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그리고 다른 영화들
내 인생에서 가장 날씬하고, 피부 좋고, 값비싼 화장을 했던 시절. 평소 같으면 지갑을 열기까지 몇 번을 고민했을 액수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그 시절. 드디어 내 인생의 진정한(?) 공주가 되어 온갖 웨딩드레스를 알아보러 다니던, ‘평생 한 번인데-’라는 대의명분에 기대어 비싼 숙소를 예매하고 멋진 여행용품들을 사두었던, 아- 아름다웠던 그때!
결혼 준비란 그런 것이다. 점심시간을 몽땅 투자해서 신혼여행 관련 정보를 검색검색검색하고 있으니 회사선배들이 지나가며 몇 마디 건넨다.
"결혼 준비하는 구나? 좋겠다- 제일 좋을 때지-“
“나는 결혼은 안부러운데 신혼여행은 부러워, 신혼여행 다시 가고 싶다!“
“맞네- 신혼여행이 최고지! 근데 그거 알아? 인생의 절정은 신혼여행이야. 그 후로부터 쭉쭉 내려간다-살아봐-”
이 말을 정확히 누가 했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안난다.
“인생의 절정은 신혼여행이야.”
신혼여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냥 얘기하면 심심하니까 마침 최근 개봉한 영화 한 편을 통해 신혼여행, 그리고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바로, 관객수 300백만명 돌파, 골든 글로브 7관왕에 빛나는 <라라랜드>! 지금부터는 영화에 버무려진 결혼에 관한 다소 긴 잡담이 되겠다.
라라랜드 la-la land : 꿈의 나라, 비현실적인 세계 ((특히, 영화·TV 산업과 연관지어 Los Angeles, Hollywood, 남캘리포니아를 가리킴)) -출처: 네이버사전
필자는 이 작품에 홀딱 반해버렸다. 서로를 알아보고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재즈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배우지망생 미아(엠마 스톤)의 운명적인 만남, 철저하게 계산된 롱테이크 댄스와 화려한 색감, 귓가에 맴도는 음악까지(♬City of Stars~♪). 포장이 끝내준다. 이 뿐인가, 잘 짜여진 대사와 매력적인 연기. 버릴 데가 없다. 세심하고 화려한 영화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엔딩부분의 회상씬(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원래 두 주인공은 세바스찬이 피아노 연주를 하던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났다. 피아노 연주에 감명 받은 미아가 그에게 다가가지만 세바스찬은 해고를 당한 직후라 그녀를 무시하고 나가버린다. 엔딩의 회상씬에서도 이 상황은 똑같이 재현된다. 하지만 끝이 다르다. 어긋났던 영화 속 현실과 달리 회상씬에서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눈다. 다른 회상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스토리와 같은 상황, 다른 결말이 빠르게 이어진다.
뮤지컬을 보는 듯한 환상적인 색채와 이미지, 컷컷의 빠른 흐름으로 구성된 이 회상씬에서 실패, 아픔이란 없다. 미아가 배우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1인 연극도 대성공, 두 주인공은 헤어지지 않았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는다. 모든 실패와 상처가 사라진, 완벽한 성공과 긍정의 세상이 화려하고도 빠르게 펼쳐진다. 결국 회상씬은 영화 속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두 주인공의 꿈이 완벽하게 이뤄지는 세상, 미아와 세바스찬의 "라라랜드" 인 셈이다.
이쯤에서 왜 영화<라라랜드>를 보며 신혼여행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셨는지. 신혼여행은 일종의 결혼계(?)의 "라라랜드" 가 아닐까. 결혼생활을 기대하는 첫 시작, 일상을 벗어나 관광지로서 누리는 낯선 땅에서의 며칠은 그 자체만으로 낭만과 환상을 품고 있다. 이 사람과 앞으로 얼마나 멋진 일상을 보내게 될지 설레는 마음이 서로에게 가득 느껴진다. 옆에 있는 내 짝과 보내는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 캬- 좋다! 하지만 이 순간, 어쩐지 이 한 마디가 기억난다. "인생의 절정은, 신혼여행이야."
