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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Jul 30. 2021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실습이 끝난 후에

"주 이병, 귓구멍에 X 박았나?"

욕지거리 속 익숙한 내무반 풍경과 선임들 그리고 혼나고 있는 나.

"전 이병이 아니라 병장인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전 이미 제대까지 했는데요?!"

아무리 외친 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돼버리는 꿈속에서 몸부림치다 깨고 나면, 현실이 아님에 안도를 하는 건 으레 군 제대한 남자라면 한 번쯤 꾸게 되는 악몽이었다.


지난 두 달간 체험 한 첫 병원 실습.

부푼 기대를 안고 써 내려간 내 실습 일지에 붙여진 제목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주 이병'이었다.

 

"이야, 요즘 실습생들 개념 없네?! 나 때는 출근 한 시간 전에 와 베드 닦고 했는데"

첫 실습 날 아침 8시 50분, 9시까지 오라던 사전 O.T에 따라 출근한 내가 들은 첫마디였다.


'맙소사! 10년 전 신입사원 때 겪던 꼰대 짓을.. 또 당할 줄이야..'

흡사 여왕 마냥 고압적이던 한 선배를 보니 다시금 군대 악몽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꼰대 문화로 대표되던 전 직장도 정시 출퇴근과 자율 회식이 당연시된 지 오래였는데 이곳은 흡사 90년대로 타임슬립을 한 느낌이었다.

'정해준 시간보다 한 시간 더 빨리 안 온 걸 개념 여부로 치부하는 세대는 이제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나'

'선배의 말이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가?'

00년생에 가까운 선배들이 내 아버지 세대 악습을 영위하고 있단 사실이 내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런 꼰대 문화가 당연한 선배들과 모든 게 처음인 동기들, 그 문화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내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임이 분명 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라 이상하리만치 느껴졌다


Fight or flight?

첫날 이후 그녀의 제왕적인 자세는 계속됐는데, 그녀가 말하길 그나마 우리 병원 분위기가 좋은 편이며 다른 곳은 '*다. 나. 까' 의무까지 있다 하니 비단  곳이 아닌 업계의 문제인 듯했다.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를 들어보긴 했어도, 물리치료 업계까지 이럴 줄이야. 

동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정체된 사회가 존재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과거의 나라면 이런 부당함에 꼿꼿이 고개 들었겠지만, 갓 들어온 실습생은 디딜 발판조차 미비한 상태였다. 소설 속 붉은 여왕에 맞선 엘리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해피엔딩이었을진 몰라도 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Down grade

'초심으로 돌아가자' 

매일매일 납득하기 어려운 지적을 받았다. 퇴사 당시 결심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에도 다시 겪는 텃세는 버거울만큼 쉽지 않았고, 마음 한켠엔 '나도 한때는!' 이란 공명심 마저 앞서니 결국 결정을 후회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신입일지언정 여전히 병장 모자를 푹 눌러쓴 모양새였으니 여왕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제대로 항거 하지도 또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 속 답답함만 쌓여가다 내린 결론은 결국 모자를 완벽히 벗는 것뿐이었다.

사실 결론이랄 것도 없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Back to the past

혹 당신이 기억을 지닌 채 10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어느정도 앞날을 예견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보름이 지날 무렵 어느 정도 내려놓고 나니 익히 경험했던 꼰대짓이 크게 괴롭진 않았다. 다만 어찌나 똑같은 패턴이던지.. 군대나 신입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놈의 꼰대문화는 명맥이 참 길기도 했다.

'나 때는.. '  

(집단 이익을 핑계로 개개인의 권리를 묵살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건, 오로지 개인문제라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사회 전반의 병폐가 아닌가도 싶다.)


하나 달랐던 점은 과거와는 달리 이번엔 여왕 말에 적당히 응수했고 또 적당히 포용했다는 점. 연륜인지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예전에는 참 어렵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정선'이 쉽게 찾아가졌다.


'형, 사회생활이 원래 이런 거예요? 너무 힘들어요... ㅠㅠ'


도리어 처음에 적응하는 듯 보이던 동생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무렵

'나중에 너가 저 위치가 되면 이런 악습들을 하나 둘 바꿔보자..' 예전부터 해왔던 다짐을 다시 건네게 된다.

군대 말년엔 악습을 없앴고, 대리 땐 사무실을 구글로 바꿨던 내게 그건 공수표가 아닌 분명한 경험이었다. 다만 이번에도 인내가 필요할 뿐이었다.  


길고 길었던 실습 마지막 날.

동기들과 함께한 쫑파티 자리, 그간의 각종 에피소드를 안주 삼는 가운데 평생 입에 붙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고객' 대신 '환자'란 단어가 무심결에 튀어나온다.

'아.. 내가 더 이상 이상한 나라에 있지 않구나' 어느덧 환경에 적응해버린 스스로를 체감한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고작 두 달이었다. 내 지난 8년을 부정했고 부조리함을 이겨 내야 했으며 이등병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기간은 짧았을지언정 그 안에 녹여낸 시간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간 과거의 영광을 완벽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시 하기가 두렵지만 해냈기에 다시금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면허를 따고 업계에 들어가기까지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내년부터 써 내려갈 일지 제목엔 '이상한 나라'를 붙일리 없겠지만, 그래도 무서운 붉은 여왕 대신 재밌는 모자장수나 만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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