와 근동의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든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학자들을 유치한 박물관은 세라피스 사원의 도서관인 세라피온과 함께 거대한 대학이 되었다…


통속적 연금술

… 일단 금속이 죽으면 씨를 넣었다. 원래 그 씨는 자라서 크기가 커지라고 의도된 금의 작은 조각이었다. 그후에 개념이 바뀌어서 그 씨는 오늘날 우리가 촉매라고 부르는 것이 되었다… 서기 650년 이후의 아랍 시대에 아랍인들은 그들의 통상적인 접두사 al-을 붙여서 그것을 al-iksir라 불렀고 영어로는 연금약제elixir라 불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의 영향으로 연금사들도 현자의 돌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기 292년에는 로마의 재무관리들은 연금사들이 동전을 위조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연금술을 금지했으며 연금술 서적들을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연금술의 공헌

연금사들은 그리스 자연철학의 이론과 실제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결론적으로 노와 화덕이 개선되었고 새로운 유형의 가열 탕기들이 개발되었다. 증류와 승화의 장치들은 아직도 비효율적이고 20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향료업자들의 것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형의 증류기, 비커, 받는 용기, 여과기 및 다른 장치들이 발명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말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금속이 영혼을 가진다는 오래된 개념이 금속이 황과 수은으로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생각과 융합되었다. 이제 황은 금속의 영혼으로 생각되었고 수은은 금속의 지능이었다…



IV. 이슬람의 연금술


모슬렘 제국은 그때까지 알려진 가장 커다란 세계였다… 632년부터 750년까지 아랍의 정복은 광범위한 지적 교류를 가져왔다… 약 1000년 동안 처음으로 페르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대량의 문화 및 상업적 교류가 이뤄졌다… 750년과 1150년 사이에 이슬람 세계는 르네상스 말기까지 서구에서는 필적하지 못할 번영과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슬람의 과학 활동

… 모슬렘 지역에서 과학과 기술 지식의 막대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최초로 그들은 연금술과 화학 사이의 구분을 이끌어냈다…


중국의 공헌

… 중국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생명의 만병통치약의 개념이었다. 중국의 연금술은 독립적이었지만 서구의 연금술과 유사한 경로를 밟아 발달했다… 그러나 시초부터 중국 연금술은 천한 금속을 금으로 전환시키려는 서구 연금술과는 그 목적이 달랐다… 중국에서는 부와 지위는 금전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토지, 탄생 및 제왕의 은전에 기초를 두었다. 연금사들은 물질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위하여 금을 찾았다… 서기 144년경에 저작된 연금술에 관한 논문인 위백양의 <참동계(공동 상승효과의 약초)>라는 책… 조지프 니이덤Joseph Needham은 그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에서 중국인들은 그들의 실제적이고 세속적인 견해에서 생긴 영생을 원했다고 평했다. 내세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자연히 하나의 생애밖에 없었으므로 중국인들은 가능하다면 영원히 그것을 보존하고 싶었다… 어쨌든 기원전 400년경까지 중국인들은 마실 수 있는 금이 영생불사약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 751년에 타슈겐트 부근의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랍 군인들은 몇 명의 중국인 제지업자들을 포획한 후 사마르칸트에 제지소를 세웠다… 수요가 너무나 많아 793년에는 바그다드에 또 다른 제지소가 세워졌다. 1100년과 1150년 사이에는 스페인에 제지소가 세워졌고 프랑스에서는 1198년에 건설되었다.


다른 공헌

… 이상하게도 모슬렘 시대의 초기에 메소포타미아 연금술의 가장 큰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가 아닌 현재 터키에 속하는 하란의 마을에 있었다. 하란 사람들인 사비아교도들은 파르티아인과 페르시아인에게 지배를 받던 수천 년 동안 수메르인-바빌로니아인의 종교와 관습들을 보존해왔다. 그들은 모슬렘의 묵인하에 1300년경 몽고에게 도시와 민족이 멸망할 때까지 고대의 관습을 지속했다. 사비아교도들은 수메르인들의 기술을 실천했는데, 특히 증류에 의한 향료의 조제 및 동물과 식물 재료로부터 영생불사약을 조제했다. 사비아교도들의 사상과 기술은 곧 논의될 자비르와 알킨디가 받아들여 이용했다…


모슬렘의 자연철학자들

자비르

가장 유명한 모슬렘의 연금사-화학자-과학자들은 알킨디, 알라지, 이븐 시나(아비센나) 및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Hayyan이었다… 그는 720년경에 태어나 약 815년에… 사망했거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알킨디(al-Kindi, 800-873)

… 그는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번역하고 비평한 수학자였으며 기하학적 방법을 과학과 의학에 응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 실제적인 실험 기술자였다. 그는 점성술을 믿었지만 금속을 금으로 변환시키는 데는 의심했으며, 실제로 연금사들의 관행을 공격했다.

알칸디는 음악, 광학, 논리학, 천문학, 수학 및 기상학에 대하여 저술했다…


알라지

서구에는 레이지즈Rhazes로 알려진 알라지(al-Razi, 866-925)는 알킨디보다 더 도덕적이고 철학적 성격이 더 많았다… 알라지는 화학에 관한 책을 저술했지만 그는 일차적으로 의사였으며… 그는 페스트, 천연두 및 폐결핵이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아비센나

동부 이슬람 자연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서구에서 아비센나Avicenna로 알려진 이븐 시나(ibn-Sinna, 980-1037)였다… 의학백과사전인 <의학의 규범The Canon of Medicine>이다… 그 책에서 그는 약품들의 복용량과 효과의 적절한 실험적 연구에 대한 규칙과 순서를 확립했으며 약품들의 효과를 약품의 특성의 비율과 연관지으려고 시도했다. 그의 순서는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이었다.

그는 지질학에서도 광물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화석의 형성에 대한 아주 현대적인 이론을 제안했다…

… 그는 그 자신을 의사나 화학자로 분류했고 ‘연금사(alchemist)’란 용어는 금과 은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따로 남겨두었다…



V. 중세와 문예부흥기의 유럽 기능공


초기 중세 유럽(약 700-900)에서 유일한 화학적 활동은 장인들이 교회를 장식하고, 무기를 만들고, 천을 염색하고, 비누를 끓이고, 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연금술은 주로 아랍세계인 남부와 동부의 지중해 세계로 제한되었다. 그것이 서구에서는 대부분 없어졌다가 11세기에서 13세기에 십자군 원정으로 다시 도입되었다.

중세내내, 전쟁과 침략 및 유럽사회의 커다란 변화 기간 동안에 여러 종류의 기능공들은 후에 공업화학이 되었던 곳에서 조용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누, 유리, 금속, 석회, 석고, 잿물 및 염료 들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화학 기술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러한 경직된 태도 때문에 진보는 느렸고 기술을 교환하는 접촉도 거의 없었다… 야금 과정, 특히 병기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꾸준히 향상되었다… 비누는 개인적인 위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중세 플랑드르에 중심을 둔 방직공업을 위하여 제조되었다. 양모는 천연적으로 기름기가 있기 때문에 짜거나 염색하기에 앞서서 이 기름기들을 제거해야 했으므로; 비누와 알칼리가 대량으로 필요했다. 알칼리는 또 교회의 창, 플라스크 및 술잔을 만들 유리의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유리 생산의 주된 산지들은 알칼리와 고운 모래들이 이용가능한 이탈리아, 벨기에 및 라인란트였다.


비잔틴의 공헌

그리스 화약

(일반적으로 비잔틴인들은 혁신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운 예외가 있었으니 헬레니즘 연금술의 위대한 중심지인 헬레니즘화된 시리아인 칼리나코스Kalinakos에 의하여 발명된 유명한 그리스 화약이다. 그리스 화약은 석유 또는 나프타와 황의 혼합물에 휘발하거나 너무 신속히 타지 않도록, 즉 젤리처럼 굳게 만들기 위하여 수지를 혼합한 것이었다. 사이펀을 통해서 힘을 가하고 끝에다 불꽃으로 점화하면 불붙은 젤리의 분사물은 그것에 닿거나 접촉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웠다. 그 사이펀은 현대의 화염방사기의 원형이었으며 그리스 화약은 독창적인 소이탄으로서 이 소이탄은 제2차 세계대전과 후에 베트남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672년과 717년에 그리스 화약은 중요한 전략적 요새인 콘스탄티노플을 아랍인들의 침략으로부터 구했으며 그리하여 동부 유럽이 유린당하는 것을 막았다…


기술의 진보

유리

1000-1100년 사이에 이탈리아 기능공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유리를 개선하고 있었다… 유리는 병과 유리창, 특히 대성당의 유리창에 실용적으로 이용되었고 유리의 높은 녹는 점은 화학 장치에 유용한 것을 만들었다. 곧 이어서 유리 플라스크, 증류장치 및 모든 종류의 용기들이 화학 조작에 사용되었다… 유리는 열에 강하고, 전도성이 없고, 투명하며, 산에 강하고 무엇보다도 뜨거울 때에 가소성이 있다. 어떤 외양이 필요하든지 그것은 유리로 만들 수 있다… 새로 개량된 유리로부터 곧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의 성과가 생겨났다: 즉 안경이 발명되고 알코올이 분리되었다. 이상하게도 안경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새롭고 개량된 형의 유리의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그것은 1286년 직전에 북부 이탈리아 피사 부근에서 발명되었으며 신속하게 모든 곳에서 받아들였다. 인쇄 및 바퀴와 함께 안경은 가장 유용한 발명품이다

