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나는 사마리아가 나병과 같은 몹쓸 병에 걸린 환자들이 사는 곳인 줄 알았다. 아니면, 무슨 대단히 불량한 야만인이나 이민족이 사는 동네인 줄 알았다. 성경에는 사마리아를 근처라도 지나가면 안될 곳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이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함께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또는 헤브라이 왕국)의 뒤를 잇는 나라이었다. 솔로몬의 적통은 유다의 첫 왕인 르호보암Rehoboam에게 있었으나, 그의 학정에 반기를 든 북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10지파가 함께 했다. 따라서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은 10지파의 북이스라엘과 2지파의 남유다로 갈라 섰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낳은 아들의 기준으로 12지파가 있고, 여기서 가나안 땅을 여호수아로부터 할당 받을 때 그 중 레위 지파가 빠지고, 대신 이집트 총리대신 요셉의 두 아들을 다시 야곱의 아들로 축복하여 배당권을 준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지파를 포함한 12지파가 있다.* 이 12지파 중에 가장 중요한 지파로는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에게서 낳은 넷째 아들 유다를 잇는 유다 지파와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의 둘째 아들 에프라임을 잇는 에프라임 지파이다. 그리고 그 두 지파는 각각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가가 된다.
이와 같은 연유에 의해 유다 지파의 유다 왕국(B.C. 930-586)과 에프라임 지파의 이스라엘 왕국(B.C. 922-722)이 탄생하게 된다. 이 두 왕국은 처음에는 경쟁하였고 한때 결혼 동맹을 맺어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적대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할 때, 유다는 이스라엘에 도움의 손길은 커녕 오히려 침략을 사주하였으며, 그렇게 배후의 적 노릇을 하던 유다도 결국 앗시리아를 이은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한다.
이 두 왕국의 운명은 그들 자신에게 있기보다는 그들이 점령당한 시기와 그들을 점령한 침략국의 정책에 의해 엇갈린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시리아는 잔혹하였으며, 또한 이민족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통혼을 통해 이스라엘의 순혈주의 민족성을 순화하려 했다. 그에 반해 유다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는 어느 정도 관대하였으며, 유다의 지배층을 단지 그들의 수도 바빌론으로 이주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주 기간(바빌론 유수)도 40~60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기간이 단축될 수 있었던 것은 바빌로니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곧 멸망당하고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2세가 유다인들을 그들의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북쪽 이민족의 공격의 파고를 견뎌내고 있을 때, 오히려 이를 즐기던 유다는 이스라엘이 멸망 당하자 순망치한의 준엄한 이치에 따라 그들 또한 100여년 후에 형제의 운명을 뒤따랐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과 그 수도 사마리아는 동족으로 그들을 지지해주지 못했던 유다의 업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멸망당해 이민족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상황에서도 100여 년 이상 먼저 그 간난고초를 겪어야 했던 사마리아를 이스라엘의 순수한 피를 더럽힌 사람들로 간주하고 그 지역을 금기의 장소로 지정하고 그들과의 모든 협력과 접촉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환난 중에 북쪽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하지 않고 '화냥년(환향녀)'으로 욕하던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사마리아인에게는 우상 숭배의 죄과도 있었지만, 그들이 항상 그렇게 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유다라고 해서 우상 숭배의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중요한 의문은 북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대부분인 10지파이고, 남유다는 고작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의 2지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다 지파가 할당 받은 땅이 워낙 커기에 유다 지파의 땅 하나만으로도 일당백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10지파를 모두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고 배척하게 되면, 오늘날 유대인에게 남은 지파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 2지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12지파에 대한 축복과 12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늘날 유대인들은 지파가 없다. 이는 오랜 디아스포라를 통해 가나안 땅 배분의 의의가 사라지면서 모계가 강조되었고 그러다 보니, 부계를 통한 지파 구분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유다 지파가 대부분인 유다 왕국의 후손들만 이스라엘 혈통으로 인식하고 유다 지파외에 다른 지파가 아예 없는데 지파 구분이 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은 모두 유대인(유다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예수의 고향인 갈릴리 지방이 북이스라엘의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갈릴리의 예수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들과 같은 유다인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아니면,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었을까?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이스라엘의 피를 더럽힌 사람들로 인식하는 마당에 갈릴리 사람들을 유다인으로 인정할 무슨 특별한 근거라도 있는 것일까?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에 납달리와 스불론 그리고 잇사갈 지파에게 배분되었다. 이후 점차 이곳은 가치가 없는 곳으로 인식되어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 자재를 공급해준 댓가로 히람 왕에게 갈릴리의 20성읍을 주기도 하였다 (왕상 9:11). 더욱이 B.C. 730년경 앗시리아에 의해 그리고 B.C. 80년경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이래 갈릴리는 순수한 이스라엘 종족의 문화를 상실한 이방의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lightlove.or.kr, 2019.4.13).
