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세상에 살아남는 부캐 만들기 전략
발이 묶인 요즘, 만만한 TV 리모컨을 자주 쥔다. MBC 주말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즐겨 봤다. 유재석이라는 한 사람이 드러머, 트로트 가수, 하프 연주자 같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에 도전한다. 라면을 끓이고 치킨을 튀기며 요식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일일 직업 체험이라고 하기엔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노력해서 얻은 뚜렷한 결과물이 남는다. '합정역 5번 출구' 같은 트로트 곡이며, '유산슬 라면' 같은 신메뉴가 대표적이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본방송과 재방송이 여기저기서 방송되곤 하는데, '뽕뽀유', '인생라면' 등 TV 화면 좌측 상단의 에피소드 제목을 얼른 살피지 않으면, 그가 어떤 캐릭터로 분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물론 그가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을 때마다, 영화나 드라마의 배역처럼 성격이나 태도, 말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유재석은 데뷔 30년을 맞는 코미디언이라는 본래 캐릭터(이하, 본캐)를 유지한 채로 생소한 전문 분야에 뛰어든다. 익살스럽게 작명된 '유고스타', '유산슬', '닭터유' 등의 부차적인 캐릭터(이하, 부캐)가 에피소드를 채운다. 유재석이 유재석일 때는 다음 부캐를 부여받기 직전까지, 그가 영문을 모른 채 어디론가 들어서거나 전문가와 처음 만날 때뿐이다. 그는 무언가를 시작할 실력도,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로 새 부캐에 몰입한다.
시청자도 본캐와 부캐로 바삐 살아간다 말할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직장이나 자영업이 본캐이다. 본캐는 우리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집중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전문성과 능숙함, 감정 노동을 대가로 생계유지를 위한 소득을 만들어준다. 부캐는 경제적인 수익과 상관없이 내가 속한 집단이나 모임에서의 역할을 떠올릴 수 있다. '맏아들', '며느리', '동창회 총무', '교회 집사', '산악회 회장' 혹은 지인이 카카오톡 메신저에 저장한 나의 이름으로.
경제적 수입원을 본캐 하나에 의존하는 삶은 주식 투자의 오래된 격언 중 하나와 닿아 있다. 달걀(투자금)을 한 바구니(투자처)에 모두 담지 말라는 것. 그나마 이 격언은 달걀이 여러 개라는 전제를 두고 있지만, 우리의 달걀은 하나뿐인 경우가 많다. 때가 탄 달걀 하나를 쉽게 깨지지 않는 삶은 달걀로 굳게 믿고 산다. 달걀이 하나인데 바구니 늘릴 생각은 딴 세상 이야기다. 달걀 하나가 든 바구니로 평생 걱정 없이 살던 세상에서는 한 우물을 우직하게 판 인생을 성공으로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본캐 하나를 일정 궤도에 올리고 나면, 업무처리가 관성적으로 돌아가면서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일 동기가 사라지는 이유도 있다. 잘 키워낸 달걀 하나는 병아리가 되고 닭으로 자라 치킨집을 열어 튀겨 먹고도 살았다.
유감스럽지만 닭 한 마리 인생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경제적 본캐 하나와 관계적 부캐 여러 개가 당신의 안정적인 삶을 지켜주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기존의 부캐는 즐거운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데 필요하다. 하지만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로 인해 갑작스럽게 본캐 하나를 상실하면 차선의 직업을 찾아 나설 여유와 의지를 꺾으며, 원만했던 친구, 가족, 모임에서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본캐가 망하면 처음부터 다시 본캐를 키워내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부캐 역시 차례로 망가질 위험에 처한다. 취업준비생 시절에 내가 남들보다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입사와 동시에 생각을 멈춘 사람들은, 달콤했던 본캐를 빼앗기고 나서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캐 하나로 먹고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흐름에는 숙명과도 같은 배경이 있다. 어느 때보다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렵다. 인공 지능으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직업과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누군가의 예측도 주장도 아닌, 모두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1) 전문가의 권위 하락
