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인간 -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욕망하는 인간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원한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마찬가지로, 컵라면을 먹던 사람이 근사한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싶고 딱딱한 싸구려 소파에서 자던 사람이 안락한 호텔 침대에서 자고 싶은 것 역시 인간의 본성이다. 전자가 욕구라면 후자는 욕망이다. 욕구가 몸에서 비롯되는 반면 욕망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욕구는 생리적 결핍과 관련 있는 반면, 욕망은 정신적 결핍과 연관 있다. 욕구는 절대적인 반면 욕망은 상대적이다. 욕구가 비교적 단순하게 해소될 수 있지만, 욕망을 완전한 수준으로 충족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욕망에 대해 고심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한 사람의 마부가 끄는 두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쌍두마차로 비유했다. 그는 두 마리 말을 각각 의지와 욕망으로 비유했고, 이것은 이성이라는 마부에 의해 조종받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스피노자는 욕망을 영혼의 본질로 생각했다. 그는 플라톤의 쌍두마차 비유에서, 욕망을 마부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이성이 욕망의 통제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라고 여겼다.
욕망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며 모습을 바꿔왔다. 오늘날 우리의 욕망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이 그토록 바라는 사회 경제적 성공은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욕망이다. 현대인은 계층을 막론하고 ‘성공 역’으로 향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탑승해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기를 쓰고 일하며 삶을 소진하는 것은 전 시대를 통틀어 근현대가 유일하다.
SNS의 인기는 욕망의 진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예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타인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욕망이다. 과거에 지위가 높은 사람은 높은 곳에 살고 담을 쌓은 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려 했다. 프라이버시는 상류층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SNS의 등장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지위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SNS에 사생활을 공개한다. 유명 식당이나 여행지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똑같은 해쉬태그를 달고 게시물을 올린 뒤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았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닌 기꺼이 포기해야 할 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욕망의 특성을 잘 꼬집어냈다. 우리는 욕망의 주체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원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남들이 원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욕망은 필요에 의해 조작되고 주입되며 때때로 왜곡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준거집단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며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을 욕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는 도달하고자 하는 상위 계층의 욕망을 흉내 내며 동류의식을 느끼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현대 사회에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특성은 특히 소비에서 두드러진다. 사람들이 소비를 하는 동기는 자신
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단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것은, 재화가 아닌 기호라고 분석하며 이 점을 간파했다. 즉,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상위의 기호들 - 넓고 고급스러운 아파트, 외제차, 명품백, 5성급 호텔에서 보내는 해외 휴가 등 - 은 사실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욕망하도록 학습'된 것일 뿐, 주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광고와 미디어는 영리하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부추기며 ‘만들어진 욕망’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재생산해낸다.
적정한 수준의 욕망은 결핍을 해소하고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도한 수준의 욕망은 영혼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된다. 특히나 욕망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타자에서 비롯된 것일 경우, 이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욕망은 괴물처럼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채, 늘 새로운 먹이를 갈망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욕망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성숙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적절히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라캉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에 참으로 공감한다.
<보바리 부인>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파멸한 인간의 이야기로,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비롯된 '보바리즘'은 감정적, 사회적으로 불만족스러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 질환을 뜻한다. 언제나 과거를 향수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재의 기쁨을 느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어린 시절 얕팍한 통속 소설 대신 인문학 책을 읽고 사유하는 습관을 들였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보바리 부인> 소개
엠마는 농부의 딸로 태어나 감수성 풍부한 시골 아가씨다. 어릴 때 서정적인 연애소설을 자주 읽은 그녀는 낭만적인 사랑과 품위 있는 결혼 생활을 꿈꾼다. 부모의 중매로 그녀는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에게 시집을 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착하지만 야망 없고 따분한 남편과 답답한 시골 생활에 엠마는 싫증을 느낀다. 그녀가 기대한 결혼 생활은 어릴 때 읽은 연애 소설 속 행복한 여주인공처럼 우아하게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조롭고 평범한 결혼 생활에 엠마는 크게 실망하고 자신의 처지에 불행해하며 남편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엠마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고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멋진 동화 속 삶을 꿈꾸며 자신을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구원해 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린다. 이런 남자는 소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선원처럼 그녀는 삶의 고독 위로 절망한 눈길을 던지면서 멀리 수평선의 안갯속에서 혹시 어떤 흰 돛단배가 나타나지 않는지 찾고 있었다. 그 우연이, 그녀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기슭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인지, 그것이 쪽배 일지 삼층 갑판의 대형선 일지, 고뇌를 싣고 있는지 아니면 뱃전까지 가득한 행복을 적재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청년 레옹의 등장으로 권태로 점철된 엠마의 삶에 활력이 생긴다. 레옹은 엠마에게 연정을 느끼고 은밀히 구애하지만, 그녀는 기혼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선을 넘지 않는다. 엠마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가까스로 통제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결국 레옹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향하고 엠마는 못내 아쉬워하며 그를 떠나보낸다. 청년 레옹과 기혼자 엠마 사이 야릇한 유대감은 혼외정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엠마는 적어도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을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레옹과 아쉽게 이별하자 엠마는 자신의 처지를 더욱 불평한다. 비난의 화살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 남편 샤를 보바리에게로 향한다. 엠마는 레옹의 구애를 어렵사리 뿌리친 자신의 숭고한 정조를 몰라주는 남편을 증오한다. 그녀는 결혼 생활이 진절머리 나고 이 남자와 사는 것이 참을 수 없는 형벌로 느껴진다.