 

알코올

… 알코올이라는 말은 아랍어의 추출물al-kuhul에서 온 것이다… 1167년이 지난 후 곧 알코올 자체가 유리되었는데 아마도 장소는 살레르노였을 것이다… 그러나 1288년에 도미니크회가 알코올과 연금술의 연관 때문에 알코올의 증류를 금지하여 그 연구는 크게 진척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도사들은 샤르트뢰즈 주와 베네딕틴 주와 같은 알코올 음료를 계속 생산했다. 알코올은 기능공, 연금사 및 약제사에게는 대부분 용매로서의 성질 때문에 중요했다…


무기산

또 다른 중요하고 새로운 발달은 13세기 초의 황산, 질산 및 염산과 같은 무기산과 금 자체를 녹이는 질산과 염산의 혼합물인 왕수aqua regia 용액의 발견이었다… 무기산 용액은 즉각적으로 귀금속의 분석에 응용되었다… 그러나 질산과 왕수는 광물 분석 이외에도 사용되었다… 무역세계에서는 동전의 금과 은의 함량을 분석하는 신속하고 정확한 방법에 대한 요구가 극심해졌다. 새로운 산들이 즉시 사용되었다


무역과 화학공업

후기 중세 시대에 농업과 공업 생산 및 무역은 로마 제국 시대보다 더 큰 규모로 발전했다. 1350년부터 1450년까지 매년 보르도의 마을은 100만에서 200만 갤런의 포도주를 영국으로 선적했다. 1329년에 아키아졸리의 피렌체 하우스Firenze house는 거의 100만 부셸의 밀을 남부 이탈리아로부터 제노파, 피렌체 및 베니스로 운송했다. 은행과 재정은 국제화되었다. 1257년에 루카로부터 온 이탈리아 상인들은 제노바에서 중국 비단을 사고 그것들에 대하여 파리 근처의 상파뉴 장에서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지불은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 있는 한 은행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이러한 수준은 후기 중세 시대가 원시적이고 발달이 뒤떨어졌다는 사상과 아주 상반된다. 1350년경에 피렌체의 바르디와 페루지 은행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도록 금으로 약 1500만 달러를 대여했다. 그는 결국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은행들이 파산하여 코지모 드 메디치Cosimo de Medici가 사실상의 피렌체 독점은행으로 남겨졌으며 메디치는 이것을 도시의 정치적 지배권을 얻는 데 이용했다…


염료를 위한 명반

수출되는 많은 양의 천을 물들이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명반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되었다. 1275년에 제노바는 비잔틴 황제로부터 오늘날 터키에 위치한 포세아의 명반 공장을 임대하여 확장했다… 1278년에서 1455년까지 제노바인들은 매년 포세아로부터 약 800톤의 명반을 선적하여 그것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하여 플랑드르로 직접 수송했다… 그러나 1455년에 터키인들이 포세아를 점령하자 로마의 북쪽 톨파에서 명반의 대형 광산이 발견될 때까지 유럽에 명반의 품귀가 시작되었다… 교황의 명반 독점으로 인한 재정과 정치적 비용이 너무나 비싸서 명반가격이 껑충 뛰었기 때문에 1500년경에 이르러서는 화학자들의 감독하에 황산알루미늄을 포함한 천연 진흙으로부터 명반을 만들려는 노력이 유럽 전체에서 이루어졌다…


목재 대용품

인구의 증가와 함께 농경지가 확장되고 이에 따라 숲들이 없어져서 건축과 선박 건조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을 때 목재가 부족했다. 1200년 이후 건축, 난방 및 제련을 위한 목재 대용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벌써 1190년에는 이미 벨기에의 리그에서 철 제련업자들은 부족한 숯을 석탄으로 대치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난방에는 석탄이 대량으로 이용되었다… 1380년에는 이미 석탄연기와 보통 안개의 혼합물이 유명한 런던의 안개를 만들었다…

금속조립도 향상되었다. 태양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교회의 종소리가 농민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교회의 종들은 항상 수요가 많았다… 발트해의 뤼베크에는 종 주물공의 거리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분명히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종 주조는 인정받는 명예로운 기술이었으며 수요가 워낙 많아서 많은 전문가들이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그들의 작업을 수행했다.


새로운 수요와 요구

막대한 자본 지출을 필요로 하는 많은 수의 대성당들에 의하여 증명되듯이 부의 커다란 증가는 새로운 요구와 수요를 만들었다…



VI. 중세와 문예부흥기의 연금사와 자연철학자


베이컨

프란체스코회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은 그의 선구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보베의 뱅상과는 달리 그는 저술가이고 연금술의 대중 보급가였을 뿐 아니라 실험가였다… 그는 화약에 대하여 기술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그것은 확실히 공상의 날개만은 아니었다.


화약

1240년에 베이컨은 최초로 화약을 언급했고 1324년에 혹은 그전에 발명을 좋아하는 유럽인들은 폭발력이 발사체를 추진하도록 밀폐된 공간에 가루를 넣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은 총과 대포를 발명했다… 1480년에는 화약이 알프스 산맥에서 도로건설에 이용되었다… 1350년부터는 화약의 보유없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유럽의 지배자는 없었으며 이것은 또 황과 초석의 보유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금술에 적대적인 교회와 왕도 화약을 제조할 수 있는 연금사들을 환영하고 보호했다.



VII. 중세와 문예부흥기의 의학 및 의료 연금술


화학의 발달에 있어 의사들과 의료 연금사들의 공헌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다… 최소한 18세기 말까지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화학 발명은 의사들의 업적이었다… 의사들의 공헌보다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의료 연금사들의 공헌이었다…


중세의 치료법

… 공감주술의 기원은… 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감주술은 중세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암cancer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게crab에서 왔는데, 만약 사람에게 종양이 생기면 종양이나 아픈 장소에 게를 묶어서 죽였다… 본질적으로 민간 치료사의 환자는 병 때문에 죽었고 의사의 환자는 치료 때문에 죽었다.


의학적 문제

중세에 당면했던 의학적 문제는 어마어마했다. 혼잡하고 비위생적이며 해충에 시달리는 상황 그리고 오염된 음식과 물은 평균 예상 수명을 낮췄다. 예방 약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위생은 원시적이었다. 왕과 왕비는 이에 의하여 전염되는 티푸스 때문에, 벼룩에 의하여 전염되는 선 페스트 때문에 죽었으며; 심지어는 왕에게도 이와 벼룩이 있었다. 영양이 적절한 사람은 드물었다. 여성들은 칼슘의 결핍 때문에 대충 어린애 하나마다 치아를 하나씩 잃었다… 많은 여성들이 35세 이상 살지 못했는데 특히 출산 과정에서 많이 죽었으며, 기진맥진하여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이가 없는 노파가 되었다.

고대와 중세에서 그리고 19세기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림 혹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죽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상처보다는 이질 때문에 더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 충양돌기염, 유양돌기염, 위궤양 및 전립선염 같은 내부기관들의 병은 거의 틀림없이 치사했다. 마취를 하지 못하여 내장 수술 도중에 환자들은 흔히 외과적인 쇼크에 의하여 죽었다… 사람들은 암 및 심장과 순환계 질병으로 명만큼 살지 못했다…


프란치스코회의 의술

그들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한 수단으로서 치료제의 목록에 알코올을 추가했다…


화학요법

약 50년 후 프란치스코회원이며… 루페시사의 존이 베이컨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벽돌, 배설물 및 오줌 같은 모든 종류의 광물질과 유기 물질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산과 알칼리로 처리하고, 굽고, 부수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들과 혼합하고, 마지막으로 그 혼합물 쓰레기더미를 증류하거나 승화시켰다… 얻어진 물질들은 즉시 치료제로서 효험이 시험되어졌고 많은 것들은 효과적이라고 판명되었다. 증류된 오줌으로부터 얻은 암모니아는 표준 약품이 되었다. 안티몬 화합물도 마찬가지였다…

1245년에 교황은 프란치스코회원 조반니 카르피니Giovanni Carpini를 몽고의 대사로 보냈다. 보통 프란치스코회원 성직자 대사들이 뒤를 이었으며 몽고(원) 왕조가 1367년에 망할 때까지 중국 황실에 정기적인 기독교 배알이 있었다. 더욱이 13세기 내내 지중해의 항구에서 상인들은 1218년부터 몽고의 일한국에 의하여 지배된 페르시아와 활발하게 무역했다…