고도의 전문 지식을 쌓음으로써 진입장벽을 보호받아 안정적인 직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세상이 저물고 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체득한 정보와 지식을 사실상 '0'원의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이 그 벽을 허문 지 오래다. 오프라인의 전문가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밥벌이 노하우를 무료로 온라인에 공유하고 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자신들이 찾은 전문가나 지식을 높은 수준으로 신뢰한다.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시중에 있는 지식을 학습한 일반인 비전문가의 영향력도 매우 커졌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을 통해 이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정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더 이상 가까스로 만난 전문가의 진단과 견적, 솔루션에 복종하며 끄덕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격이나 제공 서비스, 후기 등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칼자루는 손품 판 고객이 쥐고 있다. 기존의 전문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전 세계의 온라인 지식인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고 있으며, 이들이 누리던 독점적인 권위는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질수록 더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2) 인공지능에 의한 대체
기계와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은 빠르게 우리 삶 속에 스며들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셀프 주유소나 키오스크를 이용한 무인 식당, 자동 주차 출입기가 눈에 띄게 늘었다. 주유소에 기름을 넣던 50대 중반의 아저씨, 식당 주문을 받던 40대 초반 아주머니, 주차 요금을 계산해주던 70대 할아버지는 다 어디로 가셨을까. 인건비가 가파르게 오르고, 무인 서비스 장치 도입 비용이 떨어지면서 시장이 내린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포츈지에 따르면, 향후 15년 내에 우리 직업의 40%가 자동화에 의해 사라진다는 예측이 나왔다. 복잡한 연산이 필요하지 않은 무인 서비스도 이토록 우리의 일자리를 갈아엎고 있다. 사람보다 수천 배 똑똑하고 수백kg을 거뜬히 들어 올리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더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상황도 더 이상 미래학자들만의 상상은 아니게 된다. 전문직인 의사, 변호사, 프로그래머를 포함해 화물/택시 운전사, 요리사, 전화 상담원 등의 서비스직, 생산직, 연구직, 기타 일반 사무직 등 대부분의 직군이 잔인한 변화를 빗겨 갈 수 없다. 나와 내 가족, 친구, 선후배 중 일부는 희생자가 되어 실업수당을 받고자 지역고용센터를 방문할 것이다. 인류의 지능과 에너지를 훌쩍 넘어선 기계가 우리가 일하던 병원, 도로, 주방, 사무실, 공장을 차지할 시점과 범위의 문제일 뿐이다. 당신이 하는 일만큼은 결코 대신하지 못할 거라며 확신하는 이 시점에도 기계는 쉼 없이 그 일을 엄청난 속도로 학습 중이다.
3) 소유 대신 공유 & 제품 대신 서비스
실체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인공지능까지 걱정하지 않더라도 시장의 거대한 흐름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소비자는 제품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기간과 양만큼 대여하고 반납한다.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 혼자 사지 않고 공동으로 저렴하게 구매한다. 평생직장을 믿지 않으며 부업이나 자기 계발을 한다. 생산자는 소품종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고 다품종의 제품을 소량으로 만든다. 한꺼번에 만들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면 만든다. 직접 만들지 않고 잘 만드는 곳에 맡긴다. 일회성 제품 판매로 끝내지 않고 제품 사용과 유지보수가 결합된 서비스로 판다. 직원을 풀타임으로 고용하지 않고 필요한 시간만큼 유연하게 쓴다. 요컨대, 공급자가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유통하는 과정이 수요 맞춤형으로 유연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수요자는 최소한의 가격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추구한다. 카풀이나 원격의료처럼 아직은 정부 규제에 묶여 있는 공유경제 플랫폼이나 직거래 전문 서비스가 시장에 등장하기도 전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공급 체인과 유통망이 변화하며 많은 직업이 생겨나거나 사라질 것이다.
4) 불확실성 & 리스크 증가
우리는 긴밀히 연결된 만큼 외부 환경에 더 취약해졌다. 지나치게 자유로울 정도로 정보와 사람이 자유롭게 오고 가는 세상 덕분이다. 이렇게 평평한 세계에서 기술과 자본, 사회와 문화, 정부와 시민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충돌한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과 지역 분쟁도 내 차에 넣을 기름값에 영향을 주고,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창궐한 바이러스 하나로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다. 경제학자나 미래학자의 합리적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며, 해가 바뀐 후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을 몇 개월 만에 다시 들여다보면 상황이 달라져 있고 내 생각도 바뀌어 있다. 내외부적인 변화는 그렇게 빠르게 진행되며,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위험요소)의 범위는 방대해졌다. 나의 일생은 나 자신의 리스크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리스크, 사회와 국가의 리스크, 전 세계적 리스크에 속절없이 타격을 받는다. 30년 무사고 경력의 베테랑 운전수도 덜 조여진 트럭 바퀴가 날아와 치이거나 고층 사다리차가 넘어져 깔릴 수 있는 상황이다. 당신이 욕심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어도 삶을 한 번에 망가뜨릴 요인은 너무나 많다.
