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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n Yeo Jul 18. 2024

'세계' '인류' 등 거창하고 추상적인 말에 관한 생각

世界、宇宙、自由、真理, 進歩, 時代

1. 들어가며: 나도 한때 자의식 과잉에 넘쳐 거대 추상어를 이 썼다


우주와 세계를 논하는 거대 담론

'자연, 세계, 우주, 자유, 평화, 정의, 진리, 통일, 서구, 동아시아, 사회, 인류, 진보, 시대, 역사, 문명'


「世界、宇宙、自由、平和、正義、真理、統一、西欧、東アジア·社会·人類·進歩·時代·歴史·文明」


 한때 나도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거대 추상어를 좋아했다. 상투적이고 모호한, 그래서 아무렇게나 갖다 붙혀도 나름 있어보이는 말을 나는 애용했다.


 "서구 문명의 미래와 인류의 발전단계" "우주의 진화"와 같은 이야기는 그 뜻을 몰라도 가슴으로 와닿는 웅장함에 즐겨 접하였으며, 사소한 행동에도 "나는 '음악계의 진화'에 기여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한다" "내가 산책하면서 하는 고민도 결국 동아시아 지역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갖다붙히면 꽤나 스스로 멋져보였다. 특히 한자로 저런 말을 쓰면 멋은 한단계 더 폭발했다.


어쩌면 잠시나마 내 자의식이 비대해지며 넘쳐 흐르면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에러가 있겠으나 이런 단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 추상어가 주는 흥분감, 도취감은 꽤 짜릿했다.


한자 멋있잖아~ (출처: 직접촬영 하이원리조트 내 운암정)

2. 그러던 내가 왜 거대 추상어를 잘 안 쓰게 됐는가? 


그러던 차에 거대 추상어 사용을 줄인 계기가 있는데 첫 번째는 거울 치료요,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2-1. 거울치료: 거대 추상어를 악용하던 지인 


우선 거울 치료라고 하면 지인 중 한 명이 역사의 발전 단계, 사회 정의, 사회 구조라는 거대한 개념어를 종종 쓰고는 했는데,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런 개념어를 갖다 붙이는 거 느껴졌다.


예컨데 그 분은 여성주의 사상을 지지했는데 그러면서 앞으로 여성주의 사상의 시대가 오고 거대한 역사의 변화 흐름에 이야기했는데 그 주장의 근거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당위로 사실 명제를 뒷받침한 건데, 스스로 원하는 걸 너무 강하게 추구하는 나머지 사실과 당위를 구분도 못하고 스스로 편향된 주장을 계속 강화하는 걸 보았다.


 그러던 차에 상대를 공격하고 모욕하면서 "사회 정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변호하는 걸 보았다. '사회적'이라는 이름으로 반사회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걸 본 것이다.



 등골이 오싹했는데 거대한 추상어를 쓰는 나도 어쩌면 "자기 편향, 현실 인식의 왜곡, 사실과 당의의 구분 실패 등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2-2. 미시적, 구체적 아름다움: 일상을 대상으로


그러던 차에 추상적이고 개념적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거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주위의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이 주는 경험도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됐으며 이 시기에 빗소리를 소재로 한 시, 일상 소음으로 작곡한 음악 등을 창작하며 더욱 거대 담론을 지양하게 되었다.


즉 미시적이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알 거대 추상어의 사용을 줄였다. 


3. 의사표현과 소통: 해석과 오해의 문제


  한편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는 데 있어서 그 뜻을 오해 없이 전달하는 게 중요한데 거대 개념어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서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선 내가 말하는 단어의 뜻을 상대방과 공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보는데 거대 개념어는 소통에 매우 부적절한 단어였다.


  예를 들자면 지인은 '구조'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그가 말하는 '구조'는 '사회의 고착화된 고정된 권력, 계급'를 뜻한 반면에 기호학에 심취한 나는 언어의 '뜻과 형식의 결합'의 '구조'로 이해했다.


이렇듯 거대 담론에 쓰는 개념어는 그 해석의 여지가 매우 많기 때문에 상대와 공통된 인식 체계,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 한 오해의 여지가 매우 많은 단어이다. 또 단어가 주는 거창한 느낌에 자기 편향, 자아의 비대화 등의 우려가 있어 매우 조심해서 다뤄야 할 단어라고 생각한다.



4. 거창하고 추상적인 단어담론은 안 써야 좋나?


개념어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엉뚱한 맥락으로 악용하고 오염하고 오해한 사람들의 잘못이고 물론 그 사람 중에는 나도 있고 매우 반성하고 성찰하고 있다.


내가 이런 거대 개념어에 대한 사용을 줄인다고 해서 거대 개념어 자체를 마땅히 쓰지 말아야 하거나 사용 횟수를 줄을수록 좋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거대 개념어는 나름대로의 적절한 쓰임새가 있다. 세부적인 사례나 하위 분류를 가리키는 게 부적절할 때, 그래서 '거대하거나 총체적인 걸 가리키고자' 고도로 추상화시켜 얘기 하고자 할 때 이런 개념어는 반드시 필요할 거고 혹은 서로 다른 이견을 가진 수 많은 사람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고자 할 때 차라리 잠시나마 여럿 해석의 여지를 가진 거대 개념어를 사용할 순 있다고 생각한다.


 총론, 원론, 다수의 입장 동시 고려 상에서 거대 담론을 쓰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대 추상어를 사용할 땐 그 용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배경에서 탄생하고 구사됐는지 보다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거대 추상어는 정확하고 명료하게 구사할 땐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자의적으로 쓸 때 문제가 된다.


필요할 땐 거대 추상어를 또 써줘야 한다.




5. 가면서: 거창한 추상어를 어떻게 말한 것이냐?


  앞으로 거대 추상어를 사용을 지양할 것이고, 만약 사용할 일이 있어도 그 맥락과 배경을 명확히 제시해서 남용, 오용, 오해 없이 그 뜻을 전달하게끔 노력할 것이다.


특히 적지 않은 '거대 추상어'로 일컫는 단어가 서구의 근대를 이끄는 데 기여한 중요한 개념어이기에 이면의 개념사적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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