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길들여진 인간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길들여진 인간

베스트셀러 SF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더기버: 기억전달자>의 배경은 전쟁, 차별, 가난, 고통이 없는 평화로운 '커뮤니티'이다. 커뮤니티의 시민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특정한 직업을 부여받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커뮤니티. 이 곳에서 사는 시민들은 행복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던 주인공 조너스. 하지만 커뮤니티가 조너스에게 '기억 보유자'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기억 보유자는 '기억전달자'에게 인류의 지식을 전수받는 중요한 역할이다. 기억전달자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자이다. 기억 보유자와 전달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기억전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기억 보유자에게 전달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커뮤니티를 지배하는 원로는 모든 시민들이 똑똑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알 권리를 차단한다. 그는 단지 기억전달자와 기억 보유자를 통해서만 인류의 지식을 보존하도록 한다.


조너스는 기억전달자를 만나 역사를 배우면서 진실에 눈을 뜨고 충격에 빠진다. 그는 커뮤니티가 사회 안정을 위해 시민들을 교묘한 방식으로 길들이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령, 커뮤니티는 매일 아침 감정을 없애는 약물을 주입하는 등의 규칙을 통해 시민들에게 일말의 자의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 안정과 전체의 행복을 얻는 대가로 시민들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 길들여진다. 조너스는 은폐된 역사를 바로잡고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커뮤니티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커뮤니티에 몹시도 길들여진 다른 사람들의 방해에 곤란을 겪는다.


SF 영화 속 이야기뿐 아니라 사실 우리가 사는 문명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길들임의 메커니즘 하에 작동한다. 문명은 길들이는 주체와 길들임을 당하는 객체로 구성돼있다. 길들임의 정의란, 주체가 자신의 기호 및 이해관계에 따라 객체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객체의 본래적 특성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가 됨으로써 동물, 자연, 사물 등 지구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길들임의 메커니즘은 인간 사회에서도 작용한다. 모든 인간사회에서 길들이는 주체는 강자요 길들임을 당하는 객체는 약자이다. 예를 들어 부모와 아이, 선생과 학생, 상급자와 하급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와 같은 수직적 계급 관계에서 약자들은 강자들에 의해 길들여진다. 약자들이 강자들에 의해 길들여지는 과정은 다음의 사례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말을 길들이는 과정을 보자. 말에게 재갈을 물리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재갈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그리고 말에게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반항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안장과 장신구를 뽐낸다. 이렇듯 길들임의 객체가 순응하는 주된 이유는 습관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물보다 자의식이 강한 인간은 상대적으로 길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길들임을 위해 강제력이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도로 은밀한 방식이 동원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과거 수렵채집 사회에서 원시인들이 길들임을 행하는 방식은 오랑우탄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시사회에서는 힘이 강한 자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돼서 지배력을 행사하며 구성원을 길들인다. 즉 신체적 능력이 길들이는 주체와 길들여지는 객체를 결정짓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 접어들며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력만으로는 다수를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아무리 힘이 센 오랑우탄이라도 만 마리의 오랑우탄을 길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농경기술의 발달로 인한 잉여생산물은 필연적으로 인구증가와 계급사회를 낳았고, 소수의 강자들은 다수의 약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좀 더 세련된 방식을 고안해야 했다. 이를 위해 우상과 신화와 같은 허구의 개념이 등장했고 여기에서 파생된 권위는 강자들이 약자들을 길들이는데 활용됐다.


강자들이 우상과 신화를 활용해 착취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오랜 시기에 걸쳐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특히나 중세시대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종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한 방식으로 약자들을 길들이는데 활용되어 왔다. 천 명이 하루 동안 잘못된 정보를 믿는 것은 가짜 뉴스 해프닝이지만 십억이 넘는 인구가 수백 년에 걸쳐 잘못된 정보를 믿으면 그것은 종교가 된다. 착취당하면서 비참한 현재를 사는 약자들에게 종교적 논리를 앞세운 강자들이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은 미래 (보다 정확히는 사후세계) 에는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허망한 믿음이었다. ‘인간은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삶은 고된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 등의 논리를 동원해 종교 세력이 세를 불리자 강자들이 약자들을 길들이는데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졌다.


