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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Dec 10. 2020

もっきり

분수에 넘치다

7년 전 아내와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생전 처음 일본으로 떠났던 날이 기억난다.

영화에서나 보던 도쿄는 연말연시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청량하리만치 공기가 차고 맑았던 게 인상 깊었다. 서울의 그것과는 코끝에 걸리는 맛이 달랐다. 발 디딜 틈 없던 시부야 한복판에서 코를 벌렁거리며 서있는 내 손을 잡아끌고 아내는 근처 자그마한 이자카야로 날 데리고 갔다.

영어 한마디 없는 한자와 일본어로만 가득한 메뉴판이 나왔고 , 까막눈인 난 아내의 자연스러운 리드만 기다렸다. 지금까지도 둘이서 참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유독 일본만 가면 아내 앞에 순종적으로 변했던 건 그 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윤기 나는 은행이 구워져 나왔고 사케병을 든 종업원이 친절히 설명을 해준다.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지만 일본의 어느 유서 깊은 술도가의 오래된 술이란 아내의 통역이 이어진다. 예의상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하고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7부.. 8부를 넘어 가득 채워진 술잔 옆까지 술이 흐르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던 것이다.


もっきり*못끼리, 밑에 '되' 를 받치고 넘치게 따라 마시는 잔술  


아내가 설명해주길 일본에선 잔술 밑에 되를 받치고 흘러넘칠 만큼 따라주는 게 이자카야 고유문화라 했다. 항상 흘리면 혼났던 기억 때문이었는지 흘러넘치는 술잔을 보며 작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어떤 이유와 역사를 가졌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내게  もっきり 는 아직도 분에 넘치는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커피

아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대학생이 된 요즘 학교를 가기 전엔 늘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신다. 신선한 원두를 핸드 그라인더에 넣고 바삭하게 갈리는 재미를 손에 느끼며 잠을 깨기 시작한다. 오래된 원두일수록 갈리는 느낌이 퍼석 거려 핸드그라인더를 쓰는 맛이 덜하기에 가급적 소량으로 구비하는 편이다. 그렇게 원두를 정성스레 가는 동안 물이 끓고 커피가 내려지면 그 향과 소리에 아내가 일어난다. 식탁에 반쯤 감은 눈으로 앉은 아내의 부은 얼굴이 마냥 귀여워 커피를 따르다 잔 옆으로 조금 흘려버렸다.

もっきり コーヒー (커피)

잔받침에 고인 커피를 보며 회사를 다닐 땐 일어나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커피 한잔을 내려마실 이 시간이 분수에 넘치는 행복으로 다가온다.


기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라고 들어와서 그랬는지, 아니면 물 잔을 따르다 흘리면 혼났던 기억 때문이었는지 내게 있어 회사원의 삶은 행복하진 않았지만 틀렸단 생각을 크게 한 적이 없다.

그런 가운데 아내를 만났고 덕분에 술잔이 흘러넘쳐도 꼭 틀린 건 아니구나 라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분수에 넘치는 행복이 반드시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야만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며 그 술잔 크기 또한 내가 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말

지금 3학년의 끝이 보이는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내용이 너무 재밌어 아내에게 카톡을 보낸다. 차마 눈 돌리고 싶은 복잡한 내용들마저 재밌다 느끼는 나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시간을 갖게 해 준 아내에게 문득 감사함이 느껴져서였다. 주위의 만류대로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살면서 술잔을 때론 넘치게 따라도 괜찮다는 걸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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