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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Oct 24. 2024

로베르트 발저, 최후의 산문

-<작가님 글도 좋아요> 25화.



최근, 새로운 일을 시작하여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써칭하지 못했으므로 이번 <작가님 글도 좋아요>는 제 삶에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1878 - 1956)의 단편, <최후의 산문>을 필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로베르트 발저를 알게 된 것을 인생의 큰 축복으로 여기며...






   아마도 이것은 내 최후의 산문이 될 듯하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나, 양치기 소년은 이제 산문을 써서 투고하는 일을 멈추어야 할 것 같다. 모든 사정을 고려해 봤을 때 너무도 어려운 것이 분명한 이 분야에서 은퇴를 선언할 최적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평화롭게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기쁜 심정으로 다른 일거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한숨부터 내쉬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조금 훌쩍거려야 하고 세 번째로는 새 챕터를, 혹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거의 별 쓸모없는 자잘한 산문들을 써왔다. 얼마나 어려운 시기였는지! 수백 번이나 나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다시는 이따위 글을 써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바로 그날 혹은 다음 날 이미 다음번 산문을 쓰고 그걸 보내고 있었는데, 왜 그런 행동을 반복했는지 나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산문 투고 분야에서는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업적은 그것의 우스꽝스러움에 걸맞게 광고탑에 커다란 벽보로 붙어 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 순정을 알아보고 감탄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이다. 마음에 드는 수준의 산문작품을 생산하고 투고하는 일이라면 나는 엄청난 열성을 다했으며, 하루 종일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시계공의, 재단사와 구두수선공의 작업실인 내 방을 떠난 원고는 비둘기 장에서 놓여난 비둘기처럼, 벌통을 떠나는 벌떼처럼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정신없이 잉잉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와 파리떼조차 내가 전국 사방으로 날려 보낸 산문들보다는 덜 분주했을 것이다.



   도서관장들은 내가 보낸 산더미 같은 스케치, 연구논문, 산문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들은 그것을 읽고 냄새 맡고 쏘아본 다음 한참을 고민하다가 서류함이나 서랍 속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 보관했다.



   그러면 적절한 기회가 곧 돌아왔던가? 절대 아니다! 기회는 결코 서둘러 오지 않았다. 기회의 기미가 보일 때까지는 몇 년이 걸리곤 했으며, 그사이 불운한 남자는 자신의 지붕밑 골방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기쁨에 넘쳐서 쓰고 얼른 날려 보낸 글들은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처박혔고 서서히 찌그러지고 오그라들었다. 구절과 문장이 적힌 페이지들이 답답한 서랍 속에서 바싹 마르고 시들어 비참하게 명을 거두었다. 내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날렵한 생각들이 늙고 흐릿해지고 창백하게 빛이 바래갔다.



   초록으로 피어나던 젊고 싱싱한, 붉고 둥근 뺨을 가졌던 어느 산문은 6년이나 황량하기 짝이 없는 장소에 유폐되어 있던 바람에 나중에는 완전히 앙상해져 버렸다. 그래서 마침내 그것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 때,  즉 출판되었을 때 나는 감격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감정이 북받치는 불쌍한 아비처럼 말이다.



   산문을 써서 일단 모든 편집자에게 다 보내보자고, 혹시 그들이 원하는 내용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매체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형식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을지 상상해 보라. 만약 누군가가 산문을 쓰고 싶다면서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그가 품고 있는 계획 그 자체가 불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희망에 차서 매일매일 써서 보냈던 낮의 산문과 밤의 산문, 희극 산문과 비극 산문, 감동 산문과 장식용 산문, 문의 산문과 계단의 산문, 보석 산문과 예술 산문들은 대부분 아무런 쓸모없는 산문으로 판명 났고, 거의 아무 곳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그 어떤 편집자가 원하는 내용도 아니었고, 어떤 매체에도 적절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놀란 나머지 거짓된 희망에서 화들짝 깨어났을까? 전혀 아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써서 넘겨야겠다는 용기를 새롭게 다졌고, 완성하고 보내기를 반복했다. 10년 동안 나는 지치는 법 없이 다른 이들의 서랍과 골방, 창고를 원자재 비축물로 그득그득 채워왔다. 덕분에 창고의 주인님들은 허리가 부러져라 웃어댔을 테지만. 



   나는 타인의 결함을 내 산문작품들로 메워온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이성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장관님들은 내 산문을 가득 실은 마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 온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것들을 실어 보내기 위해 화물열차 하나가 통째로 필요했다. 내가 실어 보낸 것들은 자비롭게도 받아들여지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 보듯 훤히 알고 있는 사실을 나 혼자 전혀 알지 못했으니, 나는 멍청한 것 한참 이상이었다. 나는 발가벗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데 안 그래도 말쑥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화려하고 값비싼 재물을 가득 쌓아 두고 있었다. 내 서랍은 깨끗하게 텅 비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서랍을 채워주느라 그동안 바빴던 것이다. 하품 날 정도로 지루한 나 자신의 공허를 걱정하는 대신에 안 그래도 매력 넘치고 세련된 사람들의 윤택을 위해 그토록 열심이었다. 신들은 문턱이 닳도록 우체국을 들락거리는 이 한심한 인간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웃다가 몸이 터져버릴까 봐 걱정한 적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모한 용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 한편으로는 거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난쟁이. 여기서는 주인이며 저기서는 노예.



