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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14. 2024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원라이너> 2화.



러시가 뜰 때


호텔에서 일할 때, 강도 높은 육체노동도 힘들었지만 체크인, 체크아웃이 분명한 일의 성격으로 인해 시간의 경계와 싸우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곳은 계산상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이라도 예외 없이 끝을 내야 한다는 부조리한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체크인 시간이 다가오는데 청소가 안된 방이 남아 있을 때, 그곳의 전문 용어로 ‘러시(rush) 떴다’라고 말했다. 러시가 뜰 때, 조급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그 '러시'라는 이름의 태풍의 핵 안에서 유난히 초조해지고 불안해하는 증상을 지켜보았다.


학창 시절이나 다른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시간은 존재했고, 늦거나 결석하는 일이 거의 없이 성실함 하나만은 지나칠 정도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곳에서 시간에 쫓길 때는 꼭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체크인 시간이 임박해지고 고객이 로비에 와 있다는 러시 콜을 받을 때나 마무리가 안 되었는데 복도 저 끝에서 트렁크 끄는 바퀴 소리가 들릴 때면 나를 긴급 체포하러 오는 경찰의 발자국 소리처럼 다급하게 들렸고, 그럴 때면 무슨 동작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정비를 마감하는 괴력의 신공이 발휘되었다.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사라지고 심리적인 시간,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만이 내 앞과 뒤, 위와 아래, 양쪽 옆을 촘촘히 둘러싸고 압박해 왔다. 그런 날은 꿈에서 진짜 경찰이 총을 들고 내 집 문을 두드리거나, 괴한이 문을 따고 침입하는 악몽을 꾸었다. 프로이트 적으로 말하면 징벌적 초자아가 과도하게 작용하는 허약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환상이었다.


의식적으로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여자가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공간과 돈이 있어야 했기에 글을 쓰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초식동물이 되어 맹수가 쫓아오는 환상에 시달리며 밀림으로 빙의된 호텔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존재 불안 속에서 과도하게 성실했던 내 안의 시계는 내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원인으로 인해 심각하게 고장이 나 있었고, 시계를 고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윅스퀼의 짚신벌레


 짚신벌레는 어떤 곳에서든지, 무엇이든 자극을 받기만 하면 도주 운동을 시작한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 야콥 폰 윅스퀼 | 정지은 옮김 | 도서출판 b


윅스퀼은 시간과 공간의 환경세계 속에서 반응하는 동물들의 지각적 특징을 흥미롭게 설명하는데, 그중 짚신벌레의 행동에 내 병든 영혼이 투영되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 옆에 있는 남자 중학교와 같이 운동장을 썼는데, 그때 달리기를 하는 나를 보고 남자애들이 "우와! 벤존슨 누나다!" 하고 소리쳤던 일, 입시미술을 할 때, 그림은 잘 그리는데 속도가 느린 점이 가장 극복하기 힘들었던 삼수생 선배가 나를 부러워하면서 "속도에서 만큼은 니가 전국 1등일 거다."라고 했던 말, 유리드미를 할 때, 샤롯데 선생님께서 인형같이 크고 예쁜 눈을 더 동그랗게 뜨시면서 "You're so fast!"라고 감탄하셨던 일을 비롯하여 과거의 기억 곳곳에서 "빠르다"는 행동의 특징으로 받았던 칭찬들이 들려왔다.


그 칭찬이 칭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밀림에서 쫓기는 동안, 내가 지나치게 서두르게 된 동기가 된 쫓아오는 것들을 떠 올렸다. 이제는 더 힘을 쓸 수 없는 멸종된 공룡, 다 부식되어서 발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끊어질 족쇄, 옛날 옛날에 꺼진 불길, 오래전에 잠잠해진 쓰나미,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밀린 숙제…….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몸에 무언가 닿기만 하면 도주 운동을 시작하는 짚신벌레와 괘종시계를 들고 바쁘게 뛰어가는 앨리스의 토끼와 앞만 보고 맹렬하게 달려가는 재규어와 여름 바닷가에서 두꺼운 겨울 코트를 걸친 채 느릿느릿 걷는 무채색의 노숙인들...... 처벌 공포들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분열된 자아의 환상이 만들어 낸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들의 퍼레이드는 내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속도를 줄이고 초점을 맞추어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하자 멈칫하더니 점점 희미해지고 작아지더니 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얀 마텔의 나무늘보


먹이를 먹을 때만 멈춰 서고 다른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나타나기만 하면 놀라서 도망치는 짚신벌레의 도주행동을 슬프게 생각하면서 힘 있는 외부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의 힘으로 외부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주체적인 생명체, 내 안의 자석 바위를 그려보았다. 그런 이미지로 다가온 것은 얀 마텔이 묘사한 나무늘보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나의 나무늘보는 연재브런치북 <건강할 결심>의 표지 모델로도 활약한 바 있다. 아름답고 간결한 이 글이 너무나 좋아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읽고 낭송하고 베껴 쓰면서 병든 영혼의 치료제로 사용하고 있다.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푸른 정글 한가운데, 나무늘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귀가 먹먹해지는 폭우에도 나무늘보는 개의치 않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만물은 다시 소생하고 동물들도 폭우를 고맙게 생각한다. 그 와중에 나무늘보는 책을 가슴에 품고 빗물에 젖지 않도록 보호한다. 나무늘보는 한 단락을 겨우 읽었다.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그 단락을 다시 읽는다. 나무늘보는 그 단락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나무늘보는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 아름다운 이미지다. 나무늘보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무늘보는 아주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정글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빗줄기 사이로 다른 나뭇가지들에 맺힌 밝은 점들이 보인다. 예쁜 새들이다. 아래에서는 화난 재규어가 앞만 쳐다보며 맹렬하게 달리지만, 나무늘보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자족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늘보는 온 정글이 자신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한다. 폭우는 여전히 계속된다. 나무늘보는 느긋하게 잠든다.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 얀 마텔 |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앞만 쳐다보고 맹렬하게 달리는 화난 재규어에 가까웠던 내 모습을 돌아본다.

 자족의 한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잠드는 나무늘보를 바라본다.    




사사키 아타루의 일침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가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이는 나에게 매우 혁명적인 문장으로 다가왔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썼다.

"카프카 같은 사람에게 '죄'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가능한 한 깊이 감안하여 우리도 그것을 흉내 내보기로 합시다. 성급함은 삼가고 천천히 나아가기로 합시다."

한동안 나는 초조해질 때마다 심호흡을 하듯이, 주문을 외우듯이, 화살기도를 하듯이, 스폰지 밥이 불안하면 새끼손가락을 들듯이,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를 되뇌었다. 효과가 있냐고? 물론이다.


사사키 아타루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 송태욱 옮김 | 자음과 모음




청소부 베포의 가르침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해 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게 중요한 거야."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51쪽)


모모가 좋아하는 친구, 청소부 베포의 '기본에 충실한 청소 철학'을 청소 아르바이트 로드 위에서 수없이 읽고 필사를 했다. 그때는 따옴표 속에 든 파란색 글에 집중이 되었다면, 오랜만에 찾아본 오늘은 따옴표 밖에 있는 빨간색 글에 시선이 머물렀다. 파란색이든 빨간색이든 집중하면서,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지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이 불행의 씨앗'이라는 엄정한 진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미하엘 엔데 | 모모 | 한미희 옮김 | 비룡소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불행을 자초하는 거짓말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는 거예요





경계를 넘나들며 나만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멋진 문, 글렌굴드가 연주한 바흐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 이 페이지에 연결해 둔다.


Bach, The Goldberg Variations - Glenn Go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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