화학적 약품

연금술적으로 조제된 약품들의 진보는 연금사에게 커다란 기회와 무서운 문제를 동시에 주었다… 반면에 연금술 약품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은 위험한 사업이었다… 환자들에게 준 일부 물질은 그들을 신속하고 극적으로 치료했다. 다른 것들은 겉으로는 치료제와 매우 유사했지만 그들을 죽였다… 비소화함물은 독이지만 안티몬이나 비스무트 화합물은 치료제가 될 수 있었다… 비스무트나 안티몬 약품들은 흔히 치명적인 양의 비소가 오염되어 있었다… 모든 화학물질에 대하여 분석적 분리와 정제가 이뤄져야만 했고 물리 및 화학적 성질을 확인하는 목록들이 만들어져야만 했다. 의료 연금사들은 분석 화학자들이 되어야만 했으며 16세기에는 이미 되어 있었다… 화학물질과 화학과정에 대한 실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수십 가지 화학물질에 대한 성질과 수백 가지 반응의 경로를 알아냈다. 반응 혼합물들을 성분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출발 물질들 중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질이 어떤 비로든지 결합할 수 있다고 가정한 그리스인들이 옳지 않았다. 그들은 또 순수한 물질들의 성질은 보통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원소들이 서로 왔다갔다하며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실제로 그들은 물질을 확인하는 화학과 물리적 성질에 관하여 명쾌한 답을 알아냈다. 마침내 치료 화학자들은 정제된 화학 물질로 화학 반응을 수행했다… 서기 1500년경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호학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4원소설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대신할 것을 찾지 못했다…


파라셀수스

… 그는 스위스인으로서 1493년에 태어나 1541년에 죽었다…

19세기에 미국의 크로퍼드Crawford와 모튼Morton이 마취제로서 에테르를 사용하기 300년 전에 그는 동물실험에 에테르의 효과를 실험했다. 그는 보통은 증류에 의하여 행해지는 약품들의 정제를 강조했다. 그는 복용량을 조절하는데 조심스러웠으며 심지어 독약도 소량만 복용한다면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신체의 저항성이 질병을 극복하거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외과의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연이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그것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질병들이 서로 각각 다르며 단지 ‘특이한specific’ 약품에 의해서만 치료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특이성들, 특히 단지 한 가지의 성분만을 포함하는 것들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느 것이 효과적인지, 비효과적인지 또는 해로운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그 결과 그들의 치료 속도는 정통적 갈레노스식 의사보다 휠씬 높았다…

… 그것은 페스트, 매독, 천연두 및 다른 질병들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질병은 단순한 육체적 조건이 아니라 어떤 나쁜 작인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침입이었다. 그는 실제적인 연금사였기 때문에 식물은 물론 금속도 씨로부터 자란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그는 질병도 씨로부터 자랄 것임에 틀림없다고 추론했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사상을 무어인들로부터 얻은 것 같다… 대부분의 그의 치료약은 시행착오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그것들이 효과적이라고 밝혀지면 정당화 작업이 수행되었다. 예를 들면, 빈혈은 철의 염들을 함유하는 식이요법에 반응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혈액이 화성의 색과 똑같은 붉은색이고 화성은 그것으로부터 병기들이 만들어지는 철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뒤이어서 혈색이 좋지 않은 혈액은 철의 결핍으로부터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의 의료물질materia medica은 천문학(그 당시에는 점성술도 동시에 의미하는)에 기초를 두었다… 간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목성과 관계되는 광물이나 식물을 찾았다…파라셀수스는 연금술을 천연의 가공되지 않은 물질들을 가공된 생성물로 변환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요리사, 제과공, 방직공 및 약제사 등이 모두 연금사들이었고 그는 그들이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만큼 충분히 연금술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갈레노스식 치료에 대한 파라셀수스의 맹렬한 공격은 서민들과 심지어는 일부 의사들도 고전의학에 대하여 확신을 잃고 있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질병은 외부의 원인이 있다는 파라셀수스의 이론은 의료 치료를 훨씬 더 합리적인 기초 위에 올려 놓았다. 이제 의사들은 원인과 효과 관계의 연구를 시작했다… 강력하고 잠재적으로 독성이 있는 약품들을 투여하는 파라셀수스의 추종자들인 치료 화학 의사들은 물질의 순도와 정량적 조성에 주의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신속한 화학분석의 진보를 이룩했다. 파라셀수스는 물질을 다루는 모든 기술은 연금술 영역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이 사상은 비누를 만드는 기능공들이 야금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했으며 이것은 화학적 지식이 기능 종류간의 장벽을 가로질러서 퍼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속박적이고 부자유스러운 권위에 대항하여 반발한 최초의 위대한 연금사였다… 1661년에 부유한 귀족인 로버트 보일은 자기 자신을 ‘회의론적 화학자skeptical chymist’라 부르곤 했다.



VIII. 지식의 폭발


1447년에 마인츠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소가 설립된 후 50년 동안에 4만 종의 책이 약 800만 부가 간행되었다… 시초부터 인쇄는 비교적 대규모 사업이었다. 1450년대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는 약 25명의 직원이 있었다. 1500년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의 뉘른베르크 인쇄소에는 인쇄기 36대에 직원이 100명이었다…


초기의 과학 서적

… 기능공들은 과학 지식에 친숙해지기 시작했고 실제적 기술에 대한 책들도 나타났다. 이러한 것들은 광업, 야금, 유리 제조 및 이와 유사한 것들에 대한 실용서였다. 최초로 서로 다른 기술의 기능공들이 그들의 여러 가지 과정에서 기본적인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은 산재된 기술들을 통일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책들을 읽는 과학자들은 실제적인 기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과학적 방법을 기술적 문제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화학물질에 관한 최초의 책들은 광부, 대장장이, 분석가 및 의사 등을 위한 것들이었다. 광산이나 광산 근처의 제련소에 자리잡은 분석가들은 여러 가지 금속 특히 금, 은 및 구리에 대하여 광석들이 가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암석 표본들을 분석했다. 상업 중심지와 화폐 주조소에서 그것들은 분리/정제되어 금과 은으로 나뉘어졌다. 분석가들이 동전과 보석의 금, 은의 백분율을 조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함량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나오기 수백 년 전에 분석가들은 집어 넣은 것만큼 나올 것이다는 사상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을 신뢰했다… 그들의 방법과 물질은 후에 화학의 모든 분야에 응용되지만 19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분석가들은 이론에는 거의 주의하지 않았다.


광부들을 위한 서적

1500년경 독일의 광산지역에서는… 광산 지질학에 대한 최초의 책인 <채광에 대한 유용한 소책자Ein Nutzliches Bergbuchlein>는 1505년에 루라인 폰 칼베(Ruhlein von Kalbe, -1523)가 저술한 것이다. <분석에 관한 소책자Probierbuchelin>는 분석에 대한 명확하고 정확한 지식을 싣고 있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유명한 광산 기술자인 허버트 크락 후버Herbert Clark Hoover는 1912년에, 원자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면 20세기의 건식분석은 15세기의 <분석에 관한 소책자>와 아주 똑같다고 기술했다…


야금가들을 위한 저서

화학과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발간된 그 다음의 중요한 책은 바노치오 비링구치오(Vanoccio Biringuccio, 1480-1538)가 지은 실제적 야금술의 교과서인 <열 기술에 대하여De La Pirotechnia>였는데 이것은 1544년에 발간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졌으며 학자보다는 실제적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비링구치오는 이론에는 거의 흥미가 없었지만 야금, 대포 주조 및 화약 제조에 숙달되어 있었고 돈의 위조에도 숙달되어 있었다. 그의 책은 야금의 전분야를 다루었으며 또 그것 자체를 꽃불과 화약, 명반과 다른 유용한 염들의 제조, 증류, 물이 존재하는 유리 종 안에서 황을 태우는 황산의 제조(연실법의 시작), 금박의 제조, 철사 뽑기 및 도기 제조에 응용했다. 그는 또 광산에서 버린 광석들의 재가공방법에 대하여도 언급했다… 그의 대표적인 관찰은 불 속에서 납이 가열되면 약 8퍼센트 가량 무게가 증가한다는 보고였다(그것은 산소와 결합한다). ‘불의 본성은 물질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소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세적 기준 체계로서의 반응은 이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 보고서는 라부아지에의 업적의 핵심인 중요하고 이상한 현상을 최초로 글로써 언급한 것이었다.


16세기의 고전

가장 영향력있는 <금속성 사물에 관하여De Re Metallica>는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Georgius Agricola; 게오르그 바우어, Georg Bauer, 1494-1555)가 1550년에 저술했지만 1555년이 지나서 출판되었다…

1574년에 분석가 라차루스 에르커Lazarus Ercker는 또 다른 실제적인 편람인 <귀중한 광물의 광석과 채광Beschreibung Allerfurnemisten Mineralischen Ertzt und Berckwercks Arten>을 발간했다. 그는 근원을 아그리콜라에 두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채광은 생략하고 분석에 집중했다. 에르커의 책은 17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그 과목의 기본 교과서로 쓰였다… “그것을 칭찬하기 전에 시험하라”를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의료 연금술도 16세기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의사들은 연금술 과정에 아주 열중하고 있었다. 본명이 아마 제롬 살레르Jerome Saler인 히에로뉴무스 브룬쉬비히(Hieronymous Brunschwig, 1430-1512)는 외과술에 대하여 저술한 의사였으며 그 자신을 루페시사의 존의 추종라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한 그는 증류에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1500년에 <증류책Distillierbuch>과 1512년에 <증류 기술의 책Liber de Arte Distillandi>의 두 가지의 영향력 있는 입문서를 저술했다. 그의 목적은 어떻게 활성이 있는 의료 원소를 그가 활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잔류물로부터 분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들은 최소한 14판까지 이르렀으며 틀림없이 파라셀수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83-1552)는 의사, 천문학자 겸 시인이었다… 그의 한 시에서 시필로라는 한 양치기가 성병에 걸렸다. 하여튼 양치기shepherd로부터… 오늘날의 매독syphilis가 되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에 영향을 받은 프라카스토로는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의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닌 자연철학의 진지한 책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문예부흥기 학자였다. 1546년에 그는 <접촉 전염병에 관하여De Contagione>라는 책에서 공기 중에서 운반되는 질병의 ‘씨’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질병을 전파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그의 질병의 씨는 아마 루크레티우스의 질병의 씨semina morbi였을 것이다)… 호감과 반감의 사상은 이미 2000년 가량 된 것으로서 기원전 5세기의 엠페도클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8 세기까지 지속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녹인다”라는 격언으로 용해도를 설명한다.


