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혜빈 Feb 13. 2016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2

[둘째 날] 내가 만난 러시아 친구들


8월 18일, 나의 첫 러시아 친구들


비가 오는 오늘은 선선하다 못해 춥다. 그래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던 어제보다는 삶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게다가! 오늘은  오랜만에 큰일을 봤다. 하하.


말은 안 통했지만 나를 잘 챙겨줬던 함자가 곧 내린다. 그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쉽다. 함자에게 고맙다는 한국어가 적힌 쪽지를 전해줬다.


주변에 새로 탄 남자 5명은 굴착기 등을 운전하는 노동자들이다. 아무래도 저렴한 기차 칸이라 노동자들이 많이 탄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유쾌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첫인상에서만 무섭게 보이지, 실제로 대화를 나누면 모두 유쾌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첫 만남과는 다르게 알고보면 정이 많은 것처럼. 이들에 대해 내가 너무나 많은 편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그 대상에 대한 무지함인 것 같다. 이를 테면 러시아는 치안이 안 좋고 위험한 곳이다, 항상 추울 것이다, 모두 무뚝뚝하다는 등의 사고를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젓가락질을 못하는 러시아인은, 아니 서양인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라면을 잘게 부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왠지 젓가락질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느껴져 평소보다 더 열심히 젓가락질을 해본다. 이들이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여러 노동자 중에서도 나를 굉장히 재밌게 만들어준 친구가 하나 있다. ‘바샤’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나이인데도 아이도 둘이나 있는 듬직한 가장이다. 바샤가 노트북에 담아온 재미난 영상들을 보여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2시간이 금방 지났다. 오랜만에 컴퓨터 스크린을 집중해서 보니 눈이 피곤해졌고, 하품이 계속 나왔다.


거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 입맛이 없다. 아마 집을 떠난 공허함과 첫 타지 생활에 대한 긴장감,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6개월간의 교환학생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배가 빈 느낌이 항상 들었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차라리 이 열차를 교환학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탔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갑자기 이 한  여름날 열차를 타려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과 더불어, 쓸데없는 나의 고집도 작용한 것 같다.


내일이면 정말 머리가 감고 싶을 것 같다. 이미 많이 가렵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다스리며 참고 있다. 시원하게 머리를 감는 상상을 하다 보면 내 보통의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금 깨닫곤 한다. 오래 정차하는 역에 도착하면 큰 통에 담긴 물부터 사야겠다.


러시아 여자들은 하나같이 몸매가 좋다.(아니면 그런 사람들만 눈에 띈 것일지도 모른다.) 몸의 라인뿐 아니라 살이 탄력 있어 축 쳐져있다는 느낌이 없다. 이들을 보며 운동을 하고 싶다는 자극을 많이 받았다. 단지 살을 빼는 운동이 아니라 탄탄한 몸매를 위한 운동!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이들의 타고난 유전적 특징일 거라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했다.


일주일간의 기차여행을 통해 러시아인들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일이다. 특히나 식생활은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쉬운 부분이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빵이라 면 등의 밀가루 음식을 즐겨먹으며, 빵에 토마토와 오이, 햄을 항상 곁들여 먹는다. (물론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한정된 시선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을 테지만) 더 재밌는 건 토마토와 오이에 많은 소금을 쳐서 먹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나에게 토마토와 오이를 권했을 때, 소금 없이 먹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는 표정이 재밌다.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초코파이를 정말 좋아해서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20분짜리 정차 역에 내리니 작은 슈퍼 안에 휴대폰 데이터 충전기계가 보여서 200 Rub(우리 돈 4000원)을 충전하고, 머리를 감을 5리터 물도 샀다. 커다란 물통을 들고 낑낑대며 열차에 오르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통신과 위생의 해결로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러시아는 큰 땅덩어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인구는 1억 뿐이란다. 일본과 비슷하며, 통일을 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총인구와도 비슷하다. 중국은 그에 비해 1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지고 있다. 문득 세계 경제를 휘어잡을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땅? 자원? 인구? 기술? 교육?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서양인 특유의 냄새가 힘들게 느껴질 거라고 충고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독특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쉰 느낌의 그 냄새. 가끔씩 그런 냄새가 더 심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특별한 냄새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이 열차를 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탄 이 5명의 노동자들 덕분이다. 이들은 나를 이질적인 세계 속에 사는 동양인이 아닌 그들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친구로서 대해줬다. 홍세화 씨가 책에서 말한 “한 세계와 다른 세계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노동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 러시아 영화라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그저 화면만 멍하게 쳐다보고 있지만,  마음속으론 이들을 만난 기쁨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정 많은 이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글을 정리하는 지금도 나의 이 소중한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정말 마셔보고 싶었던 러시아 맥주를 드디어 맛봤다. 사실은 그동안 술이 많이 고팠다. 안 그래도 불안했던 첫 여행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알딸딸한 상태로 돌아다니면 위험할 것 같아서 계속 피했던 음주였다. 노동자들이 컵에 맥주를 따라주자마자 단 숨에 들이켰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또다시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신나는 러시아 음악과 함께 한바탕 술판을 벌였다. 역시 술은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 만국 공통어다.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에(사실 간단한 다과회 수준이지만) 나는 들떴고, 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한국 과자와 김을 안주로 소개했다. 김을 참 맘에  들어했다. 아마 한국 여행 중 김맛을 한 번 본다면,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외국인은 단 하나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된 순간이었다. 문득 서울 도심 길거리에서 커다란 김 한 장을 들고 간식처럼 먹고 있던 한 외국인 꼬마가 생각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용납되는 이곳이 참 좋다. 아마 내가 더 바쁘게 지내다가 휴가 삼아 왔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으리라. 만약 당신의 일상이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다면 다른 어떤 여행지보다 이 기차 안을 추천한다.


