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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29. 2016

방비엥의 잠 못 이루는 밤(2010)

 잘란잘란, 라오라오를 만났을 때

라오라오를 아시나요? 


우리가 만난 방비엥의 오후, 이 아름다운 시간에 우리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라오라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2010, Vang Vieng)


라오스에서 발견한 놀라운 단어, 라오라오(LaoLao). 라오스 사람들은 라오스를 그냥 라오라고도 부르는데, 라오는 또 다른 뜻으로는 술이라는 말이다. '라오라오'는 라오스의 술이라는 말로, 동시에 '매우 좋음'을 뜻하는 라오스어이다. 길을 뜻하는 잘란(jalan)에 잘란잘란이 되었을 때 슬렁슬렁, 산책하다로 두루 쓰는 인도네시아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주 나이스한 말이다. 라오스, 예감이 좋다. 이곳을 나는 반드시 사랑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오라오에 취하는 밤

 

태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 방비엥에 도착했다. 건기라 천천히 흐르는 강처럼 이곳 시간도 늬엇늬엇 흘러갔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마을을 굽어 흐르는 강을 보고 있으면, 하루도 천천히 잘 흘러갔다. 한국인 여행자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방비엥의 거리는 곳곳이 웨스턴들의 천국이었다.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동행한 자매였던 두 언니와 나는 우리 숙소에서 유일한 한국 여행자였다. 로이라는 친절한 라오 청년이 우리를 이끌어 찾은 방갈로는 가격도 시설도 매우 '라오라오' 했다. 내가 쓴 싱글룸 라인엔 나뿐이었는데, 튜빙을 하고 온 오후. 낯선 허밍 소리가 얇은 방갈로 틈새로 들려온다. 누가 왔나. 언니들과 로컬 마켓으로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는 길. 양정아 네 옆방에 어떤 남자가 혼자 들어왔어.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더라. 러시아? 일본 사람인가. 여튼 남자야. 맛있는 찬거리를 사 어느새 늬엇늬엇 희미해진 길을 더듬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멀리서 짙은 물체가 다가온다. 어, 저 사람이야. 맞지 언니. 설마 한국 사람이겠어. 어느 나라 사람이지? 언니들의 말이 분주해진다. 덩달아 신이 난 나도. 정말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하면 추리에 합류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느 새 어렴풋이 보이는 그 사람. 우리는 일 순간 말을 닫고 혹시나 실례가 될까 차분히 그 사람을 스쳐왔다. 그날의 저녁은 맛있는 추리와 비어 라오로 푸짐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우리 쪽으로 향하는 그 익숙한 짙은 물체. 멋쩍은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어.... 아.. 안.아녕하세요.!" 풋! 순간 긴장했던 우리는 웃음이 터지며, 거봐. 한국 사람은 아니잖아. 안심을 했고. 그런데 그쪽의 반응이 당황스럽다. 저.. 저. 한국사람인데요.


'방비엥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무대가 된 방갈로, 그리고 모두를 무대로 끌어들인 친절한 라오청년 로이 (2010, Vang Vieng)



방비엥의 잠 못 이루는 밤 (2010년판)


반나절 만에만 오해가 풀렸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던 그는 이곳에서 귀한 한국인 여행자가 있다는 친절한 라오 청년 로이의 호객으로 이곳 방갈로에 짐을 풀었단다. 한동안 한국 여행자는 의식적으로 피했는데, 어느 순간 한국말이 너무 고팠단다. 본인의 외모에 대한 오해도. 토종 한국사람이지만, 외국사람으로 곧잘 오해를 받아 친구들도 그를 아랍왕자라 즐겨 부르고, 한국행 비행기에서도 외국인용 입국 신청서를 종종 자연스럽게 받았다고 한다. 어색해서 순간 더듬더듬 꺼낸 그의 인사가 우리는 겨우 한마디 배운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새로운 여행자의 출연에 방비엥의 밤은 더욱 천천히 깊어갔다. 그리고 그 밤은 얼결에 다음 날에도. 어느 새 우리는 타국에 이곳이 어딘지도 잊은 채 라오라오에 취해, 방비엥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계속되었다.



라오라오, 잘란잘란을 만나던 날 (그 남자 편)

 

* 이 글은 방비엥의 그 남자, 이제는 라오라오가 된 그가 당시를 회상하며 직접 보낸 편지를 옮겼다.