팔리시의 저서

… 프랑스인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 1510-1589)… 는 사람들의 마음을 실험과 생산활동에 이용하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 포르타(Porta, 1538-1615)에 의하여 저술된 <자연의 마술Magiae Naturalis>은 1558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독약과 해독제에 관한 절을 포함하고 있다… 1612년에 안토니오 네리Antonio Neri에 의하여 발간된 <유리 제조의 기술L’Arte Vetraria>은 유리 제조에 관한 최초의 입문서였다…


16세기의 과학 사회

치료화학자들이 생산하여 심지어는 약품으로도 사용한 많은 수의 무기 고체들은 연금술이나 치료 화학의 개념 구조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치료 화학자들은 그들의 증류된 정수들이 대개 아무런 치료 효과도 없는 물과 산이고 반면에 불활성이라 가정한 잔류물들이 강력한 치료약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이 예상한 것의 정반대였다. 갈레노스식 의사들로부터의 반대와 더불어 치료 화학자들은 이제 그들의 새로운 발견이 바로 그들 이론의 기초에 모순된다는 사실과 싸워야 했다.


리바비우스

이 시대에 실제로는 앤드루 리바우(Andrew Libau, 1545-1616)인 안드레이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 그가 파라셀수스의 화학물질과 방법을 사용했지만 증류물이 아닌 잔류물을 강조했다는 것이며, 그는 그렇게 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화학은 단순한 치료 화학이 아니었으며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의학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학과 겹치는 독립된 학문이었다.

1597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주요한 업적인 <연금술Alchemia>이라는 책은 그 당시 화학 지식의 광범위한 개관이었다… 그는 그의 책과 화학의 분야를 조작의 방법으로 구성된 Encheria와 화학물질과 그것들의 성질의 기술인 Chymia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연금술>이 출간된 지 12년만에 화학이 정식 교육으로서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의화학자들을 위한 서적

1600년에는 의화학자 또는 치료 화학자는 더 이상 현자의 돌이나 영생불사약을 추구하거나 마술력을 가진 정령이나 정수를 찾는 연금사가 아니었다… 1608년 이러한 지도서들 가운데 최초인 <화학의 구조>가 의사인 크롤에 의하여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 베갱의 책의 대중성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1620년경 죽은 베갱은… 1610년에 처음 간행된 그의 책 <초보자를 위한 화학Tyrocinium Chymicum>에서… 그는 화학을 증류, 용액 및 엉김(또는 침전) 같은 조작적 기초 위에 조직화했다. 그의 책은 따라 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쓰여진 처방들의 모음이다…



IX. 평가 기준계의 변화 : 과학체제의 침식


서유럽의 지식 세계는 폐쇄된 체계였다… 파리 고등법원은 1624년에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되는 어떤 교리도 가지거나 가르쳐서는 안 되며…… 사형에 처한다”고 결정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기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1600년에 로마에서 화형 당했다… 프로테스탄트들도 반대자들을 박해했다. 장 칼뱅Jean Calvin은 철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를 1553년에 제네바에서 화형시켰다.

역설적으로 그리스의 과학적 권위에 대한 최초이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격은 교회의 내부로부터 가해졌다. 코페르니쿠스… 그의 정통성과 교회에 대한 헌신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이론은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의 임종때에야 발표되었으며, 서문을 쓴 오시안더Osiander는 그 업적이 물리적 의미가 없는 수학적 허구로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거부의 진술을 끼워넣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꼈다…


코페르니쿠스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왜 그의 사상이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로 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정확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여호수아는 지구가 아닌 태양에게 가만히 멈추라고 명령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완전히 배격하는 것이었다…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지며 그래서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는데… 사과는 태양 쪽인 위로 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1세기만 먼저 태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믿었다면 그는 결코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1572년에 하늘에 갑자기 새롭고 매우 밝은 별(신성)이 나타났으며 2년 이상 보이다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단지 3년 후인 1577년에 혜성이 나타나서 위층의 천구들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이 시점에서 일부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대하여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케플러

… 독일인인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수학의 천재였으며 신비주의자였다… 덴마크인 튜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가 그에게 남겨준 자료들을 가지고 일했다…  그것은 거의 30년이 걸렸으며 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옳지 않으며 심지어는 코페르니쿠스도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구와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움직이지만 궤도는 원이 아니라 타원이었다.

케플러의 발견은… 프톨레마이오스파와 코페르니쿠스파 천문학자들 모두에게 거부당했다. 심지어 그의 친구인 갈릴레이도 타원 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케플러의 새로운 체계는 항해가들에게 꼭 필요한 한 벌의 천문학 표를 계산하는 데 이용되었다. 1627년에 발표된 그것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2세가 케플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돈을 조금이라도 줄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에서 그에게 헌정되었다. 루돌프 표는 매우 정확해서 전유럽에서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그것들의 이론적 기초를 배척하고 아직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집착하는 사람들까지도 사용했다. 그것들은 단순히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유용했으며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케플러 체계는 꾸준히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었다.


그리스 과학에 대한 다른 공격

갈레노스도 역시 공격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발간된 것과 같은 해인 1543년에 플랑드르의 해부학자인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가 해부학과 생리학에서 실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 신체의 조직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라는 인간 해부학에 관한 주목할 만한 책을 간행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Lord Verulam, 1561-1626)… 은 기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의 개념, 그리스 과학의 방법 및 고대 그리스 과학의 목적과 목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영국인들은 그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664년에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장관이었던 콜베르J. B. Colbert는 베이컨에 의하여 제안된 것과 유사한 방침을 따라서 파리 과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가설과 이론은 실험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 철학의 목적과 방법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1643년에 갈릴레이의 조수였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진공에 기초한 수은 기압계를 발명했다. 1656년에 오토 폰 구에리케Otto von Guericke는 공기 펌프(진공펌프의 원형)를 발명하여 진공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유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대하고 폭넓게 대중화된 증명에 이용했다(… 폰 구에리케의 증명은 50년 안에 광산의 물을 퍼내기 위한 증기기관을 가져왔다. 우연하게도 토리첼리의 업적은 홍수진 광산의 물을 퍼내는 데 투스카니의 알크두크가 갈릴레이에게 조언을 요청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척하던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4)는 이미 그 전에 과학을 위한 새로운 수학적 방법과 물리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안했다.

17세기 말에 과학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변화했다. 권력자들은 과학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700년에 프러시아 정부에 의하여 ‘베를린 학회’가 설립되고 러시아 정부는 1724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회’를 세웠다…



X. 최초의 화학자들 : 살라, 반 헬몬트, 보일


16세기와 17세기를 통하여 코페르니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파라셀수스와 베살리우스가 갈레노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동안에 자연철학에서 새로운 관점: 즉 화학자의 관점이 조용히 나타났다. 수백 년 동안 의료 연금사, 치료 화학자 및 분석가들은 새로운 화학물질을 분리하고 정제하고 특성을 조사하여 새로운 반응을 발견했다…


베갱의 절충

… 장 베갱(Jean Beguin, 1550-1620)… 그는 중세의 선구자들에게 알려진 벤조산, 아세톤 및 황산암모늄 같은 물질을 다루면서 구체계에는 들어맞을 수 없는 수십 가지의 사실과 관찰을 알고 있는 대표적인 실험기술 전문가였다… 1612년에 그는 화학물질은 네 가지 원소나 세 가지 원소가 아닌 화학물질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도달했던 것 같다…

베갱의 용어로 표현된 반응은 다음과 같다.

휘안광 + 부식성 승화물 —> 안티몬 버터 + 진사

우리의 기호로는 다음과 같다.

Sb..S… + 3HgCl.. —> 2SbCl… + 3HgS

그는 화학물질이 결합하면 그것들은 개개의 본질을 잃지 않고 화합물 안에서 계속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갱은 오늘날 우리가 이중 분해 또는 이중 치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 기술하고 올바른 설명을 했다…


원자 사상의 부활

… 중세 시대 동안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해설하는 루크레티우스의 기원전 57년의 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그것에 대한 참고문헌과 그것을 인용한 약간의 인용문으로부터 알려졌다… 그후 1417년 고전 문화의 부활기 동안에 완전한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1473년에 인쇄되었고 사태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인본주의자들만이 주목했지만, 특히 치료화학자들과 아랍의 원자론자들의 업적을 알고 있던 철학자들에게는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상이 점점 더 마음을 끌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되었다. 1600년에는 이미 모든 주요한 유럽언어로 약 30판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 기본적 사상-원자라는 말-이 현대 과학 안으로 넘겨졌다.