근현대 들어 종교의 영향력은 쇠퇴하고 돈이 그 지위를 이어받았다. 매일 쏟아지는 광고 폭격에 노출된 채 온갖 브랜드 기호로 범벅이 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규칙을 따르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강제이자 의무가 돼버렸기 때문에 계층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급적 많은 (그러나 항상 부족한) 돈을 갖기를 원한다. 특기할만한 것은 전 지구적 통합에 실패한 신과는 달리 돈은 지구를 하나의 경제시스템 하에 예속시켜 사람들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시골이 도시화되고 개도국이 선진국화 되는 과정에서 돈의 교리는 급속하게 전 지구로 퍼져나갔다. 다수의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발적으로 길들여진 채 본인이 돈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라는 불운한 동물은 자유라는 타고난 선물을 되도록 빨리 넘겨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은 욕구보다 더 긴급한 욕구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 에리히 프롬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인간은 길들여지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특질은 애완견과 비슷해서 자신을 온순하게 길들여 줄 주인을 원한다. 사람들은 우상과 신화 없이는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이들은 국가, 민족, 종교, 회사 따위에 자신을 투사하고 이런 껍데기가 곧 본인이라 착각한다. 그러곤 길들임에 동조하지 않은 채, 황야를 떠도는 이리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문명이 아무리 진보한다고 하더라도 길들임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한, 인간 사회의 고질적 문제 - 소수의 이익을 위해 길들여지고 착취당하는 다수의 대중 - 는 완벽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의무는 약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강자의 이익을 위해 순종하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돼 왔다. 이와 같은 의무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의무를 뒷받침하는 논리는 무력, 신 그리고 돈으로 진화했고 강제력은 표면적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강제력의 세기가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강자들이 만든 규칙에 복종한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멋진 신세계>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이 두 소설이 묘사하는 언뜻 천국 같아 보이는 사회는 인간다움을 제거당하고 가축화된 인간들만 남은 디스토피아다. 이 책을 통해 과학과 전체주의 및 길들여지길 원하는 대중의 콜라보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맹목적인 길들임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진 채 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멋진 신세계> 소개

<멋진 신세계>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태어난 서기 1863년을 인류의 새 기원으로 삼은 미래의 세계다. 포드 기원 632년(서기 2496년)이 시대적 배경이고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를 그린다. 사회는 단일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정부에 의해 계획되고 시스템화 된다. 심지어 인간도 인공수정에 의해 대량 생산되고 태어날 때부터 알파-베타-감마-델타-입실론과 같은 계급이 정해져 있다. 불공평한 사회 구조에도 불구하고 주입식 교육에 의해 세뇌된 사람들은 어떠한 불만도 품지 않는다. 또한, 가족이나 사랑과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구성원 간 섹스는 자유롭다. 순수 교양과 예술은 멸종했고 촉감 영화라고 불리는 포르노가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이다.


'안정'이라는 최대선을 위해, 정부는 시민들의 감정을 조종하고 완벽히 길들인다. 정부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은 공포가 아닌 쾌락이다. 정부는 즉각적인 쾌락을 약속하는 '소마'라는 약을 배급하고 사람들은 울적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이를 복용한다.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소마로 기쁨과 행복을 얻는 대신 슬픔과 불행할 권리를 상실한다.


멋진 신세계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 버나드는 가장 입체적 인물이다. 그는 멋진 신세계의 상류층이지만 외모 콤플렉스가 있으며 사회적 반감을 가진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인물로 사회 부조리에 불만을 느끼고 이런 생각을 연인 레니나와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레니나는 이미 사회에 너무나 길들여져 버나드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변화를 꾀해보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쳐 타협한다. 이야기의 중후반에 드러나지만, 버나드와 그와 성향이 비슷한 친구 헬름홀츠 - 또 다른 사회 반역자 - 는 세뇌교육으로 형성된 가치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자유롭다면, 조건반사적 교육으로 노예화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버나드, 당신은 지금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레니나,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세요?"


한편, 무스타파 몬드는 사회를 지배하는 총통이다. 무스타파 몬드는 명석한 두뇌를 지닌 인물로 대중은 어리석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지도자이다. 그는 인문학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쾌락만을 장려하며 우민화에 앞장선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선 개인의 감정과 개성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자네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 밖으로 집어단진 것 말일세. 자유라!"총통은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델타 계급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다니!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자네답군!"


어느 날, 버나드는 우연히 야만인들의 주거지를 방문한다. 야만인들은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았다. 이들은 자의식이 강하고 감정을 느끼는 등 아직 인간다운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책에서 야만인은 지나치게 인간다운 인간들로 묘사된다.


버나드는 야만인 존을 만나 그를 문명사회로 데려온다. 하지만 존은 비인간적인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고 싶어 한다. 존이 셰익스피어를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존의 '인간다움'은 이 곳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철저히 소외감을 느끼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개인적으로 꼽는 <멋진 신세계> 속 최고의 명장면은 존과 총통이 나누는 다음의 대화다. 인위적인 행복만이 허락된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인간으로서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산업화 이후 가속화된 인간의 기계화 및 전체주의에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는 총통을 앞세워 문명화의 문제들을 – 분업에 따른 노동의 주체성 상실, 인간의 부품화, 강박적으로 일만 하는 삶 등 - 날카롭게 풍자한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1984>가 묘사한 비극은 감시 및 공포였지만 <멋진 신세계>는 과도한 쾌락과 우민화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야기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조지 오웰이 경고한 것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지배였지만 올더스 헉슬리가 두려워한 것은 무지(無知)의 보편화였다.


올더스 헉슬리는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과 원시적인 야만인을 대조하며 누가 더 인간다운 인간인지를 묻는다. 그는 인간들이 얼마나 원숭이처럼 쉽게 길들여질 수 있는지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어쩌면 우리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채 매일 소마를 섭취하며 멋진 신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씁쓸하지만 분명 생각해 봄직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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