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라이너> 22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뭔가? 진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거듭하며 심연을 들여다보던 시절, 나는 누구에게도 선뜻 말하지 못할 숨겨둔 비밀처럼 '작가'라는 이름을 흠모했다. 어린 시절, 다른 것 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았고, 그림을 많이 그렸고, 그러다 보니 잘 그리게 되었고, 사람들이 꿈을 물어볼 때면 어느 순간 '화가'라고 말하거나 써내기 시작하면서 꿈이 '화가'로 굳어졌다. 실제로 미술 대학을 갔고, 웹디자인이나 아동 미술 학원, 애니메이션 등 그림 관련한 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왔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서운 말처럼 나에게 그림은 하다 보니 하게 된 일이었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유아기 소망이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청소년기에 움튼 적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고, 책도 많이 읽지 않았고, 문학에 발을 들이기에는 그림의 기량이 월등히 앞서 있었으므로 작가의 소망을 외면하고 움트던 싹을 말려버린 것 같다.
언젠가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의 강연을 듣다가 어떤 표현에 소름 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루지 못한 꿈은 귀신이 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작가'라는 이름, 그 꿈은 원하지만 닿을 수 없는 아련한 신기루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었고,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어느새 꼭 이루고 싶은 회한이 되어 있었다. 하정우 배우가 <하정우, 느낌 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화가가 된 계기에 대해 쓴 에피소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직업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입국 신청서를 적는 상황에서 직업란에 무심코 '화가'라고 적은 것이 훗날 진짜 화가가 된 씨앗이 되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 에피소드를 나도 씨앗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직업을 쓰는 기회가 있을 때 '작가'라고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래 뭔가를 훔쳐먹는 것처럼, 하면 안 되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두 번, 세 번... 여러 번 직업란에 '작가'라고 적으면서 가짜 작가에서 진짜 작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생각하고, 작은 것을 하나씩 해보면서 '작은 완결'들을 이루어갔다.
'작은 완결'이란 이런 것들이다. 눈 뜨자마자 하루 세 쪽의 모닝 페이지 쓰기, 마라톤을 하는 하루키의 일상과 같은 작가들의 생활 습관을 흉내 내기, 글쓰기 공모전에 출품해 보기, 책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무엇보다 브런치 작가 되기, 작가 친구들을 만들면서 서로 작가님이라고 부르기... 이렇게 비교적 문턱이 낮은 일들을 해나가며 '작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더 이상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없어졌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 '네이버 인물 정보 시스템'을 이용해서 정보를 등록하면서 직업란에 '작가'라고 쓰는 것으로 '작가'라는 직업을 한 번 더 공고히 하였다. 누군가는 직업의 정의로 '주된 수입원이 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 정의에 의하면 아직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원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큰돈을 버는 작가에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한다. 요즘 세상에 직업이고 직장이고 영원한 것은 없지 않은가. 매일 아침 목표를 새로이하고,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반복해서 시도하면서, 절대 안 될 것 같던 것에 조금씩 닮아가고 되어가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면 될 일이다.
한때 유아기 소망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이 존재적 욕구인 글을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여겨져서 잠정적 은퇴를 선언하고 글로 밥벌이를 하게 될 때까지 호텔 룸메이드 일을 비롯해서 허드레 일들을 하며 생계를 해결했던 치기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글을 쓸 수 있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한때 내가 외면했던 그림의 공이 가장 컸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의 파도에 수없이 얻어 맞아 모난 곳이 둥그러지면서 깨닫는 바는 나를 스쳐간 사람과 사물,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주 써먹는 홍상수 감독의 명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와 같이 그때그때 시절 인연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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