최초로 부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화학이론의 거부와 원자 사상의 수용은… 수학자이며 의사인 기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 1501-1576)였다. 1556년경 그는 불이 원소가 아니라고 결정하고 약 50년 전에 베이컨이 예상한 대로 그는 불이 원자운동의 한 방식이라고 서술했다. 원자론적 관점은 신속하게 전파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장 보댕(Jean Bodin, 1520-1596)은 1596년에 간행된 책에서 화학물질로서의 원자에 대하여 서술했다. 수용된 이론에 대한 그 이상의 변형은 네덜란드의 학생인 다비트 반 굴레(David van Goorle, 1502-1612)로부터 얻어졌다. 그가 뜻밖에 죽은 후 곧 간행된 책에서 그는 불이나 공기는 원소가 아니며 물과 흙은 원자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제안했다.

1620년경에 프랑스 의사인 세바스찬 바소Sebastian Basso는 모든 물질이 특성을 지닌 작은 입자나 원자로 이루어지고, 원자 각각은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며 다른 어떤 종류의 입자와도 같지 않다는 또 다른 원자설을 제안했다… 1619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의학 교수인 다니엘 세네르트(Daniel Sennert, 1572-1637)는… 연소의 원소인 철학적 황에 대하여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606년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동시대인 하펠리우스(Hapelius, 1559-1626)가 먼저 플로지스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프란시스 베이컨은… 1605년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썼다…

처음에는 부활된 원자론에 지지자가 거의 없었다… 원자의 초기의 언급은 약 1550년에서부터 1625년까지 이어졌는데, 이것은 원자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학의 첫 출발의 시점을 16세기의 마지막 몇 년으로 정한다.


살라

화학자적 접근방법의 최초의 분명한 출현은 위대하지만 거의 잊혀진 안젤로 살라(Angelo Sala, 1571-1637)에 의하여 1617년부터 1618년 사이에 간행된 책으로부터 얻어졌다… 이러한 결과는 철-구리 황산염 반응은 실제로 변환이 아닌 단지 평범한 화학반응이며, 구리가 흙이나 물이 아닌 구리로서 청색 황산염 용액에 존재했다는 것을 가리켰다…

1617년에 그의 책 <황산염의 해부Anatomia Vitrioli> 제3판에서… 그는 화학물질의 구조에 대한 이론을 시험하도록 설계된 일련의 조작을 계획하고 수행했다… 그는 원래의 구리를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실험 오차 범위 안에서 회수된 구리는 그가 처음 시작한 것과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반 헬몬트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1577-1644)… 창세기에서 물은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고 불은 언급되지 않았다… 물과 공기는 유일한 원소였고 어느 것도 나머지 다른 것으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공기는 화학 반응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액체와 고체는 물로부터 만들어져야만 했다(이것은 또 다른 기독교 이전의 이론, 즉 탈레스 것의 변형이다). 반 헬몬트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증명한 대로 흙은 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원소가 아니었다. 그는 한 버드나무 묘목의 무게를 측정하여 그것을 200파운드의 흙과 함께 통 속에 넣고 5년 동안 물을 주었다… 흙의 무게는 똑같이 남아 있었다… (이 실험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holaus Cusanus, 1401-1464)가 제안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무 무게의 증가의 실제 원천은 그 자신이 발견한 기체의 하나인 이산화탄소였다… 실로 반 헬몬트볻가 약 3000년 전에 아시리아인들은 식초가 석회석으로부터 거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고 했다… 기체의 기포를 알고 있던 수천의 화학자들과 연금사들은 그것들에 전혀 주의하지 않았다.

반 헬몬트 이전에는 그러한 기포들은 흥분을 일으킬 것이 전혀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반응에서 기체들은 분명히 과도한 공기였다… 그러나 반 헬몬트는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고체와 액체는 흙, 공기, 불 및 물이 아니라 변형된 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산에 금속들이 녹을 때 그가 관찰한 기포들은 그에게 진짜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들이 실제로 기체라면 그리스인들이 옳고 그가 옳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옳다는 것은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공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포에 관한 연구를 해야만 했다… 그는 그것들이 공기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액체와 고체가 실제로 어떠한 공기도 없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포들이 설명되어져야만 했다… 기포들은 단순히 물의 한 형태라고 결정했다. 보통의 물과 기포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그는 그것들을 기체(gas)라고 이름지었는데 아마도 1세기 전에 파라셀수스가 사용한 그리스어 혼돈(chaos)으로부터 가져왔을 것이다…

어쨌든 반 헬몬트는 그의 gas들이 보통의 공기가 아니며 실제로 대기의 공기는 gas의 혼합물 그 자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대기가 부분적 진공이며 연기화 불은 비어있는 공간 안으로 올라가서 흩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더욱이 물 위에 거꾸로 세워진 유리컵 안에서 양초가 타면 타고 있는 양초가 공기로부터 무언가를 없애기 때문에 유리컵 안의 물이 올라간다… 그는 이 gas들을 유리하려고 시도했지만 항상 그의 받는 그릇이 폭발하고 그는 순수한 gas들을 결코 얻지 못했다… 원자론자로서 그는 기체들이 개개의 작은 원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확신했다.

… 어떻게 고체 물질 혹은 ‘흙’이 물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그가 만든 용어인 ‘발효체’라는 무형의 존재를 가정했다… 발효체는 우리의 효소와 유사하며, 반 헬몬트의 생리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동시대인이나 바로 뒤의 계승자들보다 진보되어 있었다…


치료화학자들의 다음 세대

드라보

… 프란시스커스 드라보(Franciscus de la Boe, 1614-1672)는 반 헬몬트의 생리학을 찬성하고 확장시켰다. 그는 실비우스Sylvius라고도 불렸지만 원래는 평범한 프랑수아 듀부아Francois Dubois란 이름을 가졌었다. 그는 발효체와 아르케우스를 배척했지만 신체적 기능들이 여러 가지 체액의 산 또는 알칼리성 특성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상은 유지했다… 이러한 사색적 사상은 우리에게는 좀 소박하게 생각되지만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에너지가 어떻게 해서든지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부터 온다는 인식이었다…


보일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6-1691)은… 화학조성과 반응의 문제에 많은 생각과 노력을 바쳤고 전의 이론들이 한결같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일은 목재가 탈 때 불꽃, 연기, 물 및 재 등을 생성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목재가 불, 공기, 물 및 흙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보일은 두 화학물질이 결합하여 화합물을 만들 수 있고, 살라의 실험에서처럼 화학적 방법에 의하여 화합물로부터 회수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은 화합물에서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선언했다…

보일은 반 헬몬트를 크게 존경했지만 그의 이론은 배척했다… 그는 항아리의 나무를 가지고 반 헬몬트의 실험을 반복하여 거의 똑같은 결과를 얻었지만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또 끓어서 없어지는 것을 보충하면서 물을 플라스크 안에서 수일 동안 끓여 마침내 플라스크 바닥의 침전을 발견하고… 그는 그 실험이 반복되어야 하며 이번에는 오랜 시간 동안 끓이기 전과 후의 유리의 무게를 측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1세기 후에 라부아지에가 한 것이며… 보일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견하는 동안에 그는 또 기체의 부피가 온도가 증가함에 따라서 증가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것은 샤를의 법칙의 기초이지만…

실비우스는 신체의 열이 산-알칼리 반응으로부터 온다고 제안했었다. 보일은 일부 산-알칼리 반응은 기포를 생성하지 않으며 열도 거의 생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열과 거품을 생성하는 일부 반응은 산-알칼리 반응이 아니다라는 것을 지적해서 그 사상을 무너뜨렸다…

그는 물질로서가 아닌 원소로서의 불을 부정했다. 그는 그것이 질량은 갖지만 유리를 통과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아주 포착하기 힘든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에서 그는 유리를 통과할 수 있고 그와 뉴턴이 질량을 가진 미립자로 구성되었다고 믿은 빛의 성질에 비유해서 대부분 추론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보일과 같은 예리한 관찰자가 그의 실험에서 공기가 한 역할에 대하여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브래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대기압에 대한 유명한 실험으로부터 그는 1648년에 공기가 무게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고 라부아지에가 100년 후 실험을 반복했을 때 한 방법대로 그는 마개를 열기 전과 후의 플라스크의 무게를 쉽게 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공 펌프를 가지고 금속이 진공에서 가열되도록 그는 플라스크를 봉하기 전에 진공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열산화가 연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보일에게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일은 공기가 가열산화에 관여되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한 일도 없었다… 외관상으로는 가열산화와 연소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었다(단지 두 세대 후에 스탈은 가열산화가 느린 연소라는 것을 알았다)… 무게의 증가는 불로부터 온다.


