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적인 인간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가식적인 인간
드라마 <블랙미러> 의 <추락> 에피소드는 흥미로운 미래상을 그린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SNS의 평판이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래 사회. 이 곳에선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평점을 매기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평판이 형성된다. 사회적 평판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사람들은 타인에게 좋은 평점을 받기 위해 항상 친절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주인공은 억지로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을 가식적으로 연기하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어느 날 주인공은 높은 평점을 얻어 고급 아파트 분양 할인을 받기 위해 상류층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불쾌한 돌발상황이 연달아 생기고 주인공의 사회적 평판은 수직 낙하한다. 원만한 평판 관리를 위해 평생을 타인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 그녀는 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산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추락>은 사회적 평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세태를 풍자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도록 설계된 사회적 동물이다. 인기는 일종의 권력이다. 타인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행여나 누군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내가 특정 행동을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따돌림을 당해 무리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등을 고민하며 가슴을 졸여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가엾은 숙명이다. 문제는 타인에 중심을 두고 살다 보면 정작 자신의 삶은 불행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세 가지 자아가 있다. 첫 번째 자아는 꾸밈없는 자신의 진짜 내면이자 본연의 자아. 두 번째 자아는 타인에게 보이는 자아. 세 번째 자아는 타인이 내게서 기대하는 역할의 자아. 첫 번째 자아는 본래적 자아, 나머지는 관계적 자아다. 관계적 자아가 완전한 가짜인 것은 아니다. 관계적 자아는 인간 사회 복잡한 관계의 망에서 기능하기 위해 본래적 자아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거울에 반사된 상의 모습이 본질이 아니듯이 관계적 자아 역시 그 사람의 진실한 면을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적 자아는 상당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반면 관계적 자아는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성향을 띤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예를 보자. 40대 중년 남성 A의 내면은 타인과 확연히 다른 고유의 표식이 있다. 하지만 A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드러내는 모습이나, 그가 수행할 것으로 마땅히 기대되는 역할 (아버지로서, 직장 상사로서, 남편으로서 등) 은 대개 일반적인 특질을 지닌다. A의 본래적 자아는 나름의 선과 악이 융합된 우주 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원만함’을 요구하는 인간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A는 가식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느낀다. 따라서 A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생활하면서 표출하는 관계적 자아는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또래 40대 남성의 그것과 유사한 모습을 띌 확률이 높다. 때문에 관계적 자아에서는 뚜렷한 상이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몇 가지 특질에 근거해 제한된 수의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할 뿐이다. 고작 4가지 혈액형으로 75억 인류의 성격을 유형별로 나누듯이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본래적 자아는 숨긴 채 관계적 자아를 드러낸다. 내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 혹은 남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연기하며 은근하고도 살벌하게 타인의 눈치를 살핀다.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한 인간의 지극히 일부만 노출된 (혹은 변형된) 관계적 자아만을 대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하며 이는 가까운 친구, 연인,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이며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사회화는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가다. 우리는 배심원이자 동시에 피고이다. 모두가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당한다. 인간은 결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레 처세를 익힌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본래적 자아를 숨기고 관계적 자아를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사교적인 사람은 관계적 자아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를 지칭하고 사회는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반면 솔직하게 본래적 자아를 드러내거나, 관계적 자아를 능숙하게 연기하지 못하는 이는 사회 부적응자, 별종, 괴짜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은 학습에 의해 본래적 자아를 억누르고 관계적 자아의 가면을 쓴 채 마치 배우처럼 연기를 하듯 삶을 산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다음 대사는 참으로 공감된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입니다. 그들은 등장하고 퇴장합니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답니다.”
‘유머’는 관계적 자아를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강력한 무기다. 유머러스한 사람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모인다. 가령,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모임이나 회식, 고객과의 미팅, 소개팅 등의 만남에서 인기가 좋은 사람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유머는 타인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와 소통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는 때때로 웃음을 파는 광대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웃기는 광대가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남들의 유머에 웃어주는 관객의 역할을 소화해야 한다.
‘상냥함’도 관계적 자아를 꾸미기 좋은 수단이다. 새로운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마치 호텔 벨보이가 손님을 대하는 것 마냥 상냥하게 그를 대한다. 무례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기 싫어서, 호감을 얻고 싶어서, 무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우리는 사려 깊은 미소를 입가에 띤다.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착한 아이 증후군’에 시달린다. 이 병에 걸린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스맨의 가면을 쓰고 불행을 자처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가 속앓이를 해본 경험이 대부분 있을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자가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없는 자는 본인이다.
