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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빈 Feb 28. 2016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6

[여섯째, 그리고 마지막 날] 굿바이 시베리아!


8월 22일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차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조금은 아쉽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 터무니없는 여행이라고, 또 누군가는 시간낭비가 될 거라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게 기차에서 할만한 의미 있는 것들을 챙기라고 조언했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나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나라 사람들의 삶 속에 파고드는 일"


목적을 두고 어딘가로 떠나는 백과사전식의 정의가 아닌,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는 일 자체가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내게 좀 더 특별했고,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될 거다. 

교환학생을 하면서 중간중간, 또 학기를 마친 뒤에 하게 될 유럽여행이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 같은 기회가 또다시 주어지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이번 기차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끔 도와준 기회가 된 것 같다.



중국인 친구들(슈쩌양과 웬뤠이씬)이 갑자기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중국어를 모르지만 억양과 상황을 봐서 토론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 후에 대화가 끝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니 ‘대학이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지’였다. 둘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어느 정도 타협을 했다고 전했다. 중국 학생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신기했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촌임에도,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비슷한 삶을 구성하고 있겠구나.


중국인 친구들도 많이 불평하는 이 여행의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러시아인이 영어를 너무 못한다는 것. 그렇다, '21세기 글로벌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이 곳은 러시어가 아니면 소통이 너무나 어렵다. 


사람은 계속 만나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은 맞지만, 역시나 사람 얼굴에 나타난 인상도 무시할 수 없는 큰 부분이다. 인상이 좋을수록 괜찮은 사람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앉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는 인상이 참 좋다. 특히나 웃는 모습이 예쁘다. 바깥에 예쁜 풍경이 펼쳐지면 다른 사람들과 항상 공유하고 싶어 한다.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말을 잘 붙이는 살가운 성격이다. '가댠'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내가 기차에서 만난 가장 편한 느낌의 또래였다. 


오늘 5시까지 통신을 차단하지 않으면 북한에서 위협을 가하겠다는 기사를 봤다. 가끔씩 핸드폰 속보로 뜨는 것을 무시해오다가 윤성훈이 보낸 '한국 왜 이러냐'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봤더니 역시나.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란다. 한국에 있었으면 덜 걱정했을 것을, 막상 바깥에 나와 있으니 괜한 생각이 든다. 걱정을 많이 해서였는지 유진이 말을 걸어도 한동안 시큰둥했고 음식 생각도 없었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이 열차를 다시 타고 싶다. 그때는 서울역에서 출발해 평양을 거쳐 다시 이 땅을 밟으리라.


처음에 이 기차에 오를 때는 많은 걱정을 했는데 막상 이 안에서 마지막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나는 정말 럭키걸이다. 모든 상황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국에 대한 러시아인의 혐오감은 대단하다. 미국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부시, 오바마 같은 정치세력을 정말 싫어했다. 그들의 말을 빌려, 권위적으로 세계 질서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발끈하는 얼굴로 욕을 하는 러시아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반면 재밌는 것은 푸틴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 굉장히 친근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이들의 삶 속 많은 부분에 푸틴이라는 존재가 있는  듯했다. 


러시아는 유난히 구름이 낮게 깔려있어서 하늘도 더 낮게 느껴진다. 마치 만화 속에서나 나오는 하늘 모양 같다.



유진이 계속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부른다. 어디서 알게 됐냐고 물으니 유튜브에서 봤단다.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이 예뻤다는데, 내가 많은 한국 연예인들이 성형을 했다고 초를 치니, 환상이 깨졌다고 엄청 속상해한다. 어찌나 속상했는지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그 뒤로는 계속 강남스타일 노래가 좋다며 흥얼거린다. 유진이 특히나 좋아하는 파트는 ‘옵옵오오오 오빤 강남스타일’이다. ‘옵옵’ 이 부분이 재밌나 보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백만 송이 장미의 원음은 러시아 민요다. 그래서 유진이 더 좋아했었나 보다.


러시아 빵에는 기름이 많다. 내 생각에 여기서 호떡 장사를 하게 되면 잘 될 것 같다. 맛도 비슷하고, 달달함까지  갖춘 데다가 즉석에서 만드는 따뜻한 음식이기에 많은 인기를 끌 것 같다. 


언젠가고 계속 이 기차에서 머무를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에스토니아에 도착하면 러시아어 책을 사서 제대로  공부해봐야지!라고 다짐했으나,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영어도  힘들어하며(그리고 노는 것이 더 좋아서)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다른 나라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 나라 언어를 들으니 모든 나라의 언어가 다 흥미롭게 느껴진다. 요즘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중에 진심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다시 시작해야지.


러시아엔 트리처럼 생긴 나무가 많다. 아마 이 험난한 기후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엄청나게 강하겠지.


반대편에 탄 할아버지는 완전 수다쟁이다. 어제부터 계속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더니 오늘은 아예 우리 칸에 와서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놨는데, 어찌나 재밌게 이야기하는지 유진이 숨넘어갈 듯이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이 더 웃겼다. 항상 목사라는 직업은 조용하고, 품위를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유진을 보면 그냥 동네 옆 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느낌이라 좋다. 이렇게 매력이 터지는 목사님이 주변에 있었다면, 종교를 믿지 않는 나조차도 교회에 가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7일간의 횡단 열차는 러시아인의 교통수단이자 러시아인의 인생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하루 종일 교감할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가졌다. 더불어 ‘여행’의 새로운 의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재미난 여행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첫 해외여행이 이 미지의 영역인 러시아라서 기쁘고, 이 나라에 대해 참 많이 알게 되어 더 기쁘다. 


책 읽기를 즐기는 나는 책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울 때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것들과 부딪히다 보니 그보다 더 큰 자극,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 그래서 내가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 


밤기차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것은 정말 재밌을 것 같다. 러시아어만 할 수 있었다면 나도 이들 사이에 껴서 밤새 수다를 떨었을 텐데. 이런 것들이 러시아 기차여행의 묘미인가 보다. 수학여행 새벽에 친구들과 속닥속닥 거리며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느낌. 내 앞에 지금 유진과 가댠, 웃긴 할아버지가 불이 꺼진 기차 안에서 조용히 수다를 떨고 있는데 즐거워 보여서 부럽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8월 23일


정말 마지막이다. 내리기까지 오직 2시간이 남은 이 시점에서,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지난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듯했다. 한 편으론 아쉽고, 한 편으론 속이 시원하다. 이제 나는 정말 자유다! 그렇지만 앞으로 펼쳐질 6개월간의 교환학생 생활이 걱정된다. 잘 해낼 수 있겠지.



이전에 교과서에서만 배워왔던 시베리아 땅을 내가 이렇게 횡단하고 있다는 게, 생각해보면 정말 놀랍기도 하고, 무모하기까지 하다. 젊을 때는 사서 고생하라는 말만 믿고 배낭 하나만 달랑 매고 이곳에 왔다. 이런 내가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인생이 참 재미나기도 하고.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10월의  첫날이다. 벌써 교환학생 생활을 한지 한 달이 흘렀고, 그동안 나는 정말 바빴지만 이 글을 네 번째 수정하는 중이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다. 그냥 칠일 간의 나의 모든 생활과 생각을 솔직하게 기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나를 위로한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또다시 이 글을 정독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이 글을 읽고  또다시 이상한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하진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칠일 백오십 시간 백 이십사 개역 구천 이백 팔십팔 킬로미터.


안녕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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