5) 기대 수명 증가
OECD의 최근 건강 통계(2019)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OECD 국가 중 다섯 번째로 82.7세이다. 1970년의 기대수명이 62.3세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살고 있다. 오는 2066년이면 기대수명이 100세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자녀를 고등학교 졸업시켜도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한다. 노후에 필요한 자금은 그만큼 더 필요한데, 내가 갈고닦은 한 분야의 업력이 은퇴를 미뤄줄 만큼 그때 가서도 먹힐지는 물음표이다. 지금 청년들이 동네 아저씨, 동네 아주머니로 들판에 내던질 때 쯤이면 경비원, 택배 배송원, 택시 기사, 대리운전기사는 무인 자동시스템이 대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인생 후반전는 축구 전반전의 연장이 아니라, 아이스하키일 수도 있고 바둑일 수도 있으며 스타크래프트일 수도 있다. 게임의 규칙은 아예 다르며, 같이 뛰는 동료들도 모두 새로운 인물이다. 후반전의 플레이어로 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머지 절반의 시간을 벤치나 관중석에서 멍하니 보내야 한다.
인류가 처음 접하는 급진적인 변화의 폭풍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본캐 같은 부캐가 몇 개를 더 키워내야 한다. 본캐 + 경제적 다중 부캐 조합은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빠르게 적응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해외여행 갈 때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습관처럼 적는 본캐 대신, 잘 키운 부캐 1이나 부캐 2를 적는 당신을 상상해보라.
본캐 외에 믿음직스러운 부캐가 있으면 당신은 경제적,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진다. 수입원을 본캐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수입원을 분산시키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강력하다. 본캐가 위태로워도 차분하게 부캐라는 대안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 있다. "여기가 아니어도 나는..."이라는 높은 자존감은 본캐의 삶을 덜 진지하게 만들어 준다. 딴 주머니를 여럿 차고 있으니, 일 스트레스, 사람 스트레스, 적성 스트레스가 그만큼 분산된다. 지금 맡은 일에 목 매달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신기하게도 본캐 일이 견딜만해진다. 부캐로 키운 나만의 스킬을 본캐에 써먹어 돋보일 기회도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부캐는 전통적인 의미의 투잡(2 Jobs), 쓰리잡(3 Jobs)과는 다르다. 대개 투잡, 쓰리잡은 원잡(One Job)의 벌이가 신통치 않아, 추가로 뛰는 아르바이트 성격이 짙다. 원잡 퇴근 전후나 주말을 이용해 신문 배달, 대리 운전, 쿠팡맨(온라인 쇼핑몰 배달원), 카페 알바 등을 하는 경우다. 지속 가능하며 미래에 든든한 부캐를 키우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요구된다.
1) 본캐와의 관련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음
2) 시장의 변화와 흐름을 거스르지 말 것
3) 누구나(인간, 기계 포함) 쉽게 배워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4) 일하는 시간만큼만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가 아닐 것
5) 매우 좋아하거나(지금은 탁월하지 않아도 됨) 탁월한 실력(지금은 매우 좋아하지 않아도 됨)을 갖춘 일
이미 본캐를 가진 사람이든, 부캐는 커녕 본캐 하나 찾기도 어려운 취준생이든 바라볼 방향은 같다.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프리랜서는 현재의 본캐에 목숨 걸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이 철석같이 믿은 만큼 본캐의 배신은 치명상을 입힌다. 취준생은 나한테 완벽한 본캐를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연봉 많이 주는 대기업일수록 본캐 하나에 달큼하게 취할 가능성이 커진다. 모두가 선망하는 기업에 취업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에 실망하는 일은 더더욱 쓸모없다.
본캐로만 살아온 당신은 여전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한가한 소리"라며 댓글로 작가를 혼쭐 낼 말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충분히 존중한다. 다만, 언제 마를지 모를 우물 하나만 파지 않고, 다채로운 인생으로 롱런하며 살아갈 이들의 의지를 꺾지는 말라. 다시 말하지만 예측이나 주장이 아닌, 현실이다.
자, 그럼 부캐는 어떻게 만드는가. 말이야 쉽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월급 외에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막막하다. 당신도 유산슬이 되어라:실전편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룰 예정이다. 작가의 부캐도 공개하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적겠다. 부캐 여럿 중에 하나를 선공개하자면, 지금 적고 있는 이 글은 5년차 브런치 작가의 본격적인 부캐 만들기 작업 중 하나이다. 나같이 어설픈 사람도 하는데 당신도 할 수 있다. 절대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 내가 당신을 돕겠다.
다 쓴 글에 틀린 맞춤법을 고치고 있을 무렵, 도로 위 선거 차량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