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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Nov 16. 2020

동백꽃 필 무렵

가을타는 냄새

차가운 바람이 분다. 

코끝이 아린 찬 겨울과는 달리 마른 낙엽의 바스락 거림이 언뜻 느껴지는 바람, 나는 그걸 '가을냄새가 나네'라고 표현한다. 눅눅했던 공기가 지나가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그 무렵부턴 난 늘 가을을 타기 시작한다.


어릴 땐 내가 왜 가을을 타는지 몰랐다. 

수능을 앞둔 고3 운동장에 켜켜이 쌓인 낙엽을 보며 마른바람이 느껴졌고, 대학시절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맞이했던 어느 가을에도 그랬다. 유독 찬바람이 불어올 즈음 먹먹해지던 가슴이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결국 그건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묻어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게 사랑이었던, 공부였던 혹은 연초 마음먹은 꿈이었던 간에 강렬했던 여름이 지나고 급작스레 느껴진 찬바람은 이제 얼마 안 남은 연말을 알려주는 알림이기에, 그 속에서 느낀 후회 혹은 조급함으로 인해 난 가을을 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유독 풍파가 많았던 해의 가을을 심하게 탔던 기억이 있다.


교정에 노란 은행잎이 쏟아지고 있다. 

내 생에 대학교의 가을을 다시 느끼리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지만, 어느새 난 캠퍼스의 노란 은행잎을 밟고 등교를 한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마지막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이번 가을은 그간 느꼈던 그 어느 해보다도 더욱 메마르고 먹먹했을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큰 감흥이 없다. 작년 이맘땐 고과 시즌이라 상사 눈치 보기 바빴는데, 지금은 기말고사를 준비하니 과연 내 삶에 충실했다 감히 말할 수 있나 자문할 법도 하지만, 마음이 별 동하질 않는 걸 보니 후회가 없다는 반증인 듯하다. 다만, 동기들은 내년부터는 과장 직급을 달 테고 나는 다시금 신입직원이 될 테니 마음 독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뿐이다. 


글을 쓰지 않던 약 4개월 동안 무료 레슨(coaching)을 하며 바쁘게 보냈다. 

스포츠 재활 업계로 바로 진출하기엔 커리어가 터무니없었고,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막연한 걱정 속에 초심자를 위한 철인 3종 클래스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내가 과연 누굴 가르칠 자격이 되나? 하는 두려움이 컸지만 , 가진 것 100%를 모두 쏟자는 마음가짐으로 바로 시작을 했다. 약 20여 명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고 크루 멤버들의 성장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의 피드백까지 얻을 수 있던 경험을 쌓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연초만 해도 내 몸하나 움직일 줄 알던 수준에서 누군가에게 지식을 적게나마 전달할 정도의 자신감은 생겼는데, 올 가을을 덜 타는 이유도 아마 책상보단 필드에서 몸소 경험했던 게 크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처가댁 앞마당에 싱그런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봄에 꽃을 피우던 게 얼마 전 같은데 그새 뜨거운 여름 볕을 이겨내고 탐스런 과육으로 달려있는 걸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자연 순리에 따라 봄은 생명이 태동하고 여름은 에너지를 꽃피우며 가을은 낙엽이 지고 겨울은 생명이 진다. 모두들 과육을 맺고 있을 시기에 나는 아직 꽃조차 피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안에 자꾸만 걱정도 같이 움트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연초 그 감꽃을 보며 몸의 구조 조차 이해 못하던 나였는데 , 어느덧 누군가를 가르칠 미약한 실력이나마 쌓은 걸 보니 그 발전을 크게 사고 싶을 뿐이다. 


겨울철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꽃을 피운다 해서 동백이라 불리는 식물이 있다.

11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2월에 만발하는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식물이다. 더군다나 과육도 다른 과일이 다 떨어질 무렵 익기 시작해 문학에서 가련의 주인공에 종종 빗대어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 동백은 꽃, 잎, 열매 등 그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는 약용식물로 그 가치가 높으며 하아얀 눈속에 핀 빠알간 꽃잎에 많은 사람이 매료되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낙엽 속 꽃 피울 날을 기다리고, 곧 다가올 추운 겨울에도 굴하지 않을 동백꽃이 꼭 나 같다 하면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찬바람이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마지막. 

35살의 교정의 문턱을 밟는 내 스스로에게 주변의 성장과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길 바란다고 다시한번 말하고 싶다. 

마치 동백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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