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자마자 태풍이 잠잠해졌다는 이야기가 내가 인생에서 큰 좌절을 겪을 때마다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이야기야말로! 나를 춤추게 한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지금 스물한 살인 딸의 말이다.
아이가 세 살 되던 때 겨울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본 그림 한 장에 매료되었다. 손톱만 한, 그야말로 썸네일 이미지인 그 그림은 연두색과 주황색으로 그러데이션 된 배경에 눈, 코, 입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찍혀 있는 추상화였고 묘한 끌림으로 그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마침 그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그림들의 정체는 영국 발도르프 학교 학생들이 그린 것이었으며, 발달 단계별로 다른 그림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 단계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방대한 내용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특히 신문에서 본 그림은 자폐아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난방도 되지 않는 대학교 복도에서 시린 발의 통증을 느끼면서 보고 들은 그날의 기억은 내 인생의 한가운데서 중요한 한 점이 되었다. 마치 괘종시계를 들고 뛰어가는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떨어진 앨리스가 여행하게 된 이상한 나라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그림은 토끼였고 전시회장은 굴속이었으며 그 이후로 7년간 발도르프 교육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여행했다.
생일 이야기
모든 것이 이상적인 교육의 유토피아 같았던 발도르프의 이상한 나라에서 나는 운 좋게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고, 딸의 선생님이 되어 같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발도르프 유치원에서는 생일을 가장 큰 축제로 여긴다.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성스러운 날인 것이다. 생일날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손수 만든 왕관을 쓰고 망토를 입고 자기 나이만큼의 촛불을 끈다. 그날의 메인 활동은 케이크 만들기를 하고 모두가 함께 만든 케이크로 생일 파티를 한다. 친구들이 손수 바느질하고 뜨개질하고 그린 예술 작품들을 한 바구니 선물로 받는다. 생일을 축하받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들을 떠 올리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하고 싶어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게 한 얼굴들이다.
생일날의 하일하이트는 생일이야기다. 부모님이 생일에 참석해서 미리 준비한 생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주중에 부모님이 다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은 엄마가, 혹은 아빠가, 두 분 다 안 되는 경우는 할머니가 참석하기도 했다.) 태몽이나 태어날 때의 특별한 상황들을 엮어서 부모님이 들려주는 생일이야기는 모두 다 특별하고 재미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이도 어머니도 새롭게 보였다. 평소에 말을 안 들어서 조금 미웠던 아이도, 규칙을 잘 안 지켜서 불만이었던 어머니도 모두 유치원의 구성원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서 성스러운 한 인간으로느껴졌다.
아이들도 자신의 생일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들었고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태풍을 멈춘 아기
유치원 선생님이자 엄마였던 나는 아이가 네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네 번의 생일을 진행하면서 네 번의 똑같은 생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의 생일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태몽으로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높은 황금색 관을 쓰고 황금색 망토를 입고 봉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흡사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생일날의 착장과도 같았다. '그 꿈을 꾼 것이 이렇게 발도르프 유치원에 와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꾼 꿈인가 보다.'라고 말하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또 하나는 이 글의 시작에서 딸이 자신이 좌절을 겪을 때마다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태풍 이야기다. 바야흐로 2003년 9월 12일 밤, 태풍 매미가 상륙 중이던 때에 맞춘 듯이 뱃속에도 태풍이 몰아쳤다. 점점 더 강해지는 진통으로 태풍으로 정전이 된 상태에서 촛불을 들고 이동을 했다. 이동하는 중에 큰 나무가 쓰러져서 차를 덮칠 뻔 한 위기를 통과해서 병원에 갔다. 무통 주사도 맞지 않고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의지로 호흡법이며 운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무통 주사를 요청했는데 마취 전문의가 도착하기 전에 분만을 해서 결국 온전한 자연분만이 이루어졌다. 그토록 심하던 통증은 변비나 묵은 체증이 사라진 듯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고, 입원실로 옮겨졌을 때 창밖으로 보인 아침 하늘은 스카이 블루로 눈부시게 빛났다. 순간 나는 이 아기가 태풍을 멈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유치원생인 아이는 친구들이 준 선물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한 번도 생일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나 감상을 말하지 않았는데 스무 살이 넘은 지금, 그 이야기가 자신의 최고의 이야기라고 말하니 발도르프 교육의 성과에 대해서 학회에 가서 발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이야기가 얼마나 큰 위력을 갖는가에 대해서.
지금 스물 한 살인 딸의 다섯 살 생일 사진
대추씨 공주
딸의 간증을 듣자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의 탄생 설화가 생각났다. 나는 태몽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고 태어났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만 여러 번 들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체중이 평균 미달이고 너무 작아서 의사 선생님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될 것 같다고 하셨다고 한다. 인큐베이터에 넣기 전에 젖병으로 물을 먹이는데 작은 손으로 물병을 꼭 붙잡고 힘차게 빨아먹어서 이 아이는 안 들어가도 살겠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들은 나의 탄생 설화다.
이모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작아서 깜짝 놀라면서 대추씨만 하다고 대추씨 공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모는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나를 볼 때마다 대추씨만 했는데 이렇게 컸다며 대견해하셨다.
세상에 예쁜 공주들이 많고 많은데 예쁘지 않은 대추씨 공주라는게 두고두고 마음에 안들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명력이 강한 대추의 면면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지금의 나는 대추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씹어먹어 버릴 만큼 장성하여 푸르고 둥근 젊은 대추의 시절을 지나 쓰임새 많은 붉은 대추로 익어 벌써 주름진 대추로 늙어가고 있다.
대추씨만 하던 인간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온갖 감정을 느끼면서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신비야말로 오늘의 기적이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탄생 설화가 있다. 자신의 이야기는 스스로에게 힘을 주어 삶을 견뎌내게 하고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자신만의 이야기의 놀라운 힘이야말로 우리가 올라타야 할 거인의 어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