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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Mar 05. 2021

떨림

변화

'야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어깨가 너무 아프다, 이거 어떻게 하냐?'

아프다란 말이 사담으로 나오는게 아직 어색한 나이임에도, 종종 내게 묻는 친구들을 보면 이제 조금은 나에 대한 신뢰가 생긴 듯 으쓱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히 컴퓨터 앞에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이 녹록치 않음이 보다 크게 느껴진다.

말린 어깨, 거북목, 긴장된 허리 대충 눈으로 훑어만봐도 많은 해답과 조언이 생각나지만, 끝내 내가 해결해 줄수 있지 않기에 짐짓 말을 아낀다.

'야, 그냥 하루에 30분이라도 걸어.. 너한테는 그게 최선이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많이 쓰는 'perturbation'이라는 치료 용어가 있다. 이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요' 정도로 나와있는데 이를 치료 시에는 '떨림을 준다' 정도로 의역하면 좋을 듯하다. 이 치료는 평소 잠자고 있는 근육을 깨우고 활성화할 때 주로 사용되는 기법으로, 꽤나 유용하게 쓰이곤 하는데 예를 들어 필라테스에서 커다란 짐볼에서 하는 동작들이 이 원리를 이용한 거라 보면 된다.


짐볼처럼 밸런스가 불안한 환경 즉 perturbation을 주면 생소한 근육이 일을 하게 되니 굉장히 어색하고 고될 수밖에 없다. 허나, 이런 떨림이 없다면 몸은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결국 어느 한계점을 넘겨 몸의 통증이 시작된다. 즉, 떨림을 통해 몸 전체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고, 무리한 근육을 쉬게 해 줄 수 있으니 우리 몸에는 이런 떨림이 반드시 필요하다. 잠자고 있던 나른한 일상의 자명종처럼 말이다.


아픈 몸의 치료에만 이런 떨림이 필요한 건 아니다. 실은 삶에도 주기적인 떨림은 요원하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설렜던 그 감정도, 번지점프대 위에서 내 발을 허공에 내딛게 했던 그 흥분도 또 수많은 청중을 앞에 두고 강단에 서기까지도 늘 떨림이 함께 했다. 그건 일종의 불확신에 대한 두려움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었는데 그 모든 떨림이 곧 도전의 시작이었다.  

이겨내야만 나아갈 수 있고 또 그 끝에 익숙함이 있다는 걸 알기에, 어찌 보면 떨림은 주기적으로 찾아온 삶의 이정표였으며 또한 매 순간 통과의례였다. 늘 하던 것, 늘 익숙하던 것으로만 삶을 채워왔다면 필시 어느 순간엔 몸처럼 통증을 고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또한 치료였던 것도 같다.


3월이 시작된 요즘, 내 하루는 떨림으로 가득하다.

퇴사 2년 차 가진 것 쥐뿔 하나 없는 상태로 사업을 벌여놓았고 대학교는 이제 다시 졸업반이 되었으며 하루를 장담 못하니 당연시 내일 또한 정해진 바 없는 삶을 산다. 삶에 떨림이 좋다 했건만 일상이 짐볼 위에 올려진 듯 어색하고 하루가 고되다. 모든 게 새로우니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이 공부를 하며 알게 된 건 무얼까. 움직이지 않는 삶은 아프다는 것. 그리고 떨림을 통해 다시금 삶의 밸런스를 찾는다는 것. 그러고 보니 Perturbation의 두 번째 뜻에는 '작은 변화'가 있다. 아마 떨림이 곧 변화로 이어진다는 걸 이 단어를 만든 사람도 아는 게 아니었을까.

삶이 또 몸이 아프다면 한번 힘껏 떨려보는 건 어떨지. 말 뜻 그대로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픈거엔, 떨림이다.

-대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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