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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Mar 07. 2019

제제를 떠올리며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이유의 '제제'라는 노래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주인공 제제를 표현한 가사가 문제였다. 아동을 성적 대상화한 것에 대한 비판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나는 아이유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아이의 기묘한 이중성과 욕망을 나무 입장에서 서술한 노래가 매력적이었다. 은유적인 유혹의 단어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노골적으로 섹스어필하는 다른 콘텐츠에 대해서는 별 말 없다가, 고상한 문학작품 속의 아이를 천박하게 그려냈다고 펄쩍 뛰는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예술적인 해석을 읽어내지 못하는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어디서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다. 표현의 자유의 수호자 입장에 선 것 같은 나의 견해에 괜히 혼자 우쭐할 뿐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도 '제제'를 언급하는 글이 있었다. 작가가 수시 모집 면접 자리에서 겪은 일화였다. 작가는 학대 아동 멘토링 봉사활동을 했었던 한 학생에게 '제제' 논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학생은 '그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알았다면 그런 노래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작가는 '아이유의 노래에서 제제의 이중성을 표현했듯이, 학대받은 아동을 계속 슬픈 존재로만 머무르게 할 게 아니라 다른 모습을 발견해주는 게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생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에요."  


나는 노래를 비판하는 쪽의 이유를 깊이 알려하지 않았다. 논쟁하기 쉬운 가벼운 층위의 것만 보고 판단했다. 논리적으로 판단한 거라고 보기도 어렵다. '문란하다' vs '표현의 자유다' 진영에서 후자가 더 깨어있는 생각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나의 생각이라고 정하고 만족했다. 논쟁의 다른 층위는 더 보려고 하지 않았다.


작가는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정의했다. 논쟁의 시작인 '제제'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대받은 아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적당히 하고 멈춘 생각도 폭력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과거의 일이 몇 가지 있다. 길게는 10년이 더 된 일도 있다. 공통점은 그 당시에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행동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 중도의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것이다. 똑똑한 척, 나름의 논리가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착각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적이었던 그 일들을 나는 글로 쓰기가 너무 힘들다. 작가가 말한 대로 '내가 야기한 타인의 슬픔은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불편' 하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반성보다 그 상황에 놓인 걸 원망하기도 한다.


작가는 '제제' 일화를 통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야기했다. 폭력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사소한 말실수, 적당히 넘어가는 태도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일상에서 흩뿌린 폭력이 얼마나 되는지 민감해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민감해질수록 무신경했던 과거가 불편하게 나를 찌를 것이다. 그래서 또 적당히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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