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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빈 Feb 10. 2016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1

[첫째 날]  스물셋 생일날 생긴 일 

                                              

만약 내가 한 겨울에 이 열차에 몸을 실어 

창밖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다면,

이곳은 흡사 설국열차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 꼬리 칸이라 불렸던  그곳에서,

하루에 한 시간 씩 시간을 거스르는 이 열차 속에서,

나는 그렇게 시베리아를 달렸다.




8월 17일, 스물셋 내 생일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침대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서양인들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오니, 다시금 내가 정말 시베리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때처럼 핸드폰을 켜자 사람들의 생일 문자와 더불어 엄마의 미역국 사진 한 장이 보인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흰 쌀밥과 미역국을 보자 솟구쳐 나오는 눈물에  이불속에 다시  숨어들었다. 한편으론 제사상처럼 생긴 밥상이라는 생각에 피식. 미리 챙겨 온 미역국용 햇반을 먹으면 눈물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어제 블라디보스토크 마트에서 둔 차가운 빵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내가 일주일간 머물 침대칸은 맨 끝 칸이라 그런지 칸막이가 있어 발을 뻗고 자기가 어렵다. 마음도 심란한 찰나에 잠자는 것마저 힘들어지니 모든 게 서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바롭스크 역에 정차했다. 1시간 동안 정차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바깥에 나갈 채비를 했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다. 어젯밤에 함께 탄 맞은편의 승객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다. 매정해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니 이제야 내가 문득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보인 하바롭스크의 횡단보도는 블라디보스토크와는 또 다른 모습이고 우리나라 횡단보도와 같은 모습이다. 땅이 넓으니 지역별로도 사는 모습이 다양할 수 있겠구나.


창밖엔 똑같은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무궁화호를 타고도 6시간이면 끝과 끝을 이동할 수 있는 우리와 달리, 몇 시간이 지나도 끝없는 광경이 펼쳐지니 신기하다. 정차하는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이 드넓은 땅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다. 김광구 교수님 말처럼 이 황폐한 땅의 일부만 우리에게 줬어도 멋지게 가꿀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맞은편에 새로 탄 한 남자 승객이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결국 내게 말을 건다. 딱 봐도 동양인처럼 보이는 내게 러시아어로 말을 걸던 이 남자.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 국적과 기차에 탄 이유를 그림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 때문에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화가 끝났다. 

지난 15일 인천공항에서 떠난 뒤 누군가와 대화를 한 게 처음이었는데, 입을 움직이니 이제야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떠난 지 3일 만에 느낀 식욕이다. 왕뚜껑 우동맛을 꺼냈다. ‘흡입’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허겁지겁 먹었다.


내가 기대했던 북한 사람은 못 만날 것 같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러시아인으로 보인다. 이럴 줄 알았다면 러시아 회화책이라도 한 권 가져와 이들과 대화라도 시도해볼 걸이라는 생각에 후회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만큼은) 러시아의 여름 또한 우리만큼 덥다는 것. 나도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러시아의 여름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덥다. 게다가 냉방이 전혀 안 되는 기차 안의 체감 온도는 바깥보다 더욱 높다. 해가 중천에 뜰 즈음에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뻘뻘 난다. 샤워가 하고 싶지만 내가 탄 99번 기차에는 샤워실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  2번 기차에는 샤워실이 있단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돈을 좀 더 주고 그 기차를 탈걸 그랬다. 그래도 바깥은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것 말고는 선선한 편이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쏜살같이 뛰어나가 상쾌한 바람을 느끼곤 했다.



통일이 되면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자원 이동의 용의성이다.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물자를 이동시키는 기차가 많이 지나갔는데, 대부분이 돌, 석탄, 정체불명의 박스들 그리고 많은 자동차를 싣고 지났다. 비행기나 배가 아니면 자원의 수입이 어려운 우리나라의 위치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일이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 있어 시간은 항상 나를 얽매여왔고(내가 시간에 얽매였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 틀에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다. 시간을 내서 여유를 가졌고, 조금이라도 낭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없는,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이 필요 없는 곳에 있으니 본래의 나의 모습을 되찾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이곳에서 유일한 나의 시계는, 기차역에 정차할 때마다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기차 시간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유심이 러시아 전 지역 유심이 아니라서 로밍 요금이 청구된다는 문자가 왔다. (러시아 어학을 전공하는 오빠에게 물어봐서 겨우 이해하게 됐다.)  첫날부터 이런 문자를 받으니 불안하다. 큰 도시에 내리자마자 충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마음이 불안하기 보다는 부모님과 남자친구가 내 연락 때문에 걱정을 할 것을 생각하니 막막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터가 끊겼고, 갑자기 이 열차에 탄 것이 후회가 됐다.


러시아 사람들이 ‘도시락’ 컵라면을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러시아인이 이렇게 즐겨먹을 줄은 몰랐다. 놀랍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맡은 역한 냄새는 내 비위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이 도시락면을 먹을 때마다 나는 숨을 참고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 라면과는 제조가 다르게 되나 보다.


결국 저녁 즈음이 돼서야 미역국 햇반을 먹었다. 왠지 생일날 안 먹으면 더 서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 종일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못 들었던 게 내심 섭섭했던 나는, 앞에 앉은 사람에게 생일이라고 말을 했고 결국 ‘Happy birthday to you!’라는 메시지를 얻었다. 짧고 성의 없는 한 마디었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로 축하를 받으니  또다시 눈물이 났다. 나도 참.


사실 내가 러시아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글을 적고는 있지만, 진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운받아놓은 한-러 오프라인 사전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나, 비행기, 후회하다, 기차, 나, 꿈’ 이런 식으로 화면을 보여주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외국어를 잘 하면 좋겠다.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그들을 통해 얻는 새로운 경험도 많이 있을 테니. 그래도 이렇게 사전을 통해 이야기가 간간이 통하니 기쁘다. 교환학생 기간 동안 영어나 열심히 배워야지.


대학교 1학년, 국토대장정을 했을 때의 느낌처럼 욕구를 충족하려는 본능이 시작된 것 같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졸리고, 배고프면 무언가를 꺼내먹는다. 


화장실 이용 팁! 물이 졸졸 나와 씻기 어렵기 때문에 물티슈에 물을 더 묻혀 쓰면 씻는 느낌이 난다. 내일은 여기에 샴푸도 묻혀서 써봐야겠다. 머리는 아마 물을  사 와서 감아야 될 듯싶다. 일단 3일째 까진 버텨봐야지.



                                                                                                                         - 2탄, 8월 18일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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