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주사
왁자지껄하던 아이들 사이에 적막감이 감돌고 하나 같이 사색이 되어있던 그 날은 예방접종 날이었다. 양호실 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팔을 문지르며 나올 때면 으레 '많이 아프냐?'며 의미없는 질문을 곧잘 던지곤 했다. 옹기종기 모여 답을 기다리는 눈망울은 하나같이 이번 주사만큼은 안아프다는 기적을 바라는 듯 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차례로 불려 들어가 결국 울면서 나왔으니 예방접종 날이 주는 아픔만큼은 비릿한 양호실 소독약냄새처럼 뇌리 깊숙이 각인되어있다. 더군다나 꽂힌 바늘에 발버둥 치다 피부마저 들리던 광경을 본 이후론 단언컨데 주사 맞는게 내겐 지옥 같았다. 유독 초등학교 시절 많이 맞았던 예방주사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첫 아픔이었다.
불합격통보
강남대로를 걷던 중 핸드폰 액정에 '아쉽지만 귀하는..'으로 시작되는 문자가 찍힌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수많은 회사에 입사지원을 하던 취준생의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였었다. 최종면접까지 갔던 곳이라 발표시간에 맞춰 뻔질나게 홈페이지를 들여다봤건만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훅 들어온 문자에 정신마저 혼미해진다. 은근 기대를 했던 터라 탈락 통보는 단순히 앞날의 거절 뿐 아니라 내 지난 노력까지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답변을 잘못했나,, ' '면접관을 너무 똑바로 쳐다봤나..'
정답 없는 반성을 수없이 하던 그 날의 날씨는 막상 기억나질 않는다. 분명 추웠는데 다른 이들이 반팔을 입었다면 실은 뼈시린 패배감 때문이었을 테고 막상 더웠는데 모두들 움츠렸다면 내 갑갑함 때문이었을게다. 그 날은 선명함 대신 그렇게 먹먹함 하나로만 남아있다. 여하튼, 터덜거리며 신논현역으로 기어들어가는 내 눈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 광고가 밟힌다.
'x발 청춘 같은 소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날 이후로 그 단어만 들으면 난 더이상 따뜻한 봄날 대신 추운 비바람을 연상 하곤 한다.
통증
우리가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아픔을 겪듯 재활치료의 관점에서 또한 통증은 불가피한 것이며 굳이 따지자면 좋은 것에 속한다. 손상된 조직은 통증을 유발해 강제적 휴식을 종용하는 한편 뇌로 하여금 한시 빨리 고칠 부분을 알려주는 회복신호로 쓰인다. 운동을 통한 근성장 뼈성장과 같이 나이나 상황에 맞게 변형해가는 과정에서필히 겪는 성장통이기도 하다. 오히려 통증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더 큰 문제로 구조 신호조차 포기했거나 성장이 멈췄다는 걸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어린시절의 주사는 원대한 미래를 대비한 예방통이자 취준생시절은 오늘을 위한 성장통으로 봐도 무방하다.
퇴사
내가 지난 회사를 나오게 된 주된 이유도 바로 이 '통증'이 멈춰서였다.
누구나 그렇듯 신입은 매 순간 힘들었고 쏟아지는 업무와 지식에 하루가 모자랐다. 정말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가운데 마음 한켠에선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한해 두해 연차가 쌓이고 나서부턴 더이상 내가 아파하지 않는단걸 깨달았다.
어느정도 사람들을 겪고나자 인간관계는 순탄했으며 그간 써놓은 보고서만 가지고도 조금 과장해 수백가지 버전을 만들 만큼 업무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도 상사의 칭찬을 받고나면 고통없이 일군 열매가 스스로 보기 부끄러웠고 마음 한켠에선 고통을 잠시 뒤로 미뤄두는 것이란 직감을 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마주쳤던 그 과자의 집처럼 쉬이 먹고나면 언젠간 마녀가 날 잡으러 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픔이 없던 나날이 계속 되던 어느날 나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다시금 강남대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아프니까 중년이다' 라는 책에 귀가 솔깃 할것 같은 나이가 되었다. 이 곳을 걸을때 많이 아팠었고 후에 성장했으며 다시금 아픔을 택해 오늘을 살고 있다. 마흔살이 얼추 보이는 지금, 다시 대학생이 된 용기를 치하하며 때론 조언을 구하는 이들이 있다. 당신도 인생에 정답을 알고 싶다며 말이다.
다른 건 모르지만 재활공부를 하며 하나 확신 하게 되는 것은 아프지 않은 길을 택하는게 종국엔 가장 아플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그 불주사를 견딘 덕분에 성인이 된 지금 큰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지 않나.
강남대로를 걸으며 빈 상가들을 보니 옛 추억이 떠오른다. 불가피한 아픔을 겪는 모두에게 필연적인 성장이 따르길 진심으로 빈다. 그때 우리가 그랬던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