일상으로 돌아온 결혼 생활은 신혼여행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눈물 나고,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하다. (결혼의 일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영화로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보고 싶다면 사라 폴리의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를 추천한다.)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신혼여행, 그리고 이어지는 힘겨운 결혼의 일상. 신혼여행은 인생의 정점을 찍는 이벤트이며, 그 이후에는 쭉쭉 내려간다는 선배의 말은 일견, 틀리지 않았다.
많은 기혼의 선배들은 오늘도 여전히 신혼여행 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이미 결혼해버렸거나 앞으로 결혼할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할까. 그 답을 다시 영화<라라랜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이 작품이 보여줄 가상의 세계를 기대하며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리고 감독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라라랜드를 즐긴다. 로맨틱하고 재밌고 부럽고 잠시나마 꿈꾸게 해주는 화려하고 섬세한 영화 세계에 빠져든다. 그런데 회상씬이 등장한다. 모든 것이 성공하고 긍정되는 회상씬을 보면서 관객은 영화 속 세계가 아프고, 실패하고, 헤어져야했던 두 주인공의 현실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관객(나)에게는 ‘환상’이지만 그들(주인공)에게는 ‘현실’인 영화 속 <라라랜드>의 세계. 영화 현실보다 더 기하학적이며, 화려하고 비현실적인 회상씬의 이미지 덕분에 관객은 두 주인공이 살아왔던 세계가 현실이자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이다. 주인공 ‘길(오웬 윌슨)’은 거리를 헤매다가 평소에 동경해왔던 1920년대 파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헤밍웨이, 피카소 등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뮤즈였던 ‘아드리아나(마리오 꼬띠아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밤마다 그 시대로 돌아가 꿈꿔왔던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와 아드리아나에게 이번에는 1890년대의 르네상스로 돌아갈 수 있는 마차가 등장한다. 아드리아나에게 1920년대는 지루한 현실일 뿐이다. 그녀는 더 과거, 예술의 시대인 1890년대를 동경하며 그곳으로 떠나길 희망한다.
영화<라라랜드>는 사랑과 꿈이 이루어지는 환상의 세계인 ‘라라랜드’를 설정했다면 <미드나잇 인 파리>는 ‘과거 예술에 대한 동경’을 현재의 시간 속에 재현시켰다. 다른 게 있다면 전자는 영화의 구조 자체, 그리고 (단 한 번도 작품 속에서 언급되지 않은)작품 제목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면 후자는 대사 등을 통해 전하고자하는 바를 언어적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처한 비루한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바꿀 수 있는 '무엇'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엇을 찾아내어서 나의 삶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역시 또 하나의 현실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지. 영화 <라라랜드>의 회상씬을 중심으로한 환상과 현실의 구조, <미드나잇인파리>가 보여준 과거 예술에 대한 동경, 그리고...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혹은 꿈꾸었던 결혼.
하지만 영화 <라라랜드>의 세계가 그러한 것처럼 당신의 환상이었던 결혼은 (당연하게도) 현실이다. 슬픔과 상처, 기쁨과 위로가 뒤섞여 있다. 그래서 현실을 벗어나려는 도구로서의 결혼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진짜 마지막, 다른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 엄마가 된 미아는 세바스찬의 첫 번째 연주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남편이 한 곡을 더 듣겠냐고 묻지만 그녀는 나가자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재즈바를 나서는 길, 두 주인공의 눈이 마주친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를 향해 옅은 미소를 보낸다.
영화 <라라랜드>의 세계가 그렇듯이 결국 인생도 현실과 환상의 뒤범벅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성공하고 긍정되는 '회상씬'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공허하다. 슬픔이 없는 기쁨은 불가능하다. 실패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지루함을 딛고 일어나야만 낭만을 느낄 수 있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목표는 사랑과 꿈이 이루어지는 '라라랜드'였고, 결국 그들은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실패하고 오해하고 헤어져도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던, 그리고 상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조력하고자 했던 미아와 세바스찬.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잘 결혼하고 잘 사는 건지 사실 필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환상도 결국에는 깨질 것이며, 그 무엇도 당신을 구원해줄 수 없다. 그렇게 인정하자. 그리고 나의 방식으로, 나의 몫을 다해 우리 일상을 달려가자. 그렇게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가는 현실은 그 어떤 환상보다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깊이 있을 것이다,라고 감히 말해본다. 나 역시 갈 길이 멀다. 당신도 나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에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