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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07. 2024

아무것도 아닌 사람

-<작가님 글도 좋아요> 27화. 베르톨트 브레히트




'고독력 수프 Episode#4.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쓰고 나서 제가 좋아하는 책, 브레히트의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의 '코이너'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 책의 옮긴이 김희상이 쓴 옮긴이의 말을 필사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다'는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현실을 변혁할 새로운 힘, 새로운 긍정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독일의 극작가, 시인, 연출가



코이너는 '카이너'의 변형이다. "이히 빈 카이너 Ich bin keiner."(I am nobody.)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Keuner)'이라는 뜻이다. 이 'Keiner'를 브레히트는 바이에른 사투리 운에 맞춰 'Keuner'라 바꿔 썼다. 왜 브레히트는 굳이 이런 이름을 골랐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생각만 즐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본인이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탓에 여러 짐작만 난무한다.



다양한 해석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발터 벤야민의 관점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Keiner)는 "기묘하게도 고대 그리스어의 코이네(koine)를 연상시킨다." '코이네'는 '공통의 것', '일반적인 것'이라는 뜻을 갖는 단어다. "그런대로 괜찮은데, 생각은 공통의 것이니까." 벤야민의 촌평이다.



생각은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정, 곧 '아니다'(no, kein) 하고 말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 주는 바탕이다. 젊은 시절 현실의 풀뿌리 하나조차 어쩔 수 없다는 안타까움으로 허무주의에 사로잡혔던 브레히트는 헤겔과 마르크스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부정적 사고'에 눈뜬 사회주의자로 변신한다. 이런 맥락에서 코이너는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은 세상을 세우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다. 브레히트가 주력했던 '서사극'(das epische Theater)이라는 장르는 이처럼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현실을 고찰하고자 하는 무대였다.



그런데 벤야민은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관점을 열어 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라는 이름의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포로가 된다. 오디세우스와 열두 명의 부하를 동굴에 잡아 두고 매일 두 명씩 잡아먹던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의 차례가 되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묻는다. 이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OUTIS'라 밝힌다. '우티스'의 뜻은 'Nobody', 곧 코이너다. 오디세우스는 먼저 포도주를 폴리페모스에게 권해 취하게 만든 다음, 불타는 장작개비로 외눈을 찌른다. 폴리페모스가 비명을 지르자 다른 키클롭스들이 달려와 누가 그랬느냐고 묻는다. 폴리페모스는 나를 찌른 놈은 '우티스'라고 대답한다.(이 경우는 '아무도 아니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오디세우스는 위기를 모면하고 탈출에 성공한다.



참으로 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구원이 찾아왔다는 말이 아닌가? 인생을 살며 맛보는 가장 괴로운 순간은 나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확인을 할 때가 아니던가.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큼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나는 잘났다는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남보다 잘나지 않은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은 자신이 정작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남보다는 잘난 게 그 숱한 '나'라는 사람들이다. 거참 이상한 일이다. 잘났다는 말은 비교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못난 사람이 분명 있어야 할 터. 나는 못났다고 자체하는 사람은 그러나 가뭄에 콩 보기보다도 어렵다. 혹시 내가 못나서 그런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코이너는, 브레히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할 것을 권고한다. 이는 곧 자신을 벌거벗겨 현실 앞에 세우라는 권유다. 스스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잘나지 않은, 잘나지 않은, 잘날 것이 없는 'Nobody'가 되어야 철저한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저한 변혁의 첫걸음은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나는 '코이너 씨'를 브레히트의 자화상으로 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학계에서는 다른 의견도 분분하다.) 코이너 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면면은 영원한 실향민브레히트가 겪은 신산한 인생의 고스란한 증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두 번의 포기"라는 이야기다. 나치스의 폭압에 내몰려 망명의 길에 오르며 겪는 좌절을 이보다 더 담담하게 들려줄 수 있을까?! "유감을 표하는 한 마디와 동의를 표하는 다섯 마디"로 자신이 "완벽하게 지워지는" 경험을 브레히트는 아무것도 아닌 자 '코이너 씨'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어려운 포기였다." 이 표현은 자신을 잘난 사람으로 꾸미려는 일체의 시도를 포기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은 일체의 꾸밈을 버릴 때 비로소 물꼬가 트인다. <폭력에 맞서는 대책>은 얼핏 읽으면 비굴하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폭력보다 더 오래 살아야만 하니까" 하는 말로 코이너 씨는 폭력에 맞서지 않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브레히트 자신이 온몸으로 겪은 폭력의 가감 없는 묘사가 아닐까. 폭력에 맞서는 투사가 아닌, 폭력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모습을 그려 보임으로써 브레히트는 함께 폭력에 대처할 공통의 방법을 모색하는 생각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리라.



코이너 씨의 정체를 두고 의문을 품었던 신학자 카를 티메(Karl Thime, 1902~1963)는 <악마의 기도서? Des Teufels Gebetbuch?>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를 철저히 부정한 끝에 결국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긍정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 더불어 사는 인간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너'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철저히 부정된 인간, '내가 아닌 인간', 공 프롤레타리아의 총합이다."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공직자의 입에서 공공연히 '너희는 개, 돼지다'는 말을 듣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상이다. 이처럼 굴욕적인 부정을 당하기 전에, 우리는 철저한 자시부정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현실을 변혁할 힘이 결집된다. 현실은 갖은 모순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모순의 난장판이 빚어지는 1차 원인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혹시라도 내 밥줄이 끊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이다.



브레히트는 독일에서는 나치스를, 미국에서는 자본주의를, 다시 동독에서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의 모순에 당당히 맞섰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이 실종된 오늘날, 코이너 씨와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익혀 보는 것이야말로 좋은 선택이다.




-옮긴이의 말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브레히트의 풍자 산문 '코이너 씨 이야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 김희상 옮김





양인모│우아한 유령 (W.Bolcom, Graceful Ghost R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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