연소의 문제

다른 사람들도 연소의 본질을 연구하고 있었으며, 다음 100년 동안 그것은 제일 중요한 이론적 주제가 되었다. 진공 펌프의 개발과 함께 연소는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인식되었다. 타는 물질은 분명히 공기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의 이론은 연소를 어떤 것, 즉 불의 손실로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불의 손실이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1661년과 1674년 사이에 한때 보일의 조수였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연소와 호흡에 관한 일련의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물질을 물이 존재하는 닫힌 용기 안에서 태웠으며 연소가 멈췄을 때 그것의 부피의 감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처럼 상당한 양의 공기가 소모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 양초가 더 이상 탈 수 없는 대기에서도 병아리는 살 수 있었지만 닫힌 용기 안에 보관한 동물과 새는 공기가 소모되면 죽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훅은 마침내 공기가 연소와 호흡 모두에 필수적인 초석(질산나트륨)과 같은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보일은 연소에 관한 훅의 실험을 반복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을 없애고 했다… 전도유망한 생애가 단명으로 끝난 존 메이오(John Mayow, 1643-1679)는 1674년에 초석과 연소 가능한 물질의 혼합물이 진공 중에서도 타기 때문에 초석은 연소와 호흡에 필수적이다고 제안했다. 그러므로 공기는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작은 입자들인 ‘질소-공기 정령‘을 함유한다. 이것은 산소 이론과 가깝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메이오에게 있어서 연소에 필요한 성분은 공기의 일부분은 아니었지만 공기 속에 있는 무엇이었다…


보일의 원소 개념

보일은 화학물질의 입자는 공기 중에 분산될 수 있지만 공기는 실제로 천연 화학물질이 아니라는 17세기의 대표적인 관점과 함께 성장했다… 보일은 기본 물질은 각각 그 자신의 모양과 크기를 가진 여러 가지 미립자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근본 천연물(prima naturalis) 이라고 불렀다…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로 분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원소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는 그리스의 이론을 논박했지만 보일은 여전히 얼마간의 그리스의 개념적 골격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는 화학물질이 원소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 불행하게도 주로 그가 화학반응들에서 기체들이 하는 역할을 몰랐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반응에서

석회석 —> 생석회 + 이산화탄소 기체

보일은 이산화탄소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반응의 과정에서 질량이 파괴되었다고 믿었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가열산화에서는

구리 + 공기 —> 구리 가열산화물

구리 가열산화물은 공기로부터 보이지 않는 기체인 산소를 결합하므로 원래의 구리보다 더 무거워진다. 산소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17세기의 화학자에게는 이 반응의 과정에서 질량이 창조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보일이 물질은 불멸이며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하더라도 그는 질량(보일에게는 무게)이 보존되고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XI. 플로지스톤 : 구식 이론들의 최후

 

18세기가 시작될 때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화학 공업이 성장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화학 생성물은 ‘자체 소비용’이었기 때문에 생산량의 수치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철강회사들이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코크스를 생산하는 것처럼 생산된 화학물질들은 상업용이 아닌 생산자의 조작 과정에서 소비되었다…


새로운 수요, 새로운 공업

… 직물 공업의 확장으로, 또 높아진 개인 위생의 청결 의식 때문에 비누의 수요가 증가했다. 많은 양의 알칼리가 비누와 창유리, 렌즈, 병(특히 포도주용), 접시 및 술잔 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유리 공업에 필요했다. 도자기의 생산은 화학자들이 출발 물질들의 선택을 감독하고 새로운 색과 광택을 개발하면서 양적으로 증가되었고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더 큰 선박과 오랜 항해는 향상된 칠과 와니스, 타르, 녹 방지제 및 코킹(누출 방지용 자재)을 필요로 하였다. 농업 화학 공업의 출현은 일부 화학비료와 토양을 처리하기 위한 화학물질들을 생산하는 출발이었다.

주석판 요리도구, 접시류, 얕은 접시류, 단추류 및 죔쇠 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들은 철 제품을 제작하여 그것을 녹아있는 주석에 담그면 주석의 표피층 또는 ‘도금’이 되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은 철의 표면이 조심스럽게 청소되고 모든 녹과 박편이 제거되지 않으면 주석이 철에 부착되지 않거나 쉽게 벗겨져버리기 때문에 다루기 힘든 것이었다. 표면을 청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무기산과 함께 ‘절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량의 산이 주석 도금 공업에 사용되었다. 산은 또 귀금속을 분석하는 데도 필요했다… 산의 주요한 용도는 직물들을 표백하는 것이었다… 세기의 말경에 그 문제는 표백제로서 염소수를 사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직업병 및 환경 파괴와 함께 유용한 많은 양의 화학 부산물들을 만들어냈다.


플로지스톤설

… 요한 베허(Johann Becher, 1635-1682)는 마인츠의 의학 교수였으며 바이에른의 선거후의 궁정의사였다. 1669년에 그는… 5원소설을 제안했다… 실제로 베허의 이론은 이 시기에 이미 서구에 잘 알려진 중국의 5원소설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독일의 할레 대학교의 의학교수였던 게오르크 에르네스트 슈탈(Georg Ernest Stahl, 1666-1734)은 프러시아 왕의 궁정의사였다. 그는 베허의 가연성 기름진 흙의 이름을 제2의 흙 또는 기름진 흙에서 하펠리우스와 세네르트가 이미 사용한 이름인 플로지스톤으로 바꾸었다…

연소는 항상 무엇인가를 잃는 분해로서 생각되어 왔었다. 슈탈은 이제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손실되는 것이 플로지스톤이다… 가열산화와 제련은 단지 가역적인 플로지스톤의 왔다갔다하는 전달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가열산화가 단순히 금속의 느린 연소이다라는 사실의 최초의 인식이었다.

슈탈에 의하여 명확하게 표현된 대로 플로지스톤설은 성공이었다. 베허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플로지스톤은 파라셀수스의 철학적 황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것은 옛 이론에 길들여진 보수주의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더욱이 화학자들은 그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연관된 현상들인 제련, 가열산화, 연소, 석회 가열 및 알칼리성에 관련된 상식적 설명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론의 단점

… 이론적으로 코크스와 숯은 태워지면 약간의 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의 순수한 플로지스톤이어야 했다. 그러나 코크스와 숯은 분명히 알칼리성이 아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들은 플로지스톤의 무게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이것들은 그렇게 쉽게 설명될 수 없었다… 하나는 더 무겁고 다른 하나는 더 가벼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플로지스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라부아지에와 돌턴의 결정적인 업적은 기체들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였고 이것은 결코 플로지스톤설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실제로 블랙과 프리스틀리는 플로지스톤을 믿는 동안에 그들 나름의 발견들을 했다. 캐빈디시와 셸레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는 라부아지에도 그러했다. 어찌 되었든 플로지스톤설은 옳지 않다고 판명되었지만 중요한 발견들을 가져온 실험들을 시사했으며 더 나아가서 통일된 골격구조를 제공했다.


블랙

플로지스톤에 대한 첫 공격은 위대한 조지프 블랙(Joseph Black, 1728-1791)에 의하여 우연하게 가해졌는데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해부학과 화학을 가르치던 의사였으며 후에 에든버러 대학교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석회의 반응

블랙의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석회의 반응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외워둬야만 한다…


마그네시아 알바의 성질

블랙은 마그네시아의 의학적 성질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곧 그것이 신장 결석을 녹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매우 좋은 하제임을 발견했다(20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구연산의 마그네슘 염과 마그네시아 우유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완하제다)…

커다란 질량의 감소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마그네시아가 가열되었을 때 플로지스톤을 얻는 것 이외에 아마도 그것이 다른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그는 기체의 무게를 측정하는 일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가두어서 무게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블랙은 기체의 무게를 결정하는 간접적 방법이 갑자기 떠올랐다…


블랙의 결론

블랙의 실험은 이제 완결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2. 이러한 물질들이 강하게 가열되면 그것들은 플로지스톤을 흡수하지 않고 단지 고정된 공기(이산화탄소)를 잃는다. 3… 4… 5… 6… 7…

블랙의 업적이 발표되었을 때… 첫째로 그는 질량 보존의 사상을 입증했다… 둘째로 화학반응에 의하여 표시되는 것과 같이 화학물질의 존재에 의하여 새로운 부류의 물질들이 발견되고 정의되었다… 셋째로 그 반응기구는 플로지스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블랙은 기체들의 과학 세계에 초점을 맞췄다. 2000년 동안 기체들은 처음에는 공기라고 생각되었으며 그 후 변형된 공기 또는 변형된 물로서 생각되었다. 블랙은 대기 중에 정상적으로 존재하지만 공기나 물이 아닌 화학적 물질이 최소한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25년 이내에 프리스틀리와 셸레는 다수의 새로운 기체들을 발견했으며 라부아지에는 오랫동안 지연되어 온 화학혁명을 일으키는 데 기체반응을 이용했다.



