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반항하는 인간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신에게 순종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축복의 땅 에덴동산에 살았다. 신은 이들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엄격하게 금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먹으면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주어지는 선악과였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금기를 깬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것이 인간이 신에게 반항한 최초의 '인간다운' 행동인데, 종교계에서는 이것을 인간의 원죄로 설명한다.


아담과 하와는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여타 종과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구분 지었다. 반항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반항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개인적 반항이고 나머지는 집단적 반항이다. ‘부조리'라는 반항의 대상은 동일하지만 두 가지 방식의 반항이 추구하는 목적은 다르다. 전자의 목적이 ‘자신에게 잠재된 유일성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목적은 ‘연대를 통한 더 나은 세상 만들기’이다. 모름지기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부조리에 맞서 적극적으로 반항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개인적 반항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근대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며 두드러진 현상은 표준화다. 극도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대량 생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사실상 표준화된 공산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자의식과 유일성은 뿌리 뽑아야 할 독으로 치부된다. 아무리 독특한 색깔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재빨리 이를 숨기고 회색 빛 군중 속으로 편입되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사회가 강요한 평범의 규칙에 순종하며 자신에게 잠재된 개성을 억누르고 산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자의식을 지닌 존재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머릿속에서 ‘왜’라는 근원적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가령, 아침마다 출근하고 마시는 커피, 오전의 업무, 한 시간의 점심, 다시 오후의 업무 그리고 퇴근 후 잠자리에 들기) 속에서 모든 것이 갑자기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문득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라는 존재와 이를 둘러싼 세계에 이질감이 느껴지고 의구심을 품는 순간, 바로 이때가 인간이 거대한 삶의 부조리를 접하는 순간이다.


이때 자의식이 있는,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생각의 끈을 끈질기게 붙잡고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철학적이고 진지한 고민을 하며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 나는 왜 저곳이 아닌 이곳에 있는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등 다양한 생각을 해보지만 정답을 알 수 없다. 주위에 물어봐도 속 시원히 이야기해주는 이가 없다. 단지 매일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일상만 반복될 뿐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 종교, 철학, 명상, 독서 등 – 필사적으로 생을 탐구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이때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생각의 파편들은 점차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형상화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의 집합체는 견고한 신념이 되어 개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즉,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정신적 기반을 갖춘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반항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뚜렷한 원칙을 정립한 사람은 나아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삶의 방향성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해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길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는 담대하게 그 길을 향해 나아가며 삶에 열정을 가진다. 반항하는 인간은 표준화된 공산품을 거부하는 불량품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다. 지도 밖 세계로 행군하는 탐험가다.


이때 반항하는 인간은 삶에서 자유와 열정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의미함과 권태로 범벅이 된 일상에 반항을 덧댐으로써 개인의 생은 비로소 활력을 띤다. 반항하는 인간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필사적으로 존재하려 한다. 반항을 통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삶은 의미를 지닌다. 니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부조리도 감내할 수 있다.


한편 집단적 반항은 개인적 반항을 초월하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 개인적 반항이 오직 한 사람의 생과 관련이 있는 반면 집단적 반항은 사회, 더 나아가 전 지구 공동체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반항과는 달리 집단적 반항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날 인류가 기본적으로 누리는 인권은 실로 숭고한 연대와 치열한 반항을 통해 쟁취된 것이다. 가령 노예제 폐지, 민주주의, 여성의 권리 신장 같은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적 부조리와 맞서야 했다. 이들은 기득권의 억압과 관습에 얽매인 자들의 비웃음을 감수해야 했고 때때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인류는 결국 반항을 통해 부조리를 개선하며 정의를 실현했고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했다.


인간은 연대하는 동물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진 의무는 집단적 반항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침묵은 곧 동조이며 비겁한 선택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 마련이다. 마르틴 니묄러의 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방인>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가식과 위선을 요구하는 사회에 맞서 진실된 태도로 일관하는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그는 사회화라는 무대 위 연기를 거부한다.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주인공 뫼르소는 문학 역사상 가장 기이한 인물 중 하나이다. 뫼르소는 반항하는 인간이다.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되기보다는 서서 죽는 것을 택한다.