사실 대단한 호의는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러시아 사람들의 ‘정’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담배를 사러 나가는 길에 나를 위해  사 온 아이스크림이며(나를 위해 3개나  사 왔는데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 다 먹다가 배탈이 나는 줄 알았다.), 러시아인이 즐겨먹는 해바라기씨 그리고 온갖 다양한 음식들. 오랜만에 마음이 풍요로워졌고, 내 배 또한 풍요로워졌다. 그러고 보면 난 참 먹을 것에 약한 사람이다. 아무튼 기차에서 이들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화장실 수돗물이 한 방울씩 뚝! 뚝! 뚝! 나오는데도 사람들이 수건을 들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나처럼 앞뒤로 수도꼭지를 당기는 게 아니라 위로 눌러야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물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 줄~줄~줄~ 5리터짜리 물을 사가는 나를 왜 이상하게 쳐다봤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이 상황이 너무 웃기다.


아저씨들 무리에 놀러 온 한 아줌마가 나를 혐오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굳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 사람의 표정과 억양 그리고 몸짓으로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다. 나의 작은 움직임 또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누구를 만나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어딜 가든 나를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안 반기는 사람,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 필연적인 일이다.



이 마음 착한 아저씨들은 내가 자고 있는 새벽에 탔는데, 자다가 잠깐 깼을 때 덩치 큰 남자들이 어둠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비몽사몽 한 상태였음에도 드디어 김광구 교수님이 말한 거대한 덩치들이 등장한 것인가 싶었다.


핸드폰 충전은 각 칸의 맨 앞과 뒤에서만 할 수 있다. 나는 이날을 위해 준비해 온 샤오미 보조배터리 10000을 자랑스럽게 꺼내 충전해오다가 7일을 버티기엔 부족한 감이 있어 결국 화장실 앞 콘센트로 향했다. 짧은 충전 끈을 가져와서 아등바등 대며 충전을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 학생이 자기 것을 빌려주겠다며 나섰다.

내가 칸 탄에는 수 십 명의 청소년들이 타고 있었는데 수학여행 또는 걸스카우트 같은 학생 단체 느낌이었다. 물어보니 중학교 2학년생들이란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발육 속도를 보여 나는  고등학생쯤 되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은 놀랐다. 서로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이 아이들은 영어를 배운 적이 없는지 이름을 묻는 정도로만 대화가 끝났다. 내가 만난 친구들은 앙드리, 셰니아, 이리아라는 이름의 친구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 중 앙드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정말 많다. 기차 여행 동안 무려 셋씩이나 만났으니, 우리나라의 철수 정도인가 보다.



‘아임 프롬 꼬레아’라고 하면(코리아라고 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에 '꼬레아'라고 발음했다.) 다들  그다음 질문으로 남쪽인지, 북쪽인지 묻는다. 남쪽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북쪽이라고 했을 때의 이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한 승객에게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냐고 물으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부럽다 나도 만나보고 싶다.


오늘은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났다. 선선한 날씨에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 2015. 8. 18.

매거진의 이전글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