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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May 22. 2020

트루먼 쇼

구몬 학습지와 닌텐도 사이

나 어릴 적,뛰어노는데만 정신 팔려 한구석 미뤄놓았던 구몬 학습지가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여 날 보고 있던 게 기억난다. 선생님 오실 시간은 빨리도 다가왔고, 손톱 밑 까맣게 낀 때도 채 빼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한숨 쉬며 울상 짓던 게 일상이었다. 그런 아들이 가여웠는지 다 풀면 닌텐도를 하게 해 주겠다던 엄마의 제안이 그나마 학습지를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동기가 되곤 했다. 하지만, 달콤한 보상이 앞에 있단 걸 알고 있음에도 그 한 장을 넘기기가 꽤나 고되었는데 때론 게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대충 풀어 재끼고 tv앞에 앉았다가 혼도 종종 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엄마는 가여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인내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인생 교훈을 내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퇴사 후 일 년 차,  내 인생은 다시금 10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다만, 이젠 혼내는 엄마가 없다는 점과 닌텐도에 대한 선택권이 온전히 나한테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항상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상 그 속박이 풀렸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 누군가의 결정에 따르고 싶어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위 같은 사례는 반복되어 왔는데, 민중은 군주를 내치 고도 다시금 새로운 리더를 찾아 앉혔고 자식은 부모에게서 독립해 다시금 가정이란 울타리를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형태가 시대에 따라 조금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 결정하는 것이라던가 한 끼를 누군가 책임져주는 것은 꽤나 큰 안정감을 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유와 속박은 늘 함께 해왔다.


회사를 다닐 때 내 속박의 가치는, 언제 눈 뜰 지부터 언제 밥 먹을지까지 회사가 결정해주는 대신 하루 20만 원 남짓이었다. 그리고 그 20만 원이 주는 안정감은 꽤나 컸다. 하지만 퇴사 후 근 일 년간은 온전한 하루를 얻은 대신 하루 만원 쓰기도 버거워한다. 그렇기에 온전한 하루로 다시금 안정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즉 다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노력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렸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바로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는 입사하기까지의 노력이 클지언정 막상 들어가선 주어진 과업만을 해내면 보상이 주어졌는데, 이와는 달리 지금은 온전히 내 선택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들이는 노력에 비례해 미래가치가 커간다. 훗날 물리치료사로서 자립하려면 지금 쌓는 지식과 경험이 내 수입과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들이는 시간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 봐야 하지만, 이 '미래'가  당장 눈앞에 있지 않기에 동기부여를 앗아간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게다가 어릴 땐 노력해야 얻었던 닌텐도가 이젠 온전히 내 눈앞에 있으니 이거야 말로 성인판 *Marshmellow test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스탠퍼드에서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으로, 눈앞의 마시멜로우를 안 먹고 참으면 더 많은 마시멜로우를 주는 인내력과 성공의 연광성에 관한 유명한 행동 실험이다


하루하루 진행되는 마시멜로우 테스트 속에서 다시금 스스로의 결정을 내리기 까지는, 아니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알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주어짐'에 대한 인식 변화였다.

퇴사 후 한동안은 "이 자격증은 신청 한 뒤부터 공부를 해야지" , "학교 공부는 개학하고 나서부터 해야지" 등 뭔가 기회가 주어지면 시작하는 나로 살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학창 시절이 그랬고 회사원 시절이 그래 왔다. 그걸 나 스스로가 결정한다 생각했고 주체적이라 믿었다. 그렇게 무언가 주어지길 기다리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버렸고 그 끝에 코로나가 닥쳐왔다. 계획대로라면, 이 맘 즈음 시작해야 할 스타트 포인트들이 하나같이 기약 없는 먼발치로 밀려나버린 것이었다. 그때서야 내가 아직도 회사원 아닌 회사원이었음을 깨달았다.

35살이 되어서야 이젠 혼내주는 엄마가 없음을, 결정 지어주는 이의 부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으로 와 닿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적나라한 자유 앞에 홀로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쟁여놓았던 내 월급이 자그마한 심적 안정이라면 안정이었을까?


내 발로만 기던 아이가 두발로 서는 게 어색하듯, 나도 주어지는 게 아닌 스스로 '움켜잡는' 행동을 익혀야만 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야 했고 나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그간은 타이밍을 기다렸다면 이젠 먼저 공부를 시작했다. 그게 현재로써는 시험일정 없는 자격증과 개학 없는 자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할 일을 스스로 정하고 시간을 움직이니 매일이 평일이면서 또 주말로, 더 이상은 정해져 있는 스케줄이 아니었다.

시간을 관리하다 보니 슬슬 먹는 습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나 과음하면 다음날 숙취로 영향을 받았고 배불리 먹으면 몸이 늘어졌다. 과거 회사에선 숙직실로 도망가거나 대충 졸며 외면하면 하루가 지나갔는데, 나 자신을 외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식단을 하루 세끼에서 두 끼(혹은 한 끼)로 줄이고 음주를 제한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몸무게가 8kg가량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잠도 더 잘 자고 배고프니까 매 끼니가 더 맛있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회사 생활할 때는 '배고픔'이란 걸 견딜 생각조차 안 한듯하다


그렇게 시간과 식단을 관리하기 시작하니 조금이나마 손안에 움켜쥔 것들이 느껴졌다. 시간이 조금 잡혔고 몸 컨디션이 잡혀갔다. 물론, 나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 없진 않았다. 다만 그 보상의 정도나 타이밍에 있어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을 뿐이었다.

과연 내가 오늘의 구몬 학습지를 다 풀었는가?

라는 자문 말이다.

사실, 아직도 학습지를 넘기기보단 tv앞으로 가는 나 자신이 더 자연스럽다. 일상의 맥주 한잔이 그립고, 늦잠 자는 하루가 너무 행복하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고 또 완벽할 수도 없지만 이런 관리가 내 미래가치와 직결됨을 알기에 매 순간 조금이나마 나아지려 노력 중일뿐이다.


이렇게 완벽한 자유는 그 냉혹함을 알기 전까진 실제 자유가 아니었음을 근 일 년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난 얼마나 타성에 젖어 살고 있었던 걸까? 영화 트루먼쇼의 마지막 장면엔 크리스토퍼(애드 헤리스)가 트루먼(짐 캐리)을 말리며 바깥세상은 내가 창조한 세상보다 결코 아름답지 않고 추악하고 냉혹하다며 떠나지 말 것을 종용한다. 이에 트루먼은

In case I don't see you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라는 인사를 남기며 세트 저편으로 문을 열며 사라진다. 과연, 내가 트루먼이라면 끝없는 안정과 보살핌 속에서도 자유를 선택했을까? 아마 분명 문 열기를 포기했을 듯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회사는 크리스토퍼가 아니었고 나는 트루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열릴 수밖에 없는 문을 스스로 열고 나왔고 이제는 그 냉혹함을 체험 중이다. 어릴 적 엄마가 내 손에 바로 닌텐도를 쥐어주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말이다.


요즘 바라는 건, 현재의 노력이 미래에 결실을 맺기를  또 그런 나를 누군가가 흐뭇하고 대견하게 바라봤음 하는 것이다. 관리자? 의 부재에도 내가 바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받고 싶은것 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가 먼 미래의 성공한 나라면 더더욱 좋을 듯하고 말이다.

독자께서 언제 이 글을 읽고 계실지 몰라 먼저 인사를 하며 끝맺겠다.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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