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개인 수첩이나 작은 자물쇠가 달려있는 일기장 같은 곳에 소소하게 내 감상을 적은 글들을 꾸준히 써왔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쓴 글들은 아니었다.
당시 내가 겪었던 상황이나 그때그때의 감정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어 훗날 꿀단지에서 꿀을 꺼내 먹듯이 마음이 허한 날 다시 들춰보면서, 오! 이때 이런 일이 있었네, 어라.. 이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을 느꼈었네? 가만, 이거 내가 쓴 거 맞나? 하며 마치 내가 아닌 타자의 일기를 들춰보는 듯한 묘한 즐거움을 느끼려고 글을 끄적거려 놓았다.
1인 독자인 나를 향한 글이어서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써 내려갔던 100% 순도를 가진 나만의 글쓰기였다.
갓 졸업한 스물여덟 살, 나는 삼성역에 있는 한 IT회사에 입사를 했다.
당시 나의 집은 일산이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야 간신히 출근 시간에 맞게 회사에 도착을 했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다.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아침에 자명종 3대와 사투를 벌여야 했고, 항상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지만 육체적 정신적 피폐함은 점점 쌓여만 갔다. 결국 나는 지각에 대한 공포와 출근시간의 만원 버스, 만원 지하철에서의 불편함 때문에 새벽별을 보며 회사로 출근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출근 시간보다 2시간 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했는데 여름에는 그나마 밝았지만 겨울에는 밤같이 어두운 사무실에 혼자 출근해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 외로운 시간을 버티기 위해 나는 중고등학교 이후 오랜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밤이 아니라 아침에 쓰는 조간 일기였다.
아무도 없고 조용한 사무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에게 글쓰기 최적의 감성을 주었다. 그래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소회나 내 주변 무엇인가를 통한 감상 등을 덤덤히 끄적였는데그것을 미니 홈피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시간 때우기로 매일 아침에 써서 올렸던 미니홈피의 소소한 일기들.
그것이 내 인생의 행로를 잡아주는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당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방문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쓴 글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글이 좋아요'
'감동적입니다'
'작가이신 가요?'
이런 댓글들이 매일 올리는 글마다 달리기 시작하니, 나는 전에는 없었던 글쓰기에 대한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내게 글 쓰는 재주가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지금까지의 인생에 벌어진 신기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간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새로운 검색 포털 서비스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 검색 포탈에는 당시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했던 블로그 서비스를 기획 중이었나 보다. 하루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그 서비스의 메인 기획자가 메일 한통을 보내왔다.
당신의 글을 매일 읽고 있어요. 제가 서비스 기획 중인 '블로그 스타'를 통해 당신을 스타 작가로 만들어드릴게요.
대신 당신은 제가 기획한 이 서비스를 활성화시켜주세요. 그래서 우리 서로 윈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던 메일에 나는 무슨 길거리 캐스팅된 예비 연예인이 된 거 같이 기분이 붕뜨게 좋았다. 게다가 메일을 보낸 사람은 당시 회사에서 인기가 무척 많았던 매력적인 여성 기획자!
그녀는 매일 아침 내가 올리는 글에 댓글을 달아줬고, 나는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숙제같이 매일매일 글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나의 뮤즈가 된 기분이었고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어 더욱 악착같이 머리를 쥐어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쓰기 트레이닝을 단기간 내에 빡세게 해 놓고 드디어 라이브 된 검색 포털 블로그 메인 서비스에 나는 블로그 스타로 끼워 맞춰 올라갔다.
역시, 검색 포털 메인의 힘은 대단했다.
내가 쓰는 블로그 글 하나하나의 조회수는 엄청났고 이웃추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유명해지니까 나는 우쭐해졌고 마치 연예인이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져버렸다.
글 하나하나에 허세가 덧씌워지고 과장되고 난해한 수사를 많이 쓰면서 '봤지 나는 대단한 놈이야'라는 껍데기 글만 잔뜩 써버리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많은 이성들에게 구애(?)를 받으면서 더욱 기고만장해버린 나는 순수를 가장한 괴물 같은 인격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주변 모두의 관심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누구라도 나에게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과 허세로 내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결국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나를떠나갔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 무엇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오만이 내 영혼을 잠식하여 한동안 기고만장한 채로 살아갔고, 내가 밝히는 빛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위해 더 큰 빛을 낼 수 있도록 내 진심과 열정을 올바르지 않게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실되지 않은 것은 영원할 수 없고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씨가 되고 문장 한 줄 한 줄이 고랑이 되어 한 단락의 밭을 이루고, 그 밭에서 일구어 낸 한 바닥의 글을 통해 읽는 이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고 공감되는 것이 글을 쓰고 읽는 최고의 가치이다.
그런 최고의 글들은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점점 글을 써낼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을 잃어버린 내게는 아무 삶의 가치도 아무 글의 영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글 쓰는 활동을 접어야 했고,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블로그도 폐쇄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니 아무리 써보려 해도 한 문장도 써낼 수가 없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다시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우연히 '브런치' 서비스를 접하면서다.
글을 쓰지 않았던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있었던일상의 다양한 경험들과 다채롭게 발전한 내 생각의 확장, 그리고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은 내 연륜에서 나오는 감성. 이런 것들을 정리해서 어디엔가 써내고 싶었다. 그런 타이밍에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고, 기쁘게도내 생일날이었던 날선물 같이 브런치 팀으로부터 '작가 선정'의 메일을 받았다.