레옹이 떠난 이후, 엠마는 다시 삶의 공허함을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바람둥이 로돌프인데, 그와의 만남 이후 엠마의 삶은 송두리 째 바뀐다. 로돌프는 샤를 보바리를 찾았다가 우연히 엠마를 보고 정욕을 느낀다. 여자를 잘 다루는 로돌프에게 엠마는 단지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는 특유의 말재간과 남성미, 그리고 보바리가 그토록 동경하는 상류층의 기호로 그녀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조심스럽게 레옹과 교감하던 때와는 달리, 로돌프를 만난 엠마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해진다. 엠마는 그와 시도 때도 없이 정사를 나누고 남편 몰래 잦은 외출을 하는 등 위험한 사랑의 줄타기를 한다. 그녀의 마음속 잠재돼 있던 욕망 (특히 성욕) 은 로돌프를 만나면서 거침없이 분출된다.
바람둥이와의 사랑은 본디 유통기한이 짧은 법이다. 점점 더 로돌프에게 빠져드는 엠마와는 달리 그는 엠마에게 서서히 싫증을 느낀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엠마는 로돌프와 함께 도주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로돌프는 과하게 들러붙는 그녀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결국, 그는 엠마에게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별 편지를 쓰고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은 엠마를 기다리는 것은 현실, 즉 매력 없는 남편과 지겨운 시골생활이다. 이미 로돌프를 통해 정열적인 일탈을 경험한 엠마는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도피처를 갈구한다. 어느 날, 남편과 공연을 보러 간 엠마는 무대 위 남자를 보고 자신을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가져본다. 한 때 정숙한 숙녀였던 엠마는 이제 새로운 남자가 -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을 일상에서 구원할 새롭고 특별한 사건의 매개체 -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여자가 돼버린 것이다.
그때 그녀는 돌연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 것이다. 확실했다. 그녀는 뛰어나가 그의 가슴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그의 힘 속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뛰어나가서 그의 가슴에 몸을 던져 마치 사랑 그 자체의 화신인 것 같은 그의 힘 속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나를 데려가 줘요. 자, 떠나요! 당신 것이에요! 내모든 정열도, 내 모든 꿈도!”
침울한 엠마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옛사랑 레옹과의 재회다. 풋내기 티가 났던 레옹은 이제 어엿한 신사가 돼서 그녀 앞에 선다. 엠마를 구원할 기사님이 등장하자 잠재돼 있던 그녀의 욕망은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다. 엠마는 더 이상 성적으로 보수적인 여자가 아니다. 레옹과의 재회는 자연스레 간통으로 이어지고 엠마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로돌프가 그랬던 것처럼 레옹은 그녀가 질리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점은 시간이 지나자 엠마 역시 레옹과의 사랑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시금 새로운 자극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엠마는 결국 사채에도 손을 대고 가산을 탕진한다. 채무상환 독촉에 시달리자 그녀는 예전에 자신을 버린 로돌프를 찾아가 돈을 구걸한다. 로돌프는 예상대로 엠마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결국 그녀는 불륜에 대한 수치심과 경제적 파산으로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내의 불륜과 자살에 충격을 받은 순박한 남편 샤를 보바리도 결국 죽고, 부모를 잃은 딸은 방직공장으로 보내진다. 엠마의 허망한 욕망은 그 자신뿐 아니라 죄 없는 다른 가족들까지도 철저히 파괴한 셈이다.
맺음말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엠마의 자살 장면을 쓰면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의 왜곡된 욕망과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결핍은, 독자들로 하여금 경멸과 구토를 유발한다. 작가가 신랄하게 풍자하고자 했던 것은 19세기 프랑스에 만연했던 물질, 권위, 위선 등의 부르주아적 가치관이었다.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부르주아 계층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이 책 때문에, 플로베르는 풍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내가 바로 보바리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무척 의미심장한데, 실로 그렇다. 타인의 SNS를 훔쳐보며 막연한 환상과 부러움을 느끼고, 지칠 줄 모른 채 신용카드를 긁어대는 현대인은 곧 엠마 보바리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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