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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25. 2016

발에게 묻다 길에게 묻다

 (2) 그리운 도시, 다시 만나고 싶은 순간


여행을 가면 나는 보통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고 걸으면서 목적지를 발견하기도. 걷는 이유를 찾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유도 모른 채 혹사를 당하고 있을 내 두 발이 보였다. 발에게, 네가 이끄는 대로. 너의 보폭에 맞춰 나도 걷고 있는 거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내 변명이 신통치 않았는지 어떤 날에는 물집이 잡히고. 못난 흉이 오래 남기도 했다. 내 목적 없는 여정에, 정처 없는 순간을 함께 해준 발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을 양보하기로 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프레임 한 귀퉁이에 발을 함께 담았다. 덕분에 발은 책을 읽기도. 눈부신 지중해를 비행을 하기도. 멋진 순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발에게 물어본다. 발이 기억하는 순간들, 네가 사랑하는 길 위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발에게 묻다 길에게 묻다
(1) 내가 사랑한 도시, 내가 사랑한 순간  
(2) 그리운 도시, 다시 만나고 싶은 순간


이야기하는 발  우붓은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전통과 예술이 잘 어우러진 마을답게 이국적인 문화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줬을 자연을 사뿐사뿐 만날 수 있다. 우붓 거리를 따라 섬세하게 잘 가꾸어진 갤러리와 샵들로 거리는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마저 즐겁게 한다. 번화한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옛 방식 그대로 농사를 짓는 농부와 그들이 가꾼 넘실거리는 라이스(rice) 필드도 만날 수 있다. 친절한 지도를 따라, 매일 새로운 산책 코스를 찾아가는 것도 좋다. 발 길 멈추는 곳에 한 없이 게으름을 피우기도. 그 길이 정다워 다시 그곳을 찾기도 한다. 잘란 카젱(Jalan Kajeng), 우붓 사람들의 기부로 만들어졌다는 이 길은 누군가의 이름과 또는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인사말이 블록마다 새겨져 있다. 한 칸, 한 칸.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주는 이야기를 따라. 오늘의 호젓한 산책은 이어진다. ubud, BALI.




비행하는 발  누구보다 겁이 많지만 때때로 주체하지도 못할 모험을 스스로 감행하기도 한다.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라는 페티예, 출처가 불분명한 명소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지만. 이 곳 욜루데니즈 해변에 도착하고서 곧장 그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이 눈부시게 빛나는 지중해를 한 눈에 담아보고 싶은 욕심에 그 정도의 대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런 곳이라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스스로를 위안하며 해발 2,000m 상공에서 미련 없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지중해로 뛰어들었다. 공포로 압도되었던 몸이 조금씩 열리고, 얼굴에 스치는 바람만이 순간을 감각토록 해주었다. 멀리 보이는 블루라군의 해변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며, 이곳 하늘도 저 아래 바다도 고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나의 첫 비행을 도와준 파일럿은 23년 차의 베테랑, 자신의 오피스는 이 곳 하늘이라고 말하는 그의 허세가 내심 부럽다. 30여 분의 비행은 순식간에 시간을 삼키고, 내 발은 오늘도 별일 없이 땅에 착륙했다. fethiye, TURKEY. 




엄지 척 발  겨울의 유후인은 몽환적이다. 마을의 큰 호수는 차가운 공기와 만나 자욱한 물안개를 만들고, 료칸의 굴뚝에서는 저마다 바삐 연기가 피워 오른다. 일본의 전통 여관인 료칸은 오래된 목조 주택에서 숙식과 온천욕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차가운 바람에 머리를 식히는 노천탕. 온천욕을 즐기는 한 마리의 일본원숭이처럼, 이 순간만큼은 내 몸도 자연의 그것과 닮아간다. 다다미방에서 유카타를 몸에 걸치고, 과분한 식사와 료칸 주인의 환대는 지난 여정들의 피로마저도 친절하게 풀어준다. 아찔하게 차갑던 나무마루에 감촉도. 노곤하게 따뜻했던 코타츠의 온기도. 밤새 화로에서 주전부리를 구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먹던 시간도. 무심히 모두를 지켜봤을 노구의 료칸처럼. 그 옛스런 시간 속으로 여행은 깊어간다. 이 순간이 꽤 만족스러운지, 게다 사이에 간신히 힘을 주고 있던 발가락들이 내게 엄지 척, 을 들어줬다. yufuin, JAPAN. 




싱그러운 발  제주의 숲은 늘 옳다. 비자향이 촉촉한 천년의 숲 비자림도, 오붓한 시간을 내어주는 원시의 숲 곶자왈도. 제주의 숲은 걷는 즐거움을 가르쳐 준다. 제주말로 '신성한,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사려니는 처음 그 이름이 예뻐 찾게 된 곳이다. 평평한 길을 나즈막하게 걷다 보면 복잡했던 시선은 어느새 땅을 향하고, 자신의 보폭에 맞춰 생각도 차츰 속도를 늦춰간다. 비 온 직후, 붉은 기운이 한껏 올라온 사려니의 흙 길은 초록과 어울려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렇게 숲은 늘 딱 내가 필요한 만큼에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제주의 숲은 늘 옳다. 사려니, 넌 정말 사려가 깊은 숲이로구나. saryeoni, JEJU.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모든 것이요, 전체요 완벽함이다.
여기에 더 보탤게 없다. 미래를 내려놓고 내일을 내려놓을 때 만족이 찾아온다.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요.
영원이 될 때 만족이 찾아온다 _오쇼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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