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두려워하는 인간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두려워하는 인간

공포는 모든 동물이 느끼는 원초적 감정으로, 이는 곧 불확실성이다. 낯선 상대와 단 둘이 으슥한 골목길을 걸을 때, 폐쇄된 공간에 갇혔을 때, 투자자산이 폭락해 재산을 몽땅 잃을 것만 같을 때 등과 같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포는 스멀스멀 자란다. 그런데 이처럼 실로 다양한 공포의 형태는 사실 단 하나의 무시무시한 근원적 공포의 하위 체계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생존에 대한 위협, 즉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두려움을 압도하는 가장 궁극적인 공포의 원천이다. 죽음과 관련된 불확실성은 실로 엄청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접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관동 대지진이나 911 테러의 희생자 혹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이처럼 ‘느닷없이 허무하게’ 죽게 될 것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또한 죽음이 정확히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분리가 되는지, 사신과 함께 망자들의 세계로 입장하는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신의 심판을 받는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홀로 내던져지는지, 아니면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게 되는 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유일하게 죽음의 실체를 목격한 증인들은 모두 굳게 입을 다문 채 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무지하다.


인간이 죽음에 관해 명확히 아는 한 가지는 바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전쟁, 역병, 기아, 노화, 천재지변 등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인류는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인류는 죽음의 공포에 굴복하는 대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러한 대담한 시도 덕분에 인류는 죽음에 대항해 서서히 생의 영역을 넓혀 나갔고 극적으로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부정 본능>의 저자 아지트 바르키는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는 심리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죽음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을 제어하고자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고유한 능력을 진화시켰고, 이는 거대한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 – 충분한 식량과 진보한 과학기술 및 의학 – 는 모두 인류가 죽음을 부정하고 이에 맞서 쟁취한 산물이다.


근현대에 접어들며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그동안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사람들은 굶주려 죽는 것보다는 과도한 영양 섭취에 따른 건강악화 또는 몸매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한다. 과거 대비 전쟁의 발생 횟수 및 이로 인해 죽는 사람의 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나날이 증가하고 슈퍼리치 및 기업들은 영생을 위한 연구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우리는 문명의 혜택 덕분에 기적적으로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진부함에 싫증을 내고 이를 잊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우리는 죽음을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의 죽음으로 장례식에 갈 때도 으레 짓는 엄숙한 표정과 함께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출 뿐, 죽음은 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명징하고 구체적인 명제는 더 이상 공포를 유발하지 못한다.


현대 사회에는 죽음 대신에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의 공포가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롭게 등장한 명제는 ‘우리는 불안하다’이다. 현대인이 두려움을 느끼는 주된 요인은 특히 경제적 불안과 관련이 깊다.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들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을 먹이 삼아 공포는 덩치를 키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충분한 부의 축적이 두려움을 극복할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죽음을 부정하며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들은 마치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재산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달린다. 경주의 종착점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고대 인도 문학인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죄를 심판하는 야차가 인간 사회에서 무엇이 가장 놀라운 일이냐고 물었고 유디슈티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사람들이 죽는데,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란 죽을 운명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일하고 놀고 앞날을 계획하는 등 마치 우리가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여깁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한 채 추상적인 두려움에 (주로 경제적 불안감에서 기인한) 휩싸여 부의 축적을 삶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설정한 채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구체적이고 견고한 공포가 불안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유동적인 공포에 오랜 시기 자리를 지켜 온 공포의 왕좌를 넘겨준 것이다.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뒤따르던 노에에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를 소리 높여 외치게 했다. 이는 승리에 취해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도였다. 우리는 좀 더 자주 죽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탄생의 시간이다. 삶의 유한함을 인식한 인간은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탄생의 기적을 맛본다. 이때 성숙한 인간이라면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자기에게 어진 생을 최대한 만끽하며 살아갈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로, 톨스토이의 단편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를 받는 역작이다. 톨스토이는 이 책을 통해 죽음, 삶의 허무함, 진실되지 않은 관계 등을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바람직한 삶인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체험해보는 놀라운 일을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반일리치의 죽음> 소개

이야기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고인을 조문하기 위해 모인 지인들. 하지만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해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의무감으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안도한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그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기보다는, 국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보조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을지에 골몰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지인들의 태도를 보면, 그의 삶이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 지극히 끔찍한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대체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정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일리치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명석하고 처세에 능한 이반 일리치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그는 항상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고, 상류층을 동경하며 자랐다. 대학에 진학해 법관이 된 그는 특유의 처세술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은근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학교를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을 얻은 이반 일리치는 괜찮은 조건의 양가집 규수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달콤한 신혼도 잠시, 이반 일리치의 결혼생활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아내는 임신 후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이반 일리치는 그녀의 과민반응이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아내의 간섭과 잔소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이반 일리치가 선택한 것은 일이다. 집에서 잔소리를 하는 아내가 유일하게 침범하지 못하는 성역은, 남편이 돈을 벌어오는 일터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반 일리치는 이 점을 일찍 간파하고, 점점 더 일에 파묻힘으로써 복잡한 가정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반 일리치의 생은 완벽해 보였다.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가정, 판사로서의 커리어 그리고 적당히 원만한 대인관계.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그때,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옆구리의 통증은 점점 악화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지만, 그의 고통을 알아주는 이는 없다. 그는 깊은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정말 죽음인가?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초를 찾다가 촛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베개 위에 쓰러지듯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불을 켜서 뭐해? 다 마찬가진 걸.’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두 눈을 크게 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문 저쪽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흩어져 들려왔다)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 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그는 악에 받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밀려와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 '품위 있게 연출해온' 자신의 완벽해 보이는 삶이 고작 병 때문에 끝나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고통과 근심에 대한 방어기제로 그는 일에 더욱 몰두하기로 한다. 그는 일에 파묻히면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헛된 기대를 한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그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다. 힘없는 병자가 된 이반 일리치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 이제 그의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하다. 거짓된 위로와 희망으로 이반 일리치의 고통을 외면하는 주위 사람들. 이반 일리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극심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을 직감하곤, 자신이 지나온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그래도 한 때는 순수하고 진실한 면모가 있었던 어린 시절. 하지만 자라면서 그는 출세에 눈이 멀어 진실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다. 특히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품위 있는' 삶이 잘못된 삶의 양식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추구해 온 가치관, 신념, 삶의 태도 등이 - 자신은 그동안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왔던 - 잘못됐다는 점에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그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영혼의 목소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생각의 흐름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중략) ‘무엇이 필요하냐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고통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 거 말이냐?’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전에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지, 기쁘고 즐겁게.’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영혼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이전에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에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어렸을 때의 추억을 빼고는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어린 시절에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그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추억인 것 같았다. 기억이 어린 시절을 지나 현재의 그, 이반 일리치가 존재하는 순간에 이르자 그 당시 기쁨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녹아내리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심지어 구역질 나게 역겨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뒤늦게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이반 일리치.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무엇을 시작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기준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없다. 그는 고통스럽게 병마에 저항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맺음말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 작가였다. 죽음이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집필했다. 책에서 죽음을 앞둔 인물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보면 마치 톨스토이가 죽음을 경험해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과연 내가 죽기 전에는 무슨 생각이 들까?'를 상상해보았으면 좋겠다. 그때 느낄 감정, 추억 그리고 사람들.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일상의 초원에 숨겨진 네잎클로버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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