이러한 갈릴리를 옹호하는 몇 가지 논거가 있다. 그 하나는 갈릴리가 바빌론에서 귀환하는 유대인들의 정착지가 되면서 유다인들의 거주지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chpress.net, 2022.12.03). 또 다른 하나는 B.C. 169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리며 하례를 금지하고 모진 박해를 가할 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몰려간 곳이 갈릴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은 열심당의 아지트가 되었고 바리사이파는 그곳을 자신들의 세력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국민일보, 2011.5.22).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도 지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갈릴리에 대해 유다인들이 어떤 예언자 출현의 기대를 하였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렇기에 성경의 복음사가들은 예수를 이방의 땅인 갈릴리 태생*****이 아닌 유다땅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것으로 (즉 유다인으로) 포장하기 위해 온갖 전력을 다 쏟아부었다. 따라서 예수의 출생 시기와 어울리지도 않는 국세조사를 내세워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갈 수 빆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데, 정작 로마법에서는 국세조사 시 조상의 땅에 굳이 갈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데리고 도보로 북에서 남으로 그 먼 길을 갔다는 것은 그 당시의 정황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하여도 도저히 이치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에 이어 다시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형제들까지 거론하게 되면 또 얼마나 신성한 신앙의 교리에 위배되는 미련한 전개일까? 그렇기에 교회에서는 사마리아인과 12지파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그토록 무관심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인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내에 800명 남짓 남아있다. 20세기까지 이어져 온 지파는 레위 지파, 므나쎄 지파, 에프라임 지파, 이다말(아론의 막내 아들) 지파, 벤야민 지파이다. 그 중 벤야민 지파는 1968년에 단절되었다 (나무위키, 사마리아인).
A.D.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수년간 싸웠으나, 패전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파괴되었고, A.D. 132년 다시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3년간 치열하게 항전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어 이번에는 영영 가나안 지방을 떠나 끝없는 길고 긴 유랑생활을 하여야 했다 (법률신문, 2024.10.4). 그러나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가나안 지방에 남아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로마와 헬레니즘의 문화를 외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종교를 유지한 보다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 사마리아인, 참조).
그러나 그러한 개방성으로 인해 사마리아는 오히려 성경시대에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배척의 대명사가 되었고 또 오늘날에도 소수의 인원만이 남아 민족으로서의 존립조차 위태롭게 되었다. 오늘날 야곱에게서 축복받은 10지파는 모두 흔적없이 사라지고 유다 지파만이 남아 유대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라진 지파가 세계의 다른 지역의 어느 민족으로 흡수되었을지에는 관심이 많으나, 사마리아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스라엘 12지파의 가나안 땅 배분에는 그렇게 열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그 이후 사라진 10지파의 행방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런 논란이 없다. 대답하기 곤란한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조사를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복지부동의 철칙은 여기서도 정확히 작동하고 있다.
Note:
*요셉 지파가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에게 지파를 준 것은 야곱이 자신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실질적인 장자권(다른 아들의 두 배)을 준 것이라고 한다.
**바빌로니아의 정책이 더 극악했다는 주장도 있다. 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와 달리 예루살렘의 도성과 성전을 아예 송두리째 파괴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사마리아인).
***남유다 왕국을 지지한 지파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이지만, 유다 지파의 영역 안에 시므온 지파의 영역이 있었고, 성소를 담당하는 레위 지파도 있다. 여기서 레위 지파는 별개로 친다 하더라도 영역이 남유다에 있으면서 북이스라엘을 지지한 시므온 지파는 북이스라엘의 어디로 정착하였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유다 왕국 또는 그 후예인 유대인에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모두 포함되어졌다는 논리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유다로 대피해왔다는 것이며, 그래서 예루살렘의 인구수가 5배나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고 히즈키야가 샘을 새로 팠다는 주장이다 (위키백과, 북이스라엘 왕국). 그리고 유다인이 바빌론에서 돌아올 때, 앗시리아의 니네베 등으로 이주되었던 사마리아인들도 함께 귀향하면서 민족이 다시 합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몇백 년간 적대하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다인들이 의좋게 받아들였을지는 무척 의문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도 촌구석인 나사렛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 위에 'INRI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 전체에 대한 단일한 국세 조사의 어떠한 증거도 없다. 유대에 국한된 국세 조사는 헤롯왕(Herod the Great)이 B.C. 5년과 A.D. 1년 사이의 언젠가 죽은 지 최소 5년이 지난 A.D. 6년에 이루어졌다. 이 조사는 A.D.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헤롯왕의 영토 중 가장 큰 부분을 상속받은 헤롯 아켈라우스Herod Archelaus의 영토를 로마의 유대주로 편입하고, 시리아주 장관이었던 퀴리니우스Quirinius를 유대주의 세금징수관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갈릴리의 유다(Judas of Galilee)에 의한 유대 극단주의자들(열심당 Zealots)의 반란을 촉발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반응은 로마에 의한 직접 과세가 당시에 새로운 것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조사는 로마의 직접 통제 아래 있지 않은 분봉왕(Ethnarch)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통치하던 갈릴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국세 조사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출신지로 여행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wikipedia, Census of Quirinius). 또 국세조사에 신고를 위해 아내가 동행할 이유 또한 없었다.
*******벤야민 지파는 판관 시대에 다른 지파들과 1 대 11의 무모한 전쟁을 하여 지파의 힘이 이미 많이 쇠락하여 유다 지파에 그냥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배척하는 이유로 잘 정리된 글로는 네이버블로그 [성경사전/성경인물/성경 바로알기]의 ‘그리심, 사마리아인’(2016.8.31)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