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데시 전투

조영필 & 젬선생

by 조영필 Zho YP

기원전 1274년경 오론테스강Orontes River 유역(시리아 카데시(Homs 인근))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격돌이 있었다.


이 오래된 전투(Battle of Kadesh)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에 해당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이집트의 기록은 아부 심벨(Abu Simbel) 신전(벽면에 대규모 부조와 함께 기록), 룩소르 신전(Luxor Temple)(제1탑문에 전투 장면이 묘사), 카르나크 신전(Karnak Temple)(아몬 신전의 남쪽 외벽에 기록), 라메세움(Ramesseum)(람세스 2세의 장례 신전 제1,2 탑문 벽면), 아비도스 신전(Abydos) 및 파피루스(Papyrus Sallier III)에 서사시와 보고서 형태로 남아있으며, 히타이트(무와탈리 2세)의 기록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Hattusa, 현재 튀르키예의 보가즈쾨이)에서 발굴된 설형문자 점토판들에 나온다.


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은 현재의 레바논과 시리아 접경지에 있던 아무루Amurru 왕국(벤테시나Benteshina왕)의 변심이었다. 람세스 2세는 즉위 2년에 시리아 해안가를 따라 북진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이때 히타이트의 속국이었던 아무루 왕국은 히타이트에서 이집트로 주종관계를 변경했다. 따라서 히타이트는 배신한 아무루 왕국을 징벌하고자 대규모 원정군을 소집하였다. 아무루 왕국이 히타이트의 공격 위협에 직면하자 이집트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전투 시작 전, 히타이트는 첩자(샤수족)를 보내 "히타이트 군대가 겁을 먹고 멀리 북쪽 알레포로 도망갔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에 람세스 2세는 후속 부대(프레, 프타, 세트 군단)가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정예병인 '아문(Amun)' 군단만을 이끌고 성급하게 카데시 근처에 진을 쳤다. 이때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 이미 카데시성 뒤편에 군대를 숨겨두고 있었다.


람세스 2세의 뒤를 따라오던 이집트의 프레 군단은 행군 도중 히타이트 전차부대(2,500대 이상 추정)의 기습을 받았다. 이것이 카데시 전투의 실질적인 시작이었으며, 이 기습으로 인해 이집트군은 괴멸 위기에 직면했다.


아문 사단까지 포위된 절체절명의 순간, 이때 해안로를 통해 뒤늦게 도착한 이집트의 엘리트 지원군(네아린, Nearin 부대 등)이 가세하면서 이집트는 한숨을 돌렸다.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전차대에 포위되어 고군분투하는 동안 프타 군단이 행군 속도를 높여 전장에 도착했다. 마침 히타이트 전차병들은 이집트의 전리품을 챙기느라 대열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이후 가장 마지막에 세트 군단이 합류함으로써 전세는 다시 팽팽해졌다.

결국 람세스 2세는 카데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군대를 돌려 이집트로 복귀했다. 히타이트의 기록에는 "이집트 왕이 패배하여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전투 이후 아무루 왕국 등 시리아 지역의 주도권은 여전히 히타이트가 쥐게 되었다. 반면 람세스 2세는 이집트로 돌아가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뤄낸 승전으로 선전하며 신전 벽면에 기록을 남겼다.


전투가 끝난 지 약 16년후(기원전 1259년경), 양국은 신흥 강국인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로 합의한다. "영원한 평화와 우호"를 약속하며 상호 방위 및 범죄자 인도 조항을 담았다. 이 조약문은 양측 언어로 모두 남아있으며 최초의 성문 평화조약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조약문의 복제본은 현재 뉴욕 UN본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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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지돕. 호기심 탐구자. 탐구 대상 : 시, 몸과 마음, 장기와 바둑의 기원, 돈, 한국어와 외국어, 문통(問洞), 기업가정신, 신뢰, 민주, 법치, 중독, 세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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