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체계화한 칼 구스타프 융은 무의식을 재정의 했다.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이 운명을 가른다면
자연재해 마주하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걸까.
우리의 의사결정 중 95%는 무의식이 내린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무의식인 본능이 시킨다.
생각하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우리를 움직인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처절하게.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생존 너머의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솔직한 본능을 거스르는 의식적인 선택을 부러 내린다. 고작 5%만큼.
실수 하나 없는 완벽한 5%의 결정이라도
95%라는 압도적인 명령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더군다나 무의식은 이유도 자비도 망설임 따위도 없다.
이것저것 따지며 앞뒤를 재는 의식과는 경쟁이 안된다.
인간의 일회용 운명을 쥐고 흔드는 무의식에 우리는 무기력한가.
칼 융은 자신의 말에 단서를 달았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내 관점으로 해석해보자면, 의식하듯이 무의식하도록 만들면 된다.
5% 의식을 매만져 95% 무의식을 가꾸고 다듬을 수 있다.
부유물을 가라앉힌 무의식은 나 대신 24시간 깨어 일한다.
낮에는 직관과 통찰력으로 빠른 의사 결정을 돕고,
밤에는 꿈을 상영하고 기억을 저장해 정보를 정리 정돈한다.
우리가 소화기관에 음식물을 소화해달라고 요청하거나 노력하지 않듯이,
호흡기관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라고 요청하거나 노력하지 않듯이,
의식화된 무의식이 우리 대신 살게 하면 된다.
의도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무의식의 물결이 서서히 바뀐다.
처음엔 물 때를 잘못 만난 뗏목처럼 하염없이 노를 젓겠지만,
언젠가 물살이 방향을 같이 하며 흘러가기 시작한다.
손에서 노를 내려놓은 채 주홍빛 석양과 끝없는 지평선을 헤아리는 동안
뗏목은 목적지를 향해 저절로 나아간다.
들어오는 물에 노를 젓는 것만큼 힘을 아끼면서 멀리 가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뗏목이 항로를 벗어나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면 된다.
속도를 내야 할 때는 힘을 보태주면 된다.
휴식이 필요할 때는 잠시 멈춰주면 된다.
의식하듯이 무의식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흥적으로 움직이기보다 원칙과 신념을 세워 행동하고
유행을 좇아 따라 하는 대신 의도된 습관이 일상을 채우게 한다.
타인의 시선에 눈을 감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볼륨을 키운다.
이러한 다분히 의도적인 실행을 반복하면 무의식 세계까지 젖어든다.
무의식은 우리의 표정을 바꾸고, 아침을 바꾸고, 주변 사람을 바꾼다.
곧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
겨우 5%의 노력으로 95%의 무의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번 추월차선에 올라탄 무의식은 한계를 모르는 시속으로 가속페달을 밟는다.
기름 한 방울, 전기 1W 없이 제 스스로 나아간다.
결점투성이에 쥐꼬리만한 의식에 의존하며 달리는 옆 차선과는 거리를 좁힐 수 없다.
무의식이 당신 대신 0.01초 만에 결정하게 하라.
무의식이 당신을 24시간 살아있게 하라.
무의식이 더 나은 운명을 꾸리도록 내버려두어라.
무의식의 추월차선에 올라타라.
지금,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