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는 인간 - 윌리엄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창조하는 인간
헤파이스토스는 아버지 제우스와 어머니 헤라로부터 태어났다. 추남에 절름발이인 헤파이스토스는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가슴속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는 올림푸스에서 유일하게 노동하는 신으로 묵묵히 대장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일과다. 이때, 헤파이스토스의 노동은 창조의 과정이다. 그는 불을 활용해 차가운 금속에 온기와 생명을 불어넣는다. 비록 헤파이스토스가 볼품없는 외모에 다른 신들처럼 전지전능한 힘은 없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창조물들을 - 제우스의 번개, 헤르메스의 모자와 신발,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등 - 통해 그는 자신이 신임을 입증한다.
인간은 본디 헤파이스토스처럼 창조하는 사람이었다. 수렵채집 시대 원시인들은 돌을 깎아 무기를 만들고 동물의 가죽을 벗겨 의복을 만들며 때때로 동굴에 벽화를 그렸다. 모든 원시인은 생존하기 위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창조는 곧 이들의 일상이었다. 대자연은 영감의 질료였고 창조를 억압하는 규율이나 생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 능숙한 원시인은 확실히 훌륭한 예술가였다. 피카소가 원시인들이 그린 알타미라 벽화를 보고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그릴 수 없다. 예술은 퇴보했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오늘날 인간 사회에서 헤파이스토스 같이 창조를 실현하는 부류는 오로지 예술가뿐이다. 예술가는 거대한 공장에서 뽑아낸 ‘레디메이드’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불량품이다. 이때 예술가의 정의는, 명망 있는 소수의 전문가뿐 아니라 특정 매개체를 통해 본인의 내면에 잠재된 유일한 우주를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부류를 뜻한다. 직장인 밴드, 사교댄스 동호회 등의 사람들은 비록 아마추어지만 광의의 범주에서 모두 예술가로 불려야 마땅하다. 단체 활동뿐 아니라 홀로 사진을 찍거나 일기를 쓰는 사람들도 모두 예술가에 속한다.
애석한 것은, 상업주의 및 물질주의 때문에 인간이 창조를 실현할 여건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들 조차 ‘창조물을 통해 자신의 우주를 독창적으로 표현한다’는 예술의 본래적 특성을 외면하고 ‘가급적 많은 상품을 팔아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기업가적 정신을 가진 상인으로 둔갑하고픈 유혹에 시달린다. 이와 관련, 앤디 워홀은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좋은 사업은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상업화를 옹호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로 치환되고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예술이 본업이 아닌 사람들 또한 창조를 체험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대사회의 템포가 점차 가속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온갖 의무를 수행하느라 시간이 없다. 보통의 현대인은 ‘시간 빈곤’에 시달리며 일상을 바쁘게 살아낸다. 마치 빠르게 기능하는 컴퓨터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효율적이고 반복적으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창조와 예술의 반대는 익숙함과 무감각이다. 습관적으로 기계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기적을 깨닫지 못한다. 둔감하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모든 영감의 물줄기를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다. 사막처럼 건조한 이들의 삶에 창조의 씨앗은 피어나지 않는다.
창조야말로 인간의 존엄한 개별성을 회복한다. 창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몰입을 경험하고 고뇌와 환희를 체험한다. 모호했던 형체가 차츰 구체화되고 세상에 없던 자신만의 독창성이 들어간 피조물을 창조했을 때 인간은 무한한 기쁨을 맛본다. 창조자는 자신의 피조물을 통해 신과 대적한다. 일부의 위대한 창조자는 완벽한 피조물을 - 우리는 이것을 고전이라 부른다 - 만듦으로써 신을 초월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에게 잊힌다는 것임을 고려하면, 위대한 창조자들은 불멸의 피조물을 통해 신의 지위에 도전한다.