내가 처음으로 찍은 그의 사진, 느닷없이 카드 마술을 선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나 수작스러워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두자 했던 것이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이게 될지. 방비엥은 알았을까


Letter from 방비엥  홀로 시작한 여행은 이제 갓 열흘 차. 씨엠립을 출발한 버스를 팍세에서 슬리핑 버스로, 비안티엔에서 로컬버스로 갈아타며 만 하루 만에야 도착한 방비엥에서 나를 처음 마중 나온 것은 구부러진 쏭 강과 절묘히 어우러지는 파등산의 그림 같은 등허리였다. 햇살이 부드럽게 공기 속에 퍼지자 주변 풍경은 마치 빛바랜 추억의 사진같이 아득해졌고, 나는 중국 무협영화 한 장면 속으로 성큼 들어온 것 같만 같았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짐을 풀고 동네를 천천히 산책해볼까 싶어 나선 길, 저 멀리 석양이 드리워진 그 길 끝에 여행자로 보이는 세 명이 나란히 걸어온다. 나를 숙소로 이끈 잘생긴 청년이 귀띔해주던 한국 여행자들인가? 일부러 피했던 한국말이 어느새 다시금 그리워진 나는 발걸음마다 귀를 쫑긋. 하지만 가까워진 거리가 무색하게 잦아든 그녀들의 대화, 한국사람들이 아닌가? 산책을 끝나고 숙소로 들어서는 길, 도란도란 대화 소리. 얼핏 들리는 것은 분명 우리말이다. 아까 길 위에서 마주쳤던 그들이 발코니에 모여 앉아 맥주로 서로의 여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거봐 내가 우리나라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어, 나는 분명 우리말로 인사를 한 것 같은데, 오랜만이라 어색해진 말투 때문인지. 그새 더 그을려 더욱 이국적으로 변한 얼굴 때문인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준비한 대화는 새하얗게, 그 어색함에 당황하고. 그래서 웃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그 밤에 취해갔다. 그리고 그 날 유독 하얗던, 분명 깜깜해진 밤이었는데도 빛이 나던 한 사람. 이제는 나의 가장 긴 여행을 함께 하게 된 사람, 잘란잘란을 만났다.   from 라오라오



잘란잘란, 라오라오를 만났을 때 (그 여자 편)


돌이켜 보면, '라오라오' 이 멋진 단어가 그날 밤 우리 모두에게 부린 수작. 나는 아마, 그를 본 순간 '라오라오' 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 같다 (2010, Vang Vieng)


그렇다. 이 글은 방비엥으로 호객하는 라오라오-잘란잘란, 그들의 본격 로드 연애담을 여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라오라오'라고 불릴 그 남자는 라오스에서 중국 국경을 넘어 윈난성으로, 라싸로, 인도를 거쳐 시작될 장기 세계 배낭여행을 꿈꿔 온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파릇파릇한 여행자였다. 처음에 그는 한국에서 받아 온 중국 비자를 잠시 접더라, 그리고 라오스에서 계획에 없던 태국 치앙마이로 넘어와 태국 최대 물축제인 쏭크란을 일행들과 신명하게 즐기더니. 이미 도착했어야 할 인도에서 다음 여행지로 갈 티켓도 그만 탑승일이 지나 탈 수 없게 되었다. 그 남자의 일정이 하나둘씩 딜레이 되었고 그렇게 마냥 동행할 수만 없었던 그들은, 어느 시점엔 각자의 소중한 여정을 응원해주며 각각 계획했던 인도로, 미얀마로 헤어졌다. 그리고 미얀마 여행을 끝내고 한 달 만에 그녀가 예정대로 방콕으로 돌아오던 날, 그 남자는 인도 바라나시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를 한 수 배워 빨간 통기타와 함께 방콕 공항에 나타났다. 이것이 그 둘의 따로, 또 같이하는 아주 긴 여행의 시작이다. 따로, 또 같이 하는 여행_ 지금도 그 둘은 함께 여행을 떠나, 같이 일정을 보내다가도 때때로 어떤 날은 각자 다른 장소로 시간을 보내고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다. 각자 보낸 그 하루를 조목조목 들려주며, 자신의 시선으로 그리고 상대의 감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여행은 그래서 늘 신선하고 여전히 궁금하다. 앞으로의 긴 여정을 동행하게 된 잘란잘란&라오라오. 그들의 여행기를 빙자한 본격 로드 연애담, 혹시 궁금하다면 별일 없이 또 찾아오겠다.       

   



여전히 우리는 길 위에 라오라오-잘란잘란 (2013, Cappado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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