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뒷광고가 아니다
엄마는 언제가 가장 최고의 전성기였어? 퇴직하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엄마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는 답했다. 본인은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며 퇴직 이후의 삶도 기대가 된다는 것. 생각해 보니 엄마다운 답변이다. 성취욕이 강한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나에게 있어서 항상 진취적이고 활기찬 에너지가 가득한 여전사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엄마는 30 넌 넘게 교직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정년퇴직했다. 퇴직을 앞둔 1-2년 전, 엄마는 본인도 아들처럼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내용은 영어 교육에 관한 것으로. 그동안 몇 권의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는 나는 엄마에게 이런저런 팁을 줬다. 처음에는 솔직히 엄마가 이것을 끝까지 해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책을 쓰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이것을 실천한 사람을 나는 그동안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글을 쓰는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다. 매일의 일과에 치여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글을 써야 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도 좋은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논픽션을 쓰는 경우, 참고해야 할 서적들이 많아서 이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재능의 한계를 느끼며,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하고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든다.
엄마도 역시 처음에는 글쓰기를 힘들어하며 끙끙거렸다. 이미 책을 몇 권이나 낸 내가 대단해 보인다는 엄마에게 "어때, 해보니까 글쓰기가 쉬운 게 아니지? 이제야 아들의 진가를 알아보는구먼"이라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창작의 고통과, (창작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느끼지 않았을) 불행을 엄마가 느끼는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는 과정도 고통이거니와, 글을 다 쓴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이후에 투고를 하는 단계에서 무수히 많은 거절이 기다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책을 낸다고 해도 보통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무명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외면받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기 마련이다. 실망하는 대상이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든, 혹은 재능이 부족한 자신이든 간에 말이다.
솔직히 나는 엄마가 크게 실망하기 전에, 스스로 지쳐서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책을 쓰는 것에 꽤나 진심이었던 것 같다. 퇴직을 앞두고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던 모양이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글 쓰는 일에 매달렸고,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을 동원해 결국 원고를 완성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누나를 공저자로 끌어들였고, 나와 조카들도 지면의 일부에 기여했다) 심지어 원고를 완성하자마자 출판사와 계약까지 해서 얼마 전에 책을 냈다. 제목은 <영어 공부 방향이 먼저다> 저자가 평생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느낀, 한국의 영어 교육 문제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영어 교육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부모, 그리고 교육자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브라보! 엄마는 바람대로 은퇴 시기에 맞춰 자기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에 성공했다. 기쁜 마음에 엄마는 출간을 도와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책을 낸 지 1달이 조금 지난 지금, 결과는 어떨까? 꿈만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고, 엄마는 유퀴즈에 출연하거나 박막례 할머니처럼 유튜브 스타가 되지는 않았다.
작가의 첫 작품은, 대개의 경우 그가 명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시장에서 외면받는다. 작품의 질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엄마는 첫 책 출간 이후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에 대해 속이 상한 듯하다. 책을 알리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듯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속상해하고 있는 엄마를 위해 나는 예전에 내가 쓴 글을 공유해 주었다. 엑스트라여도 괜찮아 이 글은 2017년 9월에 쓴 것으로, 당시 나는 첫 책이 (민망한 수준이라 작품명을 다시 언급하기도 부끄럽다)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받아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해당 글을 발췌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출판시장에서 철저히 무명임을 느낀 후, "아 나는 획은커녕 점도 아닌 미물이구나" 라며 겸손을 강제로 배우고 있다. 내 이름으로 책을 출판한다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닌 과정이었기에, 실패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어쩌면 현실인정하기 싫은 인지 부조화일 수 도 있다) 다만 출판 시장에서 아직 나는 삼류 엑스트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는 그거 해서 뭐 할 건데?라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꼭 뭐 해야만 해? 출판사에 수많은 거절을 당하고 때때로 자괴감을 느끼면서 꾸준히 책 낼 생각을 하는 건 그냥 좋아서다. 아마 라이언킹 무대 속 수많은 조연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아무리 나 좀 봐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부르짖는,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엑스트라지만, 그냥 그 자체가 좋아서. 그러니 주변에 바보같이 돈도 안 되는 일 고집부리면서 하는 엑스트라가 있을지라도 이해해 주자. 남들에게 아무리 무모해 보이고, 승산 없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엑스트라 당사자들은 그냥 그게 좋아서 하는 것이라는 걸. 그냥 그 일을 할 때 행복하니까 배고픔을 참아가며 버티는 것이라는 걸.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을 어느 무명의 존재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이런 건 원래 그 분야에 올인해서 무명으로 고생하다 성공한 사람이 말해야 멋있는 거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당신의 바보 같음에 박수를 보낸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저 글을 쓴 이후 6년이 지났다. 첫 책을 출간한 이후 매년 1권씩 책을 냈지만 나는 여전히 무명작가다. 하지만 이제는 책의 판매량에 실망하지 않고 작가로서의 명성에도 딱히 집착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냥 좋아서 하는 부업이기에, 이것이 나의 밥벌이나 인정욕구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엄마도 마찬가지의 마음이기를 바라며 시장의 미온한 반응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출판시장에서는 엑스트라일지 몰라도, 나와 가족에게는 주인공이니까. 나는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그녀가 이제는 좀 내려놓고 남들처럼 푹 쉬면서 노년을 즐기기를 바란다. 강인한 여전사가 아닌 온화한 할머니로서 말이다.
아 참, 이 글은 뒷광고가 아니다.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351504
예스 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2598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