창조하는 예술가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이다. 우리는 가급적 매일 시간을 쪼개 단 10분이라도 시인, 음악가, 화가로 존재해야 한다. 순간을 풍부하게 느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상이라는 초원에 흩뿌려져 있는 네잎클로버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한 번 창조의 희열을 맛본다면 단지 좋아서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경제적 보상을 받지 못할지라도 창조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자신의 우주 속 공간을 유영하는 황홀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흑백영화가 컬러영화로 변하듯이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보다 선명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
<달과 6펜스>는 독자들에게 통쾌한 대리만족의 경험을 제공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달 (이상, 경제적 보상이 거의 없는 자발적 창조)과 6펜스 (돈, 생계를 위한 향기 없는 노동) 사이에서 후자를 택하는 상황에서, 소설은 극단적으로 전자를 택하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유명 화가 폴 고갱의 삶에 기반한 인물인데 그는 사회적 제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달과 6펜스> 소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40대 중년의 평범한 가장이자 주식 중개인이다. 그에게는 괜찮은 직장과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있다. 적당히 화목하고 적당히 유복하며 적당히 행복한 스트릭랜드 가족은 겉보기에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따분할 정도로 평범하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릭랜드가 가출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라 추측한다. 평소 스트릭랜드 가족과 친분이 있던 화자는 진상을 파악하고 가출한 그를 설득해 집에 데려오기 위해 떠난다. 한편, 남편의 부재에 그의 부인은 애통해하는 듯 하지만 화자의 시선에 그녀의 슬픔은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책에서 스트릭랜드 부인은 다소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우여곡절 끝에 스트릭랜드를 찾아낸 화자는 그로부터 충격적인 대답을 듣는다. 스트릭랜드는 가출한 이유가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고 실토한다. 그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꿈을 접어야 했다. 대부분의 예술가에게 가난은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던 스트릭랜드는 그림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주체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일상의 감옥에서 도망쳐 버린 것이다.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무모한 선택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기에 그를 힐난한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 그림에 도전해봐야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스트릭랜드의 결의는 단호하다. 그와 화자가 나누는 다음의 대화를 보자.
"난 그려야 해요." 그는 되뇌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이런 맹추 같으니라고." "제가 왜 맹추입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게 맹추란 말인가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스트릭랜드는 마치 도덕의 한계를 벗어나 방종을 저지르는 악인처럼 묘사된다. 인상적인 것은 스트릭랜드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적 시선이나 도덕규범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꿋꿋이 그림을 향한 창조혼을 불태운다. 달로 홀연히 떠난 스트릭랜드는 6펜스 세계를 내려다보며 평범한 삶을 사는 세인들을 비웃는 것 같다.
"이것 보세요. 모두가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아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한편, 스트릭랜드는 화가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 도움을 얻는다. 스트로브는 잘 팔릴 것 같은 얄팍한 그림만을 팔아 대는 삼류 화가이지만 그림을 보는 비상한 안목을 가지고 있던 그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본다. 그는 아내 블란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몸이 아픈 스트릭랜드를 집으로 거두어 정성껏 보살펴준다. 스트릭랜드는 스트로브의 도움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스트릭랜드를 바퀴벌레 보듯 하던 블란치가 그를 흠모하게 되고, 결국 그와 함께 나가서 살기로 선언한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큰 충격을 받은 스트로브는 아내를 회유해보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잠시의 일탈도 잠시, 스트릭랜드와 블란치의 도피는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블란치가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림에만 집요하게 집착하는 스트릭랜드와 연인의 친밀한 애정을 바라던 블란치는 애초에 궁합이 맞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예술가에게 고독하게 홀로 있는 시간은 창작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블란치는 끊임없이 애정의 확인을 요구하며 스트릭랜드를 성가시게 했다. 스트릭랜드에게 사랑이란, 정신적 유대감이 아닌 오로지 육체적 쾌락일 뿐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사랑관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다음의 대사를 보면, 그림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은 그에게 단지 부수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 없소.”
이처럼 안하무인으로 사는 스트릭랜드에게 때때로 화자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스트릭랜드가 지닌 예술에 대한 열정만은 존경한다. 스트릭랜드는 6펜스 세계에 존재하는 부나 명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오로지 달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린다. 그는 도시를 벗어나 타히티 섬으로 떠나고 나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속세를 떠나 철저하게 그림에만 몰두한 스트릭랜드. 그는 새장 문을 부수고 날아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달에서 그토록 원하던 것을 성취했다. 창조에 대한 강한 열망은 사연 많았던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화자가 묘사하는 찰스를 보면 자신의 숙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 가서 내 그림 구경이나 합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내가 왜? 그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눈에 비웃음을 담고 내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나는 언뜻 본 것이 있었다. 육체와 결부된 존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무엇인가를 향해 뜨겁게 타오르는, 고뇌하는 영혼이 그것이었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추구하는 혼을 언뜻 보았던 것이다.
맺음말
<달과 6펜스>의 모티브가 된 폴 고갱은 생전 반 고흐와도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년에 둘의 관계가 틀어졌고 고흐는 귀를 잘랐다. 이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면,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은 본인에겐 투쟁, 가족한텐 비극, 그리고 인류에겐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앞서 나간 예술가는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는 작품으로 불멸하며 후세에 말을 건다. 위대한 예술의 관객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남이 아닌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의 완벽성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한다. 지금도 달 어딘가에서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묵묵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위대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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