그렇게 오랜 부침을 겪은 후, 다시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교감적 내리받음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글을 써보자 하는 맹목적인 의지로는 썼다 지웠다를 반복만 할 뿐 계속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 모를 글만 써낼 뿐이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첫 글을 써서 올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뭐부터 써야 할지도 막연했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뭔가 쓰고 싶어 질 때까지.
나는 완벽하게 고독한 처지에 놓여야지만 글이 술술 써지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뭔가 분출할 영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면 환경이나 분위기를 조용하거나 어둡거나 또는 춥거나(?) 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나를 깎아 뾰족하게 만든 심으로 글을 쓰고, 뭉뚱 해지면 다시 나를 뾰족하게 만들어 글을 써내려 간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놓고 담아놓았던 걸 쓰는 게 아니라,
순간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마치 타인 영혼의 ‘자동 서기’가 된 듯 빠르고 거침없이 내 손이 가는 대로 써 내려간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내가 꿈을 꾸며 쓴 건가 하며 의아해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는 습관이 들면서 한동안 내 자신 내면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상의 자아가 아닌 글을 쓰는 두 번째 자아가 튀어나올 때만 글을 쓸 수밖에 없나 하면서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아.. 23아이덴티티가 떠올라버렸어, 그렇다면 나는 2아이덴티티인가?)
여튼 글을 쓸 때만 등장하는 나의 '두 번째 자아'란 녀석은 평소 마른 스펀지 같던 내 감성이 어떤 계기,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을 만나면서 갑자기 축축이 젖어들기 시작하여, 짜내지 않으면 바닥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히는데 그런 순간이 되면 튀어나와 스마트폰에 또는 주변 아무 종이에 쓱쓱 적어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글을 누군가 읽는 순간 내 정체성과우주관이 담긴 페르소나가 그 사람 머릿속에서 재현이 되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웃긴 소리겠지만 내 글이 훗날 어느 누군가에게 읽혀지면, 그 사람 정신에 내 정신이 되살아나 마치 영생이라도 얻을 수 있고, 다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글을 써본다는 게 너무 어려웠다. 계속 시도를 했지만 잘 안됐다.
그렇기에 한동안은 글을 써야 한다라는 강박 자체에서 벗어나 평소와 비슷한 일상들을 겪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비가 많이 오는 저녁이었다. 방에 불을 끄고 호로록 뜨거운 차 한잔 마시며 창밖의 빗소리에 온통 마음이 들떠서 일본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을 보았다.
그 애니메이션 속 비 오는 장면들과 순수한 영혼의 대사들이 엉망으로 엉켜있던 내 마음속 코드를 순식간에 '쫘악~' 하고 일직선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때 뭔가에 막혀있던 혈이 뚫린 듯 글쓰기 내림을 받았다.
그래서 순식간에 '언어의 정원' 감상문을 쓰는 것으로 간신히 첫 브런치 글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브런치에 여러 가지 콘텐츠의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과 먹는 걸 좋아해 여행기나 맛집 탐방 글도 쓰고, 요리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요리 레시피 글이나 간단한 카툰들도 올렸다.
또한 영화나 책을 보고 감상문을 쓰거나 소설을 끄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것들도 에세이로 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산만하고 정리되지 않은 글들만 올리게 되어 지금은 다 정리해서 지우고 '사랑'에 대한 에세이와 내 일상의 단상, 그리고 영화나 책에 대한 감상문들만 올리고 있다.
그렇게 쓰게 되는 글들은 내 일상 경험의기반을바탕으로하여
다양한 살을 붙이고 시점을 바꾸면서 쓰게 되는데 그런방식이 훨씬 풍부한 내용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사실적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글을 쓰게 만드는 '경험 소스'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다. 주중에는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고, 주말에는 철저하게 집안일과 요리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집돌이 같은 나는 새로운 경험과 사건이 일어나기 힘든 라이프 스타일이다.
글쓰기 좋은 그놈의 '사건' 하나만 나에게 터지면 좋으련만 나의 건조한 일상에서 그런 '사건'들이잘없기에글감으로 얻어다쓰기 시작한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긴밀하게 청취하거나 각종 영화나 음악, 그리고 책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문득 힌트를 얻게 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침에 출근해서 일정 분량의 글을 쓰고 퇴근시간에 맞게 퇴근한다던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규칙적이고일상적인글쓰기는 못하겠더라.그리고마감이라는데드라인이주어지면더글을못써낼지도.
아무래도 나는직업으로서의 글쓰기는 앞으로힘들지않을까싶다.
쥐꼬리만 한 영감 없이는 한 글자도 못쓰는 허접한 재주를가지고있기때문이다.
그래도 일상속에서찾아낸작은 힌트 하나로장편 서사한편을뽑아낼 수 있는 재주가 있기에 그거 하나 믿고 느긋하게나이를 먹어가며한 꼭지한 꼭지계속글을 써낼 수있을것 같다.
그러다 보면언젠가출간이란것도해볼수있겠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일생이 깃든 한권의 책, 내 정신이 깃든 한권의 책을 선물해 줄 수 있겠지. 그런 상상만으로 나는 너무나 기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글을 쓸 때 제일 빛이 났었다.
:D
P.S1
: 브런치를 시작하고 다음 포털의 메인이나 카카오 스토리 메인, 브런치 메인 등등, 각종 플랫폼 메인 페이지에 내가 쓴 글들이 걸리는 날이 종종 있다. 그런 날은 방문자 수가 몇 만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 날은 진짜 진짜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