   내 자식들이 잘 있는지, 여전히 예쁘고 건장한지, 혹은 아직도 살아 있기는 한 건지 내가 수줍게 문의하면 위압적인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건 당신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소." 아버지가 되어 자식들의 안위를 상관하지 말라니, 내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애써서 만들어낸 귀여운 것들이, 이제는 내가 감히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품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소식을 받았다. "당신의 산문작품이 분실되었습니다. 너무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으며 새로운 작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새 작품을 또 잃어버릴 겁니다. 그래야 당신이 또다시 새 작품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부지런히 쓰셔야 합니다. 불필요한 불쾌감은 이를 악물고 삼켜버리세요.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는 한 줄도 쓰지 않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테다!" 그러면서도 나는 바로 그날 혹은 다음 날에 새로운 산문을 멋지게 써서 보냄으로써 온화한 인성의 소유자라는 내 명성에 다시금 광채를 더했던 것이다. 당나귀의 등에는 신의 이름으로 짐이 실리고, 이 세상에 양들이 존재하는 한 늑대에게는 행복한 날들이 계속된다. 하지만 나는 겸허하게 몸을 낮추고 입을 다물겠다. 부지런히 새로운 산문을, 짧고 아기자기한 글들을 계속해서 쓰겠다. 산문작품 투고에 목숨을 걸겠다는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그의 계획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해주겠다.



   "언제 한번 내게 크게 당할 겁니다! 당신에게 복수할 테니까요. 당신이 몸을 떨며 용서를 구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말이죠." 어느 날 마치 삶이 카드놀이인 것처럼 안녕과 재앙을 주관하는 한 데르비시 현자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떤 한 작품이 갖은 노고 끝에 완성되어 앙상하고 가엾은, 관대한 아량을 애걸하는 짧고 연약한 그 산문이 마침내 출간되고 나면 작가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한다. 즉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한 독자라는 존재와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내 펜이 만들어낸 산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는 절대 대면하고 싶지 않다. 뭐라도 좋으니 차라리 아무 상관없는 다른 것들과 대면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이 따위 허접쓰레기를 들고 독자 앞에 서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산문 투고로 빵을 벌려는 사람이 수확하는 보답은 보통 이런 식이다.



   더 이상 거짓된 희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그 무엇에라도 기쁜 마음으로 순응하겠다. 마침내 나는 자유다. 나는 환호한다. 환호하지 않는다면 나는 웃는다. 웃지 않는다면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안도의 숨을 내쉬지 않는다면 나는 양손을 비빈다.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자가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그것과 관련되는 조언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주는 말을 그에게도 똑같이 해주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매년 기분이 들뜨면 봄이면 즐거운 봄의 산문을, 가을이면 갈색으로 물든 가을 산문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크리스마스 산문이나 흰 눈이 흩날리는 산문을 써왔다. 이제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지난 10년간 내가 해왔던 짓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다. 마침내 엄청나게 방대한 지불을 한 다음에야 나는 종결선을 그었고, 내가 영영 따라잡을 수 없었던 어떤 역할을 행사하기를 멈췄다.



   만약 내가 진실을, 불복종을 투고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꾸짖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당신은 여기나 저기나 어차피 자유는 없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누구나 다 서로를 매처럼 지켜보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그러니 유념하세요. 당신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한단 말입니다."



   내 상황은 나쁘다.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전에는 일이 더 간단했고 필요할 때마다 광고를 내면 그만이었다. "젊은이가 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광고를 내야 할 판이다. "아쉽게도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고 젊기는커녕 늙수레 하고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린 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잠자리를 제공해 주실 분을 찾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4월의 눈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나는 가난하고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딱 이런 산문을 끼적일 만큼의 능력뿐이다.



   "따각, 따각, 따각, 나는 왜 이 모양인가? 그래도 분별력은 있지 않았던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 건가? 잔심부름꾼 정도? 그런 비슷한 불가피한 운명을 머릿속에 강하게 그려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잠과 깨어남 사이 영원히 지속될 듯한 소리를 듣는다. 오, 나는 비명을 지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나는 내 무의미함의 총량을 의식한다. 아니다. 인간은 그 정도로 위해하지 않다. 인간은 그냥 불쌍하고 무력하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스물하나에서 서른여덟 군데의 편집부에 나는 산문 <따각, 따각, 따각>이 그들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투고를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스물하나에서 서른여덟 번이나 거짓으로 판명나버렸고, 그 소름 끼치는 작품은 그 어떤 호응도 얻지 못했다.



   서른 명에서 마흔 명에 이르는 초인들이 분명히 뛰어난 그 작품을 수록하기를 거부했다.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아주 단호하게 물리쳤으며 번개 같은 속도로 내게 되돌려 보냈다. 



   그런 독재자 중 한 명이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세상에, 당신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든 겁니까?" 또 다른 독재자는 이랬다. "당신의 마술작품을 차라리 <베네치아의 밤>에 보내시지 그랬나요? 분명 그들은 기뻐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잡지는 당신의 따각, 따각, 따가닥이나 당신의 다섯, 여섯 어쩌고는 제발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따각, 따각, 따각>을 그가 말한 잡지사로 보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아주 예의 바른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이런 답신을 보내왔다. "아아, 이토록 매혹적인 작품은 우리 잡지 같은 곳과 어울리지 않는가는 사실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잡지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다른 잡지에서는 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나는 그 작품을 쿠바로 보냈다. 그곳에서는 전혀 관심의 표명이 없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한구석에 틀어박혀 끽소리 내지 않는 것만이 최선임을 알게 되었다.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산책자>, 배수아 옮김, 한겨레 출판 (207 -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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