XII.  라부아지에와 화학혁명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그리스-아랍 이론들의 마지막 후예인 플로지스톤설을 타파하고 옛 사상들에 대하여 훨씬 더 유용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흩어진 화학 지식들을 전혀 새로운 체계인 지금의 근대 화학으로 조직화했는데 이미 2세기 전의 일이다. 라부아지에는 화학 원소들을 보통의 화학분석에 의하여 더 간단한 물질로 쪼갤 수 없는 물질로서 정의했다. 그는 화합물들을 그들의 조성과 반응에 기초하여 산, 염기, 염, 산화물, 황화물 등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화학 반응을 이러한 원소나 화합물의 결합과 재결합으로 간단히 정의했다. 더욱이 라부아지에는 화학자가 사고하는 방법과 사고하는 데 이용하는 어휘들을 변화시켰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화학물질의 조성에 기초하여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우리들이 아직도 무기화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명법 체계를 고안했다. 그는 질량이 균형이 잡힌 화학 반응식을 고안했다. 그는 무기화학으로부터 유기화학을 분화시켰으며 그는 최초로 유기 라디칼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구조 유기화학의 시험적 제안을 시도했다… 그는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Laplace, 1749-1827)와 함께 여러 가지 물질들의 연소열과 동물의 호흡처럼 발산되는 열을 측정하는 최초의 열량계를 고안한 열화학 창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 : 비교

…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43-1804)… 그는 소다수를 고안했고 식물이 태양광 아래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는 발견과 함께 광합성 연구를 시작했지만 그는 산소의 발견자로서 가장 잘 기억되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스웨덴 출신의 칼 빌헬름 셸레(Karl Wilhelm Scheele, 1742-1786)도 똑같은 영예를 받을 만하다. 그는 프리스틀리보다 조금 앞서서 독립적으로 산소를 발견했지만 프리스틀리가 먼저 발표했다…


헤일즈의 기체 포집병

… 화학 결합과 반응의 옛 사상들과 플로지스톤의 종말은 영국의 성직자 스티븐 헤일즈(Stephen Hales, 1677-1761)의 1727년 이전의 기체 포집병의 발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헤일즈는 많은 물질들이 비탄성형(기체가 아닌)으로, 공기를 함유한다는 것과 이러한 물질들이 가열되면 공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최초로 공기를 모을 수 있는 기체 포집병을 발명했다… 물론 헤일즈는 이산화탄소 같은 물에 녹는 기체들은 모을 수 없었다. 실제로 헤일즈가 그의 책 <식물 정역학Vegetable Staticks>을 간행한 25년 수에 블랙은 마그네시아를 가열산화했을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유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발명에 재간이 있는 프리스틀리는 기체에 관심을 갖게 되자 물을 수은으로 대치하여 헤일즈의 기체 포집병을 변형했다. 이제 그는 물에 녹는 기체들조차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탈플로지스톤 공기

1771년에 프리스틀리는 질산염을 가열하여 불순한 산소를 얻었지만 그것을 일산화질소로 잘못 생각했다… 1775년 초에 그가 실제로 ‘탈플로지스톤 공기’를 생성했다고 결정했다…


라부아지에의 초기 업적

라부아지에는 그의 과학 경력을 파리의 물 공급의 개선을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일과 관련하여 그는 증류수를 표준치로 하여 물의 밀도를 측정했다… 라부아지에는 증류수가 정말 어떤 침전들을 생성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보일의 일을 반복해야만 했다… 마침내 받는 용기에 고체 잔류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아마도 보일의 고체 잔류물은 물을 담아서 가열한 플라스크의 유리로부터 왔을 것이다. 이 예감을 조사하기 위하여 그는… (101일) 끓였다… 정량적인 측정에 그의 주장의 기초를 두는 습관은 라부아지에의 특성이었다…


연소와 가열산화

… 1783년에야 플로지스톤의 문제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인 그의 <플로지스톤에 대한 고찰Reflections sur le Phlogistique>을 제시했다… 1772년에 드 모르보(Guyton do Morveau, 1737-1816)는 모든 금속의 가열산화물들이 해당되는 금속들보다 무겁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 라부아지에는 드 모르보의 업적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그가 헤일즈의 책으로부터 받은 인상, 즉 모든 금속들은 공기를 함유하며 가열되면 공기를 방출한다는 것과 모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라부아지에는 연소와 가열산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 1772년 늦여름에 그는 포도주를 공기 중에 세워두면 산이 된다는 프랑수아 로졔이Francois Rozier의 관찰을 알게 되었다. 공기와 산성도 사이의 연관을 조사하는 중에 그는 결정적인 관찰을 하게 되었다…


고정된 공기와 가열산화

1773년 2월경 라부아지에는 블랙이 가열산화와 연소는 물론 식물의 호흡과 성장이 공기 중의 어떤 것과 결합하거나 그것을 ‘고정’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제안했던 업적에 대하여 들었다…


프리스틀리와 바이엔의 보고서

1774년 가을에 셸번 경은 그의 비서인 프리스틀리를 데리고 파리를 방문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셸레가 그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아마 그 속에서 셸레는 산소를 언급했을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여전히 산성 공기와 ‘공기의 가장 산성인 부분’과 결합한 금속들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1775년 3월에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을 폐지하고 새로운 화학에 이르게하는 연구 경향인 프리스틀리-바이엔의 실험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라부아지에의 연소설

… 1776년에 그는 공기가 하나는 활성이며 다른 하나는 반응성이 없는 두 가지 물질의 혼합물이라고 결론지었다(셸레는 이미 이것을 발견하고 보고했지만 그 원고는 출판업자에게서 지연되었고 1777년에야 출판되었다)…


산소설에의 반응

… 문제는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무엇이 반응했으며 얼마나 많이 반응했는지는 증명했지만 왜 어떤 물질은 반응하고 어떤 물질은 반응하지 않느냐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놓여있었다. 예를 들면 연소가 단순히 산소와의 결합이고 산소가 공기 중의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왜 모든 물질들이 연소하지 않는가? 라부아지에는 설명이 없이 정량적 이론을 제시했지만 캐번디시와 프리스틀리는 정성적인 견지에서 생각하고 설명을 요구하도록 훈련을 받았었다.


물의 조성

… 수소는 가열산화물에서 산소와 반응하여 물을 생성하기 때문에 산은 가열산화물로부터 수소를 생성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

프리스틀리와 셸레는 공기가 원소가 아니며 화학물질의 혼합물임을 증명했다. 캐번디시는 물이 원소가 아니며 화합물임을 증명했다. 라부아지에는 베허의 지방성 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그는 모든 그리스 원소들과 그것들의 자손들을 치워버렸다


새로운 명명법의 효과

라부아지에의 마지막 중요한 저서인 <화학에 관한 기본적 논문Traite Elementaire de Chimie>은 1789년에 발간되었으며 새로운 체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해설서였다. 그것은 빛과 열을 포함한 약 30가지의 화학 원소들을 실었다…

… 그는 새로운 관계들, 특히 새로운 정량적 관계들을 밝혀냈다… 그는 화학자들이 사고하는 방법을 변화시켰다. 1789년 이후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화학반응을 볼 때 그들은 플라스크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정수들이나 원소들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화학물질과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화학물질을 상상했다.



XIII. 원자량과 분자식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연구하는 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자연철학자를 위하여 물리적/화학적 성질은 원소와 특성 대신에 원자와 분자의 구조 및 조성에 기초하여 설명되어야 했다... 무엇이 한 원소의 원자를 다른 원소의 원자와 다르게 만드는가? 무엇이 원자에 존재하여 물질을 단단하게 하거나 초록색으로 하거나 휘발성의 원인이 되는가? 여러 가지 화합물에 존재하는 원자들은 무엇인가? 만일 원자들이 배열된다면 어떻게 배열되는가?


실제적인 화학자 또는 '공학자'를 위하여는 또 다른 문제들이 존재했다. 라부아지에는... 반응물질의 질량은 생성물의 질량과 같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량적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는 100파운드의 소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염의 파운드 수를 계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두 개의 미지수를 가진 방정식을 푸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화합물 원자(분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정되고 일정한 성분을 가질 것이고 증거는 없지만 일정한 조성을 갖지 않는다면 분자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했다.


프루스트-베르톨레 논쟁

루이스 조지프 프루스트(Louis Joseph Proust, 1754-1826)는 초창기에 화합물들이 일정한 조성을 갖는다고 결정하고 그것의 증명을 시작했다... 1797년에 프루스트는 소위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발표했다... 대신에 1799년에... 베르톨레가 화합물은 얼정한 조성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거의 10년 동안 지속된 논쟁을 유발시켰다.


수학적 관계

원자량과 분자식을 해결하려는 최초의 실험적 단계가 베를린의 왕립 자기공장의 화학자인 예레미아스 벤야민 리히터(Jeremias Benjamin Richter, 1762-1807)에 의하여 취해졌다... 화학량론(stoichiometry)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돌턴과 원자 반발

존 돌턴(John Dalton, 1776-1844)은 가난한 방직공의 아들이었다... 돌턴은 화학자가 아니었으나 대기의 조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통해서 화학에 들어간 기상학자였다. 그는 산소와 질소가 공기 중에서 더 무거운 기체인 산소가 바닥층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최초의 분자식

... 그는 일반적으로 자연은 '최대의 단순성'을 따른다는 신념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분자식을 추렸다...