<이방인 소개>

이야기는 주인공 뫼르소가 양로원에 계신 엄마의 부고를 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망일이 오늘인지 어제였는지 헷갈리며 대수롭지 않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뫼르소. 다음의 첫머리는 문학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구절 중 하나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뫼르소는 엄마를 잃은 자식에게 사회적으로 마땅히 요구되는 감정 - 이를테면 슬픔, 회한, 안타까움 등 – 을 작위적으로 연기하지 않는다. 다만 침착하고 담담하게 엄마의 장례를 치를 뿐이다. 반면 고인의 지인들은 장례식에서 으레 연출되는 행동들 – 슬픈 표정으로 멍하니 침묵하기, 죽은 사람에 대해 그리워하며 이야기 하기, 눈물 흘리기 등- 을 ‘부산스럽게’ 하며 뫼르소의 심기를 거스른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뫼르소는 피곤함을 느낀다. 엄마가 죽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하며 연인 마리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 느닷없이 남자 친구의 모친상을 접해 당황하는 마리를 보며 뫼르소는 굳이 상황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마리와 데이트를 마친 후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주말이 끝났음을 느낀다. 엄마의 죽음은 뫼르소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뫼르소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는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끝났고, 내일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뫼르소는 이웃집에 살고 있는 레몽과 어울리며 친해진다. 그들은 각자 애인을 데리고 함께 알제리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뫼르소 일행은 아랍인들과 시비가 붙어 칼에 찔려 상해를 입는다. 이후, 다시 혼자서 해변을 어슬렁거리던 뫼르소. 그는 우연히 예전에 시비가 붙었던 아랍인과 마주치고 긴장하는데 이때 뜨겁게 뇌리 쬐는 햇빛에 현기증을 느낀다. 당시 뫼르소의 심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결국,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아랍인을 쏜다. 한 발, 잠시의 휴지 그리고 연이은 네발의 총성. 그는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걸음, 다만 한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을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비칭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결국,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아랍인을 쏜다. 한 발, 잠시의 휴지 그리고 연이은 네발의 총성. 그는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범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불을 비 내리듯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의 후반부는 뫼르소가 살인죄로 체포되면서 재판을 받는 내용이다. 뫼르소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덤덤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어떤 거짓 증언도 할 생각이 없기에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변호사는 이러한 뫼르소의 기질이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가급적 그것을 드러내지 말 것을 주문한다. 특히 엄마의 장례식에서 보였던 뫼르소의 무심한 태도를 지적하며 그것이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에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어느 날 뫼르소는 예심 판사의 사무실로 불려 간다. 예심 판사는 피고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신자로서 뫼르소를 종교적으로 구원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재판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뫼르소의 어머니를 들먹거린다. 어머니를 사랑했느냐는 예심 판사의 물음에 뫼르소는 한 치의 고민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한편, 예심 판사가 심문을 하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뫼르소가 한 발의 총알을 쏜 후, 두 번째 총알을 쏘기 전에 잠시 기다렸다는 점이다. 그는 이 점을 의아하게 여기고 집요하게 추궁하지만 뫼르소는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나중에 재판받을 때 밝혀지지만, 뫼르소는 ‘뜨거운 태양’ 이 주된 범행 동기였다고 진술해 좌중을 충격에 빠뜨린다.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고 관계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지만 정작 뫼르소는 현장에서 소외된 느낌이다. 본인의 운명이 이들에게 달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뭐라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지만 변호사는 침묵을 요구할 뿐이다. 재판은 한동안 본질에서 벗어나 ‘아랍인 살인 사건’이 아닌 ‘엄마의 죽음에 무심한 남자에 대한 심판’에 초점이 맞춰진 채 진행된다. 검사는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보여줬던 ‘비도덕적인 태도’를 근거로 유죄를 호소하는데 뫼르소는 변호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연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결국 뫼르소는 배심원으로부터 어떠한 동정과 호감을 얻지 못한 채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감방으로 돌아온 뫼르소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언제 죽는 것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즉 남들보다 빨리 죽으나 수 십 년 후에 죽으나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허망함을 인정하며 조만간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인다.


한편,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발생한다. 사제가 뫼르소를 전도하기 위해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사제는 뫼르소의 회개를 위해 종교적 믿음을 권유하지만 뫼르소는 이를 거부한다. 뫼르소는 사형집행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불쑥 나타나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제가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란 것은 죽기 전 단지 혼자 있고 싶은 것뿐인데 사제가 이 소중한 시간을 뺏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제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믿음을 강요하며 실랑이를 벌인다. 사제가 이것이 다 뫼르소를 위한 길이라고 합리화하며 고집스럽게 기도를 하려 하는 그 순간 뫼르소는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지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으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 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고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중략)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중략) 이런 모든 것을 외쳐대며,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벌써 사람들이 사제를 내 손아귀에서 떼어내고 간수들이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사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한동안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돌아서서 사라졌다.


사제가 돌아간 뒤 뫼르소는 다시금 평정을 찾는다. 그는 하늘 위 별을 보며 잠시나마 평화를 느끼며 자연과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문득 엄마 생각이 들고 그는 왠지 그녀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일에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맺음말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 및 반항에 대한 그의 철학을 <시지프 신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형수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올곧은 신념을 가지고 부조리에 떳떳이 반항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

독서할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 책을 리뷰하는 '21세기 살롱'이라는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분만 투자하면 책 한 권의 개괄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watch?v=sBFZSkAknG4

https://www.youtube.com/watch?v=5UflwPaXHbc&t=21s

keyword
이전 07화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