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는 ㄱ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오게 된 중도입국 청소년이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되었으니 의사소통은 곧잘 되었는데, 쓰기가 문제였다. 작년 말에 본 토픽 시험에서는 3급에 합격했다. 홍이의 말하기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능력에 한참 못 미치는 급수이다.
긴 고민 끝에 문법을 다시 복습하며 문장 쓰기를 할 수 있는 쓰기 교재와, 세종학당에서 만든 <사이버 한국어> 교재를 선택했다. 사실 <사이버 한국어>는 온라인 수업을 위한 교재인데, 구성이 직관적이고 어휘/문법/말하기/쓰기/듣기 등이 적절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홍이가 학습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로는 [표준한국어]가 제시되곤 하지만, 곧 성인이 되는 (대학에 지원하려는) 홍이에게는 <사이버 한국어>의 내용도 꽤 괜찮았다.
문제는, 읽기 부분에서 발생했다.
홍이는 읽어 내려가며 끊어 읽기를 계속 틀렸다. 지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선생님! 모르는 단어가 많아요. 음... 팬미팅?이 뭐예요? 팬클럽?은 뭐예요?"
위 읽기 지문에 제시된 단어 중, 홍이가 질문한 단어는 모두 영어의 한글 표기였다.
팬미팅, 팬클럽, 메시지, 티켓. 이 단어 중 팬클럽을 제외한 나머지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만큼 이미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90년대 말 중국에 유학생 신분으로 거주한 적이 있다. 일이 있어 버스를 탔는데, 버스 밖으로 스쳐 지나간 아이스크림 가게 간판에 조금 당황했다. 아니, 당황했다기보다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20년도 더 넘은 그 장면이 이렇게 글로 표현될 정도로 생생히 기억나니 말이다.
‘31种冰淇淋店’
풀이하자면 '31가지 종류 아이스크림 가게'.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이름을 중국어로 다시 풀어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체인점의 간판은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그 가게 브랜드의 로고로 대신되거나 영어를 그대로 표기하고, 한글로 다시 표기하는 경우는 적은 것 같다. 인사동의 스타벅스는 한글로 쓰인 간판으로 유명한데, 한국 전통문화 거리의 상징인 인사동에 미국의 스타벅스가 출점하는 것을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자 스타벅스 본사를 설득해 국내 최초로 한글로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사동에 방문하여 한글로 쓰인 스타벅스 간판을 보고는 '가짜 스타벅스'로 오해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만큼 한글로 쓰인 외국 브랜드의 간판이 한국인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런 문화에 익숙해진 나도 중국의 생경한 아이스크림 간판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지금은 중국도 배스킨라빈스를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한자의 음을 따서 '芭斯罗缤 Bāsīluóbīn (음: 빠쓰루어빈)' 이라고 표기한다. 인사동의 스타벅스 간판이 영어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한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영어를 많이 사용해요?
우리말로 대체될만한 적절한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편하고 쉽게 그대로 사용하고, 또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취케팅(취소한 표를 예매하는 것)'이나 '피케팅(피가 튀길 만큼 구매가 어려운 표를 예매하는 것)'이라는 단어도 나 역시 어느 공연의 표를 예매하면서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나라 말로 쓰인 또 다른 외국어(혹은 외래어)를 접한다는 건 배움의 한 단계를 넘어서는 일인 것 같다. "아, 저기 내 방에 가서 데스크 위에 키 좀 가져오세요."라는 교수님의 말을 이해 못 해서 우물쭈물했다던 중국 유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홍이의 질문은 매우 공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