배수 비례

... 1803년에는 이미 그는 수소가 가장 가벼운 원소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수소의 무게를 1로 잡은 최종 입자들의 무게 표를 발표했다. 이제 그는 무거운 기체 입자들이 가벼운 것들보다 실제로 물에 더 잘 녹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돌턴의 명성을 높인 위대한 주장은 그의 원자설의 해석이었다...


아보가드로의 가설

아메데이오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 1776-1856)... 1811년에 그는 기체들이 원자들이 아닌 몇 개의 원자들을 함유하는 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것들을 그는 분자라고 불렀다...


베르셀리우스-데이비 결합이론

전기 보존 전지가 1800년에 발명된 후 10년 안에 데이비는 나트륨, 칼슘, 칼륨, 마그네슘, 바륨 등 용융된 염들을 전기분해로 유리했다... 1818년에 이 사상를 자기 자신의 실험적 업적과 결합시켜서 베르셀리우스는 결합성 전기 화학 이론을 개발했다. 모든 원소들은 양 또는 음으로 하전된다고 가정했다...


뒤마의 분자량

마침내 1860년에 원자량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화학자들의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다... 마지막 날에 파베시라는 이탈리아 화학자가 스타니츠라오 칸니차로(Stanislao Cannizzaro, 1826-1910)가 그의 학생들에게 1858년부터 배부했다는 짧은 한 벌의 노트에 기초한 논문 복사본을 배포했다. 이 <화학철학에서 과정의 요약Sunto di un Corso di Filosofia Chimica>이라는 소책자에서 칸니차로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설명하여 정당화했고, 간단한 계산에 의하여 어떻게 올바른 원자량과 분자식을 구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XIV. 원자 배열 : 유기 화학


시초

1800년경의 유기화학은 상대적으로 미개했다...


원자량과 분자식에 대한 혼동

구조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든지 라디칼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그들의 분자식들을 아는 것이 필요했다...


에테르설

... 1828년에 뒤마(Jean Baptiste Andre Dumas, 1800-1894)와 피에르 볼레이(Pierre Boullay, 1777-1858)는 1832년에 베르셀리우스가 이름붙인 에테르설을 제안했다...


유형 화합물

1853년에 제이라르는 ... 제2차 유형 이론(the Second Type Theory)이라 불리는 유형 화합물들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을 제안했다. 1839년의 뒤마의 이론이 제1차 유형이론이었다...



XV. 쪼갤 수 있는 원자


주기율표

원소들의 성질에서 질서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1869년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i Mendeleev, 1834-1907)에 의하여 최초로 발표된 원소들의 주기율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로타 마이어(Lothar Meyer, 1830-1895)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1870년에야 발표했다...



맺음말


이 책의 설명은 1900년경에 와서 멈춘다… 1900년에는 이미 대형 화학 공업이 있었다. 수많은 새로운 유용한 물질들이 발견되었으며 새로운 방법과 장치도 생산되고 있었다. 합성염료들의 대량 생산으로 아름답게 염색된 직물들을 가난한 사람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는 매독을 치료하는 화학물질을 합성하는 데 분주했다. 프리츠 하버Fritz Harber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인공 비료를 만들기 위해 암모니아를 합성했으며, 그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을 살상하기 위해 독가스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비록 그 당시에는 화학자들이 화학반응에 관여된 기구들의 명확한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살충제류, 플라스틱류, 마취제류, 군수품류 및 연료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김용준, 추천의 글

나는 화학이란 원자가 전자의 이동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곤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즉 희랍시대의 4원소설이 일단 정착한 다음에는 이 4원소설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겨운 몸부림을 쳐야 했는지를 우리는 본문에서 배우게 된다... 화학의 기원을 물을 불로 데우는 데서 찾는다면 불이야말로 화학의 뿌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리 클리프, 다정한 물리학]

p30/ ... 고대 그리스인들은 흙, 물, 공기, 불이 일련의 변화를 거쳐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네 종류의 원소에 '뜨거움', '차가움', '건조함', '축축함' 이라는 네 가지 특질을 추가했다... 기본원소에 특질을 추가하거나 제거하면 다른 원소로 바뀔 수 있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의 4원소론은 주어진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꾸는 연금술alchemy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라부아지에가 제일 먼저 공략한 것은 '변환'이라는 개념이었다... 그전에도 화학자들은 질량보존을 하나의 법칙으로 가정해왔지만, 실험을 통해 최초로 확인한 사람은 최고로 정밀한(즉, 최고로 비싼) 실험도구를 보유한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자신이 얻은 실험결과를 정리하여 1773년에 책으로 출간했다...

... 1756년에 스코틀랜드의 자연철학자 조지프 블랙Joseph Black은 소금에 열을 가했을 때 발생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기(이산화탄소)를 발견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영국의 물리학자 겸 화학자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는 철에 황산을 부었을 때 생성된 공기(수소)가 '터지는 듯한' 불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새로운 공기를 가장 많이 발견한 사람은 자연철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였다.

... 1774년, 프리스틀리는... 햇빛을 렌즈로 모아서 독성이 매우 강한 '레드 칼크스red calx(수은을 함유한 광물)'에 쪼였더나, 새로운 종류의 공기가 생성되어 밝은 빛을 방출하면서 맹렬하게 타오른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발견한 기적의 공기를 "탈플로지스톤공기dephlogisticated air'라고 불렀다...

그해 10월에 프리스틀리는 파리로 여행을 갔다가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만났다... 그(라부아지엔)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아니라 '연료와 결합하여 연소를 일으키는 기체'임을 깨닫고, 이것을 '산소oxygen'로 명명했다.

... 라부아지에는 동물이 호흡을 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했다...

... 사람들은 반복실험을 통해 "캐번디시가 발견한 가연성 공기가 산소와 만나 연소되면 물이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라부아지에는... "물은 오랜 옛날부터 가장 기본적인 원소로 취급되어 왔지만, 사실은 두 종류의 가연성 원소로 이루어진 혼합물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마침내 그는 1785년에 자신의 연구실에서 개최된 공개실험에서 물이 산소O와 수소H로 분리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 1789년에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화학이론을 집대성하여 과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 <화학원론An Elementary Treatise on Chemistry; Traite elementaire de chimie>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총 33종의 원소가 소개되어 있는데... 자신의 연구를 "화학혁명"이라고 자칭했던 라부아지에의 자신감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44/ 원자론은 17세기에 와서야 과학계에 조금씩 수용되기 사작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다... 그는... 빛도 '미립자corpuscle'라는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굳게 믿었다...


존 돌턴은 1766년에 잉글랜드 북서부의 완만한 농지로 에워싸여 있는 외딴 마을 이글스필드Eaglesfield에서 평범한 직공 조지프 돌턴Joseph Dalton의 아들로 태어났다...

날씨에 대한 돌턴의 관심은 맨체스터에서도 이어졌는데, 이 시기에는 특히 '비'에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이 축축한 공기 속에 습기가 더 흡수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 돌턴을 원자론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 커피 한 잔에 설탕을 티스푼으로 약 150번쯤 떠넣으면 설탕이 더 이상 녹지 않고 잔의 밑바닥에 쌓이기 시작한다. 비가 올 때 나타나는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공기 속의 수증기가 포화상태에 도달하면 작은 물방울로 응축되어 구름이 형성되고, 물방울이 어느 이상 커지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초대된 하객들은 생일을 맞은 주인공의 고등학교 동창이거나 대학교 친구였는데, 두 그룹의 공통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같은 파티에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각자 자기들끼리 놀다가 돌아가곤 했다...

돌턴은 1801년에 새로운 원자론을 발표했고... 특정 기체가 다른 기체보다 물에 잘 녹는 의외의 현상을 발견하고... 그는 원자가 물에 녹는 정도를 좌우하는 요인이 '원자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돌턴은 자신이 창안한 혼합기체이론(원자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원자에게만 척력을 행사한다는 이론)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종류의 원자들이 결합하여 분자를 형성하는지 알아냈는데...

... 돌턴은 고정된 양의 탄소와 결합하여 위의 두 기체(탄화산소, 탄산)를 만드는 산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써, 탄산에 함유된 산소가 탄화산소에 함유된 산소보다 두 배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의 원자이론을 적용하면 탄화산소는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가장 단순한 화합물(일산화탄소)이며, 탄산은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돌턴은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얻은 탄소와 산소의 질량비율을 약 1.30:1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알려진 1.33:1과 거의 비슷하다...

1807년 3월, 돌턴은 '화학원소'라는 혁명적 개념을 홍보하기 위해 계몽주의의 본산이자 영국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있는 에든버러Edinburgh로 여행을 떠났다...

돌턴이 에든버러에서 발표한 원자론과 얼마후 출간된 논문 <화학철학의 세계A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는 라부아지에의 화학원소와 고대 그리스의 원자 가설을 하나로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했다... 1826년에 험프리 데이비는 돌턴에게 왕실메달을 수여하면서 "본 메달은... 그의 원자론이 낳은 결과(배수비례법칙)에 수여하는 것"임을 특별히 강조했다.

... 그후로 원자론은 거의 100년 동안 숱한 논쟁을 야기하다가, 베른Bern의 특허청에서 근무하는 젊은 물리학자에 의해 마침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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