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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r 01. 2023

저물어가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

영화 <바빌론>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미국의 영화 산업 발전 초기이다. 당시에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도기였다. 미국 영화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는 성숙한 산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날 것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화 촬영 도중 엑스트라가 숨지거나, 단일 영화 스튜디오에서 복수의 영화들이 무질서하게 촬영되거나, 술, 마약, 섹스, 폭력으로 점철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영화계 관계자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양각색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무성 영화 시절 탑스타 대우를 받지만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적응하지 못한 잭, 특유의 눈물 연기와 섹스어필로 순식간에 인기 배우가 되지만 마약과 도박 문제로 불안정한 삶을 사는 넬리, 그리고 출세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명 영화 제작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멕시코 이민자 매니. 흑인 재즈 연주자에서 음악 영화배우로 발돋움했으나 인종 차별에 상처받은 시드니, 동양 여성 배우로서 소수자를 대변하던 페이.

유성영화 시대의 대 변혁기를 맞아 인물들은 각자의 선택을 한다. 선택의 결과는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붕괴, 꿈, 도망. 우선, 붕괴된 케이스는 잭과 넬리다. 한때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스타였지만 결국 잭과 넬리의 삶은 무대 뒤에서 쓸쓸하게 막을 내린다. 잭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넬리는 도박 빚을 갚지 못해 길거리를 전전하다 죽는다. 한편, 꿈에 해당하는 케이스는 시드니와 페이이다. 시드니는 흑인을 멸시하던 영화계와 상류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한 뒤 작은 바에서 재즈 연주를 하며 소박하게 살아간다. 페이는 꿈을 펼치기에 제약이 많은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도망의 케이스는 매니이다. 성공한 영화 제작자가 된 매니는 넬리와 만나면서 순식간에 인생이 꼬이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평범한 삶을 살던 매니는 자신의 청춘을 바친 도시를 다시 찾는다. 영화관에 들어선 매니, 그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매니가 그리워하는 것은 영화일까, 그때일까, 그 사람들일까, 아니면 도망칠 때 놓고 온 꿈일까.


영화 속 인물 중에 가장 눈길이 갔던 것은 잭이다. 잭은 잘 나가던 스타에서 퇴물로 전락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잭과 관련된 인상 깊은 장면들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잭은 유성 영화 시대에 대비하며 대사 연습을 하고 있고, 연극인 잭의 와이프는 그런 잭에게 발성 코치를 하고 있다. (당시에 연극은 영화 대비 고급문화로 취급되었다. 연극 업계는 영화 업계를 은근히 무시했다고 한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잭은 친애하는 친구 조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비탄에 잠긴 잭은 중얼 거린다. "조지는 처음 내게 재능이 있다고 한 사람이야. 그가 내 인생을 구원했어" 이런 사정을 모르는 와이프는 충분한 공감을 해주지 못하고 잭과 와이프는 실랑이를 벌인다. 은연중에 선민의식을 내비치던 와이프에게 잭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낸다. "영화는 저급 예술이 아니야!" 


두 번째 장면, 잭은 유성 영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한다.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자신의 연기를 보고 비웃는 장면에 크게 상처를 받은 잭. 설상가상으로 어떤 잡지에서는 잭을 대놓고 퇴물 취급을 한다. 화가 나서 잡지 편집장을 찾아간 잭. 그는 우리가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업계에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지 않았냐고, 어떻게 나한테 이런 푸대접을 할 수 있냐고 따진다. 그러나 편집장은 당신의 시대는 끝났다고, 스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만 스타로 불리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고 답한다. 화가 난 잭은 당신 같은 사람들은 (스타에 기생하는) 바퀴벌레라고 말한다. 편집장은 이를 인정하며, 집이 불타면 죽는 것은 사람이지 바퀴벌레가 아니라고 응수한다. 무력감을 느끼는 잭에게 편집장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당신이나 나나 언젠가 죽게 될 테지만 당신의 영화를 미래의 후손들이 보면 당신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냐고, 당신의 영화를 보는 아이는 당신을 마치 친구처럼 여길 것이라고. "당신은 선물을 받았어. 그러니 감사해. 당신은 천사와 유령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낼 거야" 잭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떠난다.


마지막 장면, 잭은 바에서 젊은 여성과 함께 있다. (참고로 잭은 연인 관계 및 결혼 생활에는 완벽히 실패한 사람으로, 옆에 있는 여성에게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한다) 잭은 우연히 페이를 만난다. 유럽으로 떠날 것이라는 페이. 한 때 무성 영화 시대를 함께했던 전우가 떠나는 기분이다. 잭은 페이의 도전을 응원하며 유럽에서 보자고 말한다. 자리로 돌아온 잭은 여성에게 잠시 볼 일을 보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가는 길에 계단에서 젊은 벨보이를 만난 잭. 잭은 말한다. "그동안 가장 많이 받은 팁이 얼마야?" 벨보이는 답한다. "50달러예요" "누가 줬는데?" 잭의 물음에 벨보이는 답한다. "당신이요" 잭은 거금의 팁을 벨보이에게 쾌착하며 호탕하게 말한다. "미래는 당신들의 것이야!" 방으로 들어간 잭. 잠시의 휴지기. 탕! 총소리. 하얀 벽면에 흩뿌려진 빨간 피. 벨보이는 잭과의 마지막 만남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바빌론은 영화에 대한 영화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영화를 있게 한 천사들과 유령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오랜만에 엔딩 크레딧까지 끝까지 본 영화였다.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훌륭한 미친놈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나는 영화를 제작하거나 연기를 할 재능은 없지만, 대신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준은 된다. 잭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바퀴벌레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본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 바퀴벌레이다. 그것은 바로 글을 써서 영화와 영화에 헌신한 사람들이 불멸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는 것. 그들이 저물어가는 존재라 할지라도. 


예전에 쓴 시 <저물어가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를 마지막으로 글을 맺는다. 


<저물어 가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

저물어가는 꽃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쳐다보지 말라


고개를 푸욱- 숙인 꽃들의

운명이 초라할 것이라고

함부로 단정짓지 말라


꽃들은 바람의 장단에

너울너울 흔들리며 노래한다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더할 나위 없었노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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