한편, SNS의 발달은 인간사회 가식의 총합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사람들은 SNS라는 무대 위 철저하게 꾸며진 관계적 자아에 도취된다. 가급적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끄는 방향으로 SNS 속 관계적 자아는 솔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SNS의 등장은 명백히 중요한 변곡점이다. 과거 사람들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적 자아를 형성했다.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본 뒤 곧바로 알맞은 대응을 해야만 하는 진땀 나는 공방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SNS 게시물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공표한다. SNS 덕분에 관계적 자아를 스스로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SNS에 투영된 관계적 자아는 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식의 껍데기일 확률이 무척 높다.
우리는 가면 권하는 가식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파놉티콘 감옥 같은 일상에서 우리는 교도관이자 동시에 죄수인 1인 2역을 맡아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문명을 등지고 홀로 살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적당한 수준의 가식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본래적 자아가 아닌 타인의 평가에 의해 규정된 관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관계적 자아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 된다. 가식적인 삶에 익숙해지면 이제는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 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래적 자아를 망각한 채 평생 연기를 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더러는 이런 삶을 살면서도 일말의 어색함이나 죄책감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가식적인 인간사회의 모습을 꿰뚫었다. 소설의 주인공 요조는 관계에 서투른 내성적이고 아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특유의 음울함이 있는 아이다. 자신의 그늘을 감추려 그는 유머를 통해 사회성 좋은 사람인 양 관계적 자아를 포장한다. 요조에게 타인은 재미를 선사해야 하는 고객이자 언제나 눈치를 봐야 하는 불편한 존재다. 지나치게 순수한 요조는 어른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결국 요조는 술과 마약에 절은 폐인이 된 채 몰락한다.
<인간 실격> 소개
<인간 실격> 은 사회 부적응자 요조가 서서히 파멸되어가는 이야기다. 순수한 요조는 위선적인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평생을 외톨이로 지낸다. 그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타인과는 너무도 다른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괴롭고 견딜 수 없다. 요조는 자신이 도저히 인간의 생활을 가늠할 수 없었다며 우울한 고백을 시작한다.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난 요조. 어린아이 요조는 타인이 너무나 낯설고 무섭다. 심지어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요조는 그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마음에도 없는 선물을 사달라고 떼쓰거나 하는 식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으로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요조가 생각해 낸 처세술은 ‘익살’이다. 재롱을 부리는 광대가 됨으로써 자신의 우울한 내면을 감추는 것이다. 요조는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연기하며 타인에게 보일 자신의 이미지를 완성해간다. 요조는 겉으로는 웃고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지독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저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광대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러면서도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요조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가식이다. 요조는 겉으로는 하하 호호 웃으면서 뒤에선 욕하는 가식적인 인간들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서로를 기만하는 가면극을 무난히 수행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을 요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일시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요조의 눈에 타인은 무시무시한 지옥의 사신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투른 요조는 사랑하는 능력에도 결함이 있다고 고백한다. 연인도 결국 두려운 타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조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과연 사람들이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건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요조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인간은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인간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번민하던 요조는 점차 자신을 파괴해 나간다. 그는 마약에 중독되고 수 차례 자살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사람들은 요조를 신경증 환자 취급을 하며 정신병원으로 보내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정상이고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요조는 자신의 꼴을 인간실격이라 칭하며 본인이 인간사회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 것에 절망한다
나는 그 후 곧 그 수줍은 미소를 짓는 젊은 의사의 안내를 받아 어느 병동에 갇히게 되고, 방문엔 찰칵 열쇠가 채워졌습니다. 정신 병원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죄인의 신세가 아니라 광인이었습니다. 아니, 난 결코 돌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 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광인들은 대개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지요. 다시 말하면 이 병원에 수감된 자들은 미친 사람이고,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정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 호리키의 이상스럽게 다정했던 미소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판단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자동차에 실려 이곳으로 끌려와서 광인의 신세가 됐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더라도 나는 역시 광인, 아니 폐인으로 낙인찍히게 되겠죠. 인간, 실격. 이제 난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됐습니다.
완전히 폐인이 된 요조는 자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다사다난했던 삶을 살았던 그는 이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요조는 ‘인간 사회에서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맺음말
주인공 요조는 곧 작가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분신이다. <인간실격>은 자전적 이야기이다. 참고로 그는 다섯 번째 자살 기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다자이 오사무야말로 진실된 삶을 살다 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이 더욱 아쉽다. 그가 익살을 떨며 관계의 자아를 포장하기보다 솔직하게 본래적 자아를 드러냈다면, 그의 그런 모습을 이해해주는 친구나 가족, 연인이 곁에 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의 선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순수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살아생전 지독히도 외로웠던 게 틀림없다. 온갖 가식과 허영, 광대의 웃음이 넘치는 얄팍한 인간 세계에 이런 고귀한 영혼은 어울리지 않는다. 부디 그가 하늘나라